주간동아 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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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 영웅 vs 현실적 인간

  •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도서출판 일빛 편집장

    입력2007-07-25 16: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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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적 영웅 vs 현실적 인간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가 그린 ‘세이렌’<br>(1900년).

    ‘장길산(황석영)파 대 임꺽정(홍명희)파’‘토지(박경리)파 대 혼불(최명희)파’ ‘태백산맥(조정래)파 대 변경(이문열)파’ 등과 같이 독서에는 취향에 따른 독자군(群)이 있다. 호메로스의 양대 팬덤(fandom·마니아 현상) 사이에서 나는 ‘오디세이’ 팬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24장에서 한 말처럼 “일리아드는 단순하나 오디세이는 세련”되었기 때문이다.

    ‘일리아드’의 영웅들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토끼처럼 풀을 먹는 게 아니라, 호랑이처럼 늘 고기만 먹고 시대적 배경이 철기시대인데도 패션쇼에 나가는 양 ‘반짝이는’ 청동제 투구와 갑옷을 입고 출정한다. 전투 중 가벼운 상처를 입거나 벚꽃처럼 찰나에 죽어버릴 뿐, 큰 부상을 당하고 죽음 앞에서 서서히 나약해지는 추레함은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화살은 떨어질 줄 모르고 돌멩이를 던지고 싶으면 이미 투석용 돌이 옆에 놓여 있다. 여름과 겨울이 없고, 폭풍우 같은 궂은 날씨도 없는 자연 또한 비현실적이다.

    반면 ‘오디세이’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칼립소와 키르케의 유혹에 빠지는 남자의 빈틈, 나이 오십 줄 넘어 20년 만에 아내 페넬로페 앞에 나타나 남자이자 가부장 남편의 위엄을 보여주지 못하는 회한어린 늙음, 아내를 농락한 이들에게 복수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전전긍긍하는 ‘반영웅’ 기질 등 인간적인 면을 보여준다. ‘일리아드’의 주인공 아킬레우스 같으면 영웅답게 모욕을 참지 못하고 당장 복수의 난도질을 했을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겨울과 폭풍, 기아에 시달리기도 한다. 또 이 작품에선 거지와 서민, 종도 중요한 인물이다. 심지어 거지로 변장한 옛 주인 오디세우스를 맨 처음 알아본 것은 ‘개’ 아르고스다. 이렇게 ‘일리아드’보다 ‘오디세이’가 휴머니즘과 리얼리즘을 더 갖추고 있기에 ‘오디세이’ 쪽에 기우는 것이다.

    아킬레우스가 장비라면 오디세우스는 제갈공명

    모티프도 그렇다. ‘일리아드’에는 아내를 빼앗긴 스파르타의 메넬라오스, 동맹자의 치욕을 씻어주려 트로이 전쟁을 이끄는 그리스 총사령관 아가멤논, 친구가 죽자 전쟁파업을 그만둔 아킬레우스 등 ‘분노 모티프’가 전부다. 하지만 ‘오디세이’는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의 성장통, 모험소설의 원형인 바다와 선원이야기, 근대소설의 중요한 모티프인 오디세우스의 ‘귀향’등 구성이 복잡하다.



    리더십 차원에서도 살펴보자. 아킬레우스가 사납고 자제력 없고 굽힐 줄 모르며 오직 싸움으로만 불멸의 명성을 추구한다면, 오디세우스는 참을성 많고 임기응변에 능하고 지혜와 끈기로 운명을 개척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다. 오디세우스가 오늘날의 최고경영자(CEO) 유형에도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아킬레우스가 장비라면 오디세우스는 제갈공명이나 조조에 가까운 것이다. ‘CEO 제갈공명(조조) 경영철학’은 본 적이 있지만 ‘CEO 장비 경영철학’은 읽은 적이 없지 않은가.

    호메로스는 나관중이나 사마천처럼 숱한 서양속담을 낳기도 했다. 아킬레스건, 트로이의 목마, 로터스 랜드(Lotus land·무릉도원), 로터스이터(Lotus-eater·무위도식),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Between Scylla and Charybdis) 등이다. 오디세우스는 마녀 세이렌의 치명적인 노래를 뒤로하고 두 개의 절벽 사이를 지나가야 했는데, 한쪽은 인간 몸통에 6개의 개머리를 가진 스킬라, 다른 한쪽 절벽 아래에는 ‘공포의 소용돌이’ 카리브디스가 있었다. 어느 쪽을 먼저 지나갈지 막막한 진퇴양난이었다. E.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 있는 역사의 딜레마를 이렇게 설명했다.

    “역사란 사실을 해석하는 것보다는 사실이 무조건 우월하다고 보는 틀린 역사이론의 스킬라와, 역사란 역사가가 주관적으로 해석과정을 통해 역사의 사실들을 확정하는 타당치 못한 역사이론의 카리브디스 사이에서, 과거에 무게중심을 두는 역사관과 현재에 무게중심을 두는 역사관 사이에서 어렵사리 항해하고 있는 셈이다.”

    황금만능·소비욕망 등 현대에도 키르케의 마법 작동

    이상적 영웅 vs 현실적 인간

    오디세우스를 형상화한 그림.

    또한 마녀 세이렌은 동화 ‘인어공주’(안데르센), 나우시카 공주는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미야자키 하야오)의 주인공으로 다시 살아났고, 독일의 사회학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오디세우스를 “시민적 개인의 원형”으로 파악하기도 했다. 두 학자가, 시민은 근대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한 특정 시기의 역사적 산물이 아니라 신(자연의 의인화)과 맞서 싸운 고대인 오디세우스에서 시작된다고 하며 그의 귀향을 ‘계몽의 역사’라고 한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오디세우스에게서 ‘도구적 이성의 간지(奸智)’, 즉 머리를 써서 난관을 극복하는 이성적 인간의 조상을 발견한 셈이다.

    세이렌의 노래를 독점한 오디세우스 이야기는 근대 부르주아가 지배계급이 되어 예술(세이렌의 노래)과 노동을 분리해 예술의 향유는 지배계급, 노동은 피지배계급(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이 담당한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물론 2001년 성균관대 논술처럼, 세이렌의 노래에 취하는 선원에게서 스타에 열광해 판단력과 자아 정체성을 잃어가는 오늘날의 청소년들을 연상할 수도 있다. 고전 해석은 다양성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또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가 자신의 이름을 ‘우데이스(Nobody·아무도 아닌 자)라고 하면서 눈을 찌르고 도망간 오디세우스를 우데이스라고 소개하는 대목에선 시민적 사유의 원형인 유명론(唯名論)을 엿볼 수 있다. 즉 야만인인 폴리페모스는 사물과 이름을 직접적으로 연결하지만, 기호화된 근대의 언어(오디세우스의 언어)는 사물과 필연적 관계가 아니라 추상적 개념관계에 불과한 것이다. 특히 오디세우스가 마녀 키르케를 만나는 대목은 후기자본주의 인간의 욕망과 소외현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변신시킨다. 그런데 진짜 비극은 돼지가 된 부하들이 돼지가 되기 전 자신들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데 있다. 돼지 부하들은 “나는 돼지가 아니라 사람이다”라고 사자후를 토하지만, 밖으로 나오는 분절음은 꿀 꿀 꿀! 언어와 기억의 전도현상, 비극의 극치다.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오늘날 인간은 상품이 되었다. 그러나 상품이 되었으면서도 그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며 키르케의 마법이 오늘날에도 관통하고 있다고 한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인간은 노동력을 파는 순간 상품이 되어버린다”고 한 ‘물화(物化)’ 개념이다. ‘키르케의 돼지(상품)’가 된 ‘현대의 오디세우스 부하’(노동자)들은 상품이 아니라 인간임을 기억하고, 인간임을 주장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상품이 아니라 인간이다”라고 외치고 노동력을 팔지 않는 순간 ‘목구멍이 포도청’인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노동과 자본은 태초에 인간을 위한 수단이었으나 주객이 전도돼 그것이 하나의 ‘의제상품’이 되고, 거꾸로 인간이 그것을 위해 복무한다고 했다. 시몬 베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키르케의 돼지는 바로 노동자이고 돈이 물신화(物神化)되는 게 악의 근원이라고 갈파한다.

    “노동자 계층에서 여러 부서와 직무 사이에 형성된 관계란 다만 사물간의 관계일 뿐 인간 상호간의 관계는 아니다. 이 부품이야말로 바로 인간이며, 노동자는 다만 교환 가능한 부품이라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물이 인간의 역할을 하고 인간이 사물의 역할을 하는 것이야말로 악의 근원이다.” -시몬 베유 ‘노동일기’, 서강대 2003년 정시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숱한 키르케의 마법이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 무엇을 물신화해 인간보다 앞에 두는 현상 말이다. 황금만능주의, 북한의 절대적 주체수령, 무한질주의 소비욕망, 영어공화국, 학벌만능주의, 신자유주의 만능의식 등을 떠올려보라.

    오디세우스는 ‘헤르메스의 마늘’인 몰리를 먹고 키르케의 돼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오디세우스를 도와준 아테네나 헤르메스 같은 신은 없다. 후기자본주의 사회, 키르케의 마법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이는 당대의 화두다. 그러므로 논술의 단골 주제다. 키르케의 돼지가 마법을 벗어날 때까지는 돼지 속에 소외당한 자기를 기억하는 게 최선이었다. 지금 우리, 물건으로서의 인간들은 우리를 물건이게 하는 조건을 망각하지 않는 게 최선일까. 그러면 삶의 질이 보장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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