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나온 이들을 그린 논픽션 ‘일 분 후의 삶’을 쓰면서 내 눈길이 자연스럽게 가 닿았던 것이 있다. ‘죽음에 필적할 만한 위기’에 위인들은 어떻게 맞섰는가 하는 점이다. 위기는 오랜 기간 내부에 응축된 힘이 순간적으로 솟구쳐 나오게 하는 촉발제이기 때문이다. 운명의 오류처럼 다가오는 그런 위기에 맞선 위인들의 태도를 통해 우리는 그들의 본질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새벽 3시에 바다에 빠진 故 정주영 회장 “거참, 시원하군”
우선 떠오르는 것이 작고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대한 것이다. 그는 1973년 11월 울산에 건설 중이던 현대중공업 공사 현장에 들렀다. 그는 새벽 3시께 혼자 숙소를 나와 직접 지프를 몰고 작업등이 드문드문 켜진 일대를 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길이 아닌 곳을 따라갔던 그는 갑자기 헤드라이트 앞에 나타난 바위를 피하느라 핸들을 급히 돌려야만 했다. 차는 곧장 절벽 아래로 추락해 깊이 12m의 바다 속으로 빠졌다.
그 이후 과정을 전하는 기록은 놀랍기만 하다. 그는 수압을 이겨내며 지프 문을 급히 연 다음, 물이 차 안을 가득 채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단숨에 수중으로 빠져나왔다. 경비원이 그에게 무슨 변고가 났다는 생각에 겁에 질려 벼랑으로 달려오자, 온통 젖은 그가 수면 위로 떠오르며 말했다. “이봐, 빨리 밧줄 던져.” 밧줄을 잡고 물 밖으로 빠져나온 그가 한 말은 이렇게 전해진다. “거참, 시원하군.”
정창화 감독은 1960년대 무협영화를 주로 만들던 원로 영화인이다. 그가 자신의 연출부 스태프로 일했던 임권택 감독과 함께 몇 해 전 부산국제영화제의 자기 작품 회고전에 나와 들려준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오래 여운을 남겼다.
“그 무렵에는 우리 영화계가 너무 영세했어요. 모든 걸 감독의 임기응변에 맡기던 시대였지요. 지금은 무술감독과 스턴트맨도 쓰지만 그때는 아무도 없었어요. 특수효과 장치나 컴퓨터그래픽은 상상도 못했고요. 총격 장면에서는 실제 총을 썼는데, 어느 날 맞은편에서 탕 소리가 나더니 제가 쓰러져서 정신을 잃었어요. 탄환이 날아와 왼쪽 가슴에 맞은 거지요. 저는 무슨 이런 일이 있나 하고 생각했는데, 잠바 안주머니에 꽂아둔 대본에 총알이 박혀 있더군요. 그러고 나니 알 것 같았어요. 인생은 태어날 때 받은 선물이고, 우리는 그걸 잠시 빌려 쓰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요.”
그는 그 후 오래지 않아 더 넓은 물인 홍콩 영화계로 건너갔고, 자기 영화 인생의 전성기를 맞았다.
창무극 분야의 원로 예인인 공옥진 선생이 전란 도중 겪은 위기는 좌와 우, 남과 북으로 갈린 우리네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전설적인 경관이다. 그는 한창 시절 현장 공연이나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전쟁이 나자 정읍에서 경찰 일을 하던 남편은 먼저 피난 가고, 제 곁에는 태어난 지 사흘 된 딸아이만 남았습니다. 아이를 업고 퉁퉁 부은 얼굴로 뒤따라 천태산으로 피난 가는데, 산후조리를 못해 손발이 저리고 쑤셔왔지요. 그런데 누군가 ‘저기 경찰 부인 간다’고 밀고해 저는 곧장 처형대로 끌려갔어요.
붉은 완장을 찬 사람이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기에 소리나 한가락 하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저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불렀는데, 순간 주위가 숨죽은 듯 조용하더군요. 그동안 제 아기는 낯 모르는 아주머니 품에 안겨 고아가 될 운명도 모른 채 자고 있었지요. 소리 한가락 더 하라고 해서 ‘심청전’도 불렀습니다. 완장 찬 사람은 그걸 다 듣고 인민군에게 총을 거두라고 하더니, 재주가 아깝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고단할 때 노래나 한두 곡 불러달라’고 하더군요.
제가 파묻힐 뻔했던 흙구덩이 앞에서 아기를 다시 품에 안고 나니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저는 저를 구원할 것은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죽기 직전 그렇게도 원했던 것이 결국 인생도 살려낼 거라고요.”
세월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해방공간에 1분 앞도 알지 못한 채 살았던 정치인 여운형이 있다. 그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테러에 시달린 정치인이었다. 기록된 것만 따져도 그렇다. 그는 광복 직후부터 1947년 7월까지 모두 열두 차례의 테러에 시달렸다. 그가 분명한 좌익도 우익도 아닌 자리에서 좌우 합작을 꾀했기 때문이다. 이승만도 박헌영도 그를 미워했다. 일제 잔재가 여전했던 당시 경찰은 그의 암살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혐의가 있다. 처음 곤봉으로 시작된 테러는 권총 폭탄으로 이어졌다. 범위도 그의 자택과 식구들로 넓어졌다. 그의 방 전체가 날아간 적도 있었다.
가장 심각한 테러는 1946년 7월에 벌어졌다. 그 무렵 그는 밤마다 숙소를 바꾸고 있었지만 그의 동향을 훤히 파악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는 서울 신당동에 있는 미군 중위 집에서 저녁에 비밀회담을 마치고 나오다 권총을 소지한 청년들에게 납치됐다. 괴한들은 그에게 민족에게 죄를 지었다는 내용의 유서를 쓰게 한 뒤 학교 뒷산에서 그의 목을 졸랐다. 그는 눈이 가려지고 두 다리가 결박된 상태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 태껸을 배웠던 그는 눈가리개를 가까스로 내린 뒤 절벽에 가까운 비탈길로 몸을 던졌다. 그는 낙법으로 살아난 것이다.
그는 테러로 인한 두통과 상처를 안고 살았지만, 그걸 하소연한 적은 없었다. 초기에 그의 생각은 이랬다. “설마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 했겠냐. 내 뜻을 꺾으려고 위협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날이 갈수록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음이 분명해지자 비장하게 결의했다. 그는 식구들에게 말하곤 했다.
“혁명가는 이부자리에서 죽지 않는다. 나는 거리에서 쓰러질 것이다. 그래도 너희들은 울지 말고, 싸워라.”
암살기도만 서른한 차례 불사신 드골 대통령
그는 결국 1947년 7월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숨을 거뒀다. 당시 그는 경호원들과 7인승 리무진에 타고 있었는데, 괴한들이 차량 뒤편 유리창 쪽으로 저격했다. 그가 차 안에서 쓰러지면서 남긴 마지막 말에는 ‘하나가 된 조국’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조선이다….”
나라 바깥으로 눈을 돌려보면, 현대를 살았던 위인들 가운데 프랑스의 샤를 드골만큼 죽음의 위기를 자주 겪은 이가 있을까 싶다. 그는 기록에 남은 암살기도만 서른한 차례를 넘겼다. 우파의 지지를 받아온 그는 알제리를 프랑스 식민통치에서 독립시킨 다음부터는 되레 우파 무장조직의 타깃이 됐다.
그는 1961년 아내 이본과 함께 대통령 전용차량을 타고 고향으로 가고 있었는데, 길가에 매설해둔 플라스틱 대형 폭탄이 폭발했다. 길 전체가 화염에 휩싸여 운전기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었는데, 드골은 냉담한 표정이었다. “그냥 달려.” 그 명령에 대통령 전용차인 시트로엥은 불길을 정면돌파했다.
이듬해 8월 역시 같은 우파 무장조직이 수류탄에 기관총까지 동원해 도로를 달리던 대통령 차량을 공격했다. 그러나 여전히 대통령의 지시는 단순했다. “계속 달려.” 그의 차량 앞 타이어와 뒤 유리가 난사당했는데, 드골의 상처는 유리 파편이 꽂힌 양복을 털다가 손가락에 생긴 것뿐이었다.
결국 이 암살 미수사건 주모자 3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드골은 두 사람을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유일하게 처형대에 올랐던 이는 한 해 전 드골이 직접 국가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 기사 십자훈장을 수여한 한 공군 중령이었다.
작가로서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진정 관심을 가졌던 것은 죽음의 문제였다. 그는 투우든 수렵이든, 살인이든 전쟁이든 폭력의 갖가지 양상을 글로 썼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다뤄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기 작품세계에 조응이라도 하듯 거칠고 모험에 찬 삶을 살았다. 세 차례에 걸친 참전 경험도 그렇지만, 위험한 아프리카 수렵 여행은 그의 개성의 단면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1954년 1월 그는 아내 메리와 함께 우간다의 장엄한 머치슨 폭포를 경비행기를 타고 선회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나타난 따오기 떼의 군무를 피하려다 밀림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는 사망했다는 소식까지 전해질 정도였는데, 사실 아내는 갈비뼈를, 자신은 어깻죽지를 다쳤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다음 날의 일이었다. 부부를 병원으로 후송할 비행기가 이륙했는데, 꼭 1분 후 연료탱크가 폭발해 비행기 전체가 화염에 휩싸인 채 다시 밀림으로 추락했다. 헤밍웨이는 찌그러져 더는 개폐되지 않는 문을 머리로 들이받아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 그는 두뇌와 간, 비장과 신장이 크게 상했다.
헤밍웨이, 연이은 비행기 추락사고도 추억으로 여겨
당시를 기록한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들 부부는 이후 자동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기로 하고 숲에서 진을 마시며 캠프파이어까지 하면서 밤을 보냈다. 그동안 헤밍웨이는 찢어진 셔츠 차림에 피로하고 가끔 고통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자신이 이틀 동안 겪은 일에 대해서는 “경이로운 일이었지요(I feel wonderful)”라고 말했다.
이 말이 당시 이미 세계적 지명도를 가지고 있던 그를 취재하러 온 기자에게 작가로서 격(格)을 지키기 위해 남긴 ‘공식적인 감회’였는지, 무의식중에 노출된 ‘날것 그대로의 심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쪽이라도 이틀 연속 비행기 추락을 겪은 이에게서 나온 평범한 육성을 넘어서는 것만은 분명하다.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한 또 다른 위인으로는 윈스턴 처칠이 있다. 역시 모험적인 삶을 동경했던 처칠은 서른여덟 살 때인 1912년 처음 비행기를 탔다. 당시는 영국 전체를 통틀어도 비행기 조종사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는 조종법까지 익혔으며, 경비행기를 타고 공중제비를 돌기도 했다.
1919년 여름에는 런던 근처 크로이돈 비행장에서 이륙한 뒤 양력을 제대로 받지 못해 높다란 나무 우듬지를 들이박고는 추락했다. 그는 ‘이제 죽는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상반신을 가로지른 벨트가 벗겨지면서 처칠은 비행기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결국 그는 이 사건 이후 직접 조종간을 잡는 일을 접고 말았다.
시상 이유에 대한 시비가 없지 않지만 그는 나중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회상록 등에서 보여주는 수사법에는 비범한 데가 있었다. 그가 늘 하는 말도 함축적이고 유머러스했다. 그는 1922년 총선에서 1만 표라는 큰 차이로 지역구 의원 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때 그가 한 말 역시 그랬다. “나는 비행기에서 추락하고, 선거에서도 떨어졌다.”
로널드 레이건은 피격을 겪은 가장 최근의 미국 대통령이다. 그는 취임한 지 10주째 되던 1981년 3월30일 워싱턴 힐튼호텔에서 노동자 대표들에게 연설하고 나오다 총격을 당했다. 이 사건은 암살자의 동기가 전례 없는 것이었다. “사모하던 영화배우 조디 포스터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방탄차 문에 튄 탄환 파편을 맞았는데, 그것은 그의 왼쪽 겨드랑이를 몇 cm 관통하고 갈비뼈에 튄 다음 폐를 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의 심장 바로 옆에서 진행을 멈췄다. 그는 총격 직후 경호팀장 제리 파가 몸으로 덮치는 바람에 방탄차 뒷좌석 쪽으로 넘어지면서 현장을 떠났는데, 한참 동안이나 자신의 피격 사실을 몰랐다. 다만 “제리가 너무 심하게 쓰러뜨려 갈비뼈 쪽이 아프다”고만 말했다.
그는 피격이 확인돼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눈물을 글썽이는 부인 낸시에게 “여보, 내가 몸을 숙이는 걸 잊었어” 하고 사과했다. 그리고 대통령비서실 사람들이 연이어 도착하자 “이봐, 이러면 가게는 누가 보는 거야?”라고 농담했다. 그리고 수술실에 들어가 무영등 아래 누운 채로 집도의들에게 말했다. “모두들 공화당원이겠지요?” 벤저민 에런으로 알려진 흉부외과 전문의는 “그렇습니다, 대통령님” 하고 말하고는 “최소한 오늘만은 우리 모두 공화당원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그 직후 마취가 진행됐다. 에런은 민주당원이었다.
그는 함께 피격됐던 대변인 짐 브래디와 경호원 티모시 매카시를 언급하며 “짐과 팀을 위해 기도하겠네”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총을 쏜 그 소년을 위해서도 기도하겠네”라고 덧붙였다.
피격 후 수술실 들어가던 레이건 “모두들 공화당원이지?”
비장한 용기라기보다는 낙관적이고 우아한 기품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이 같은 그의 모습은 조지 워싱턴 대학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측근들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이 일이 있은 뒤부터 레이건은 재임 기간 내내 백악관 사람들에게 맹렬한 충성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피격사건과 거기 대응한 그의 자세에는 분명히 감화력과 전화위복의 힘이 있었다. 어쩌면 칠순의 그는 앞으로 대통령으로서 행할 숱한 연설문보다, 그 극명한 위기 때 환자로서 자신이 드러내는 내면이 더 큰 웅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일 분 후의 삶’에서 처음 인용한 금언이 있다. 그것은 제자인 황제 네로에게 죽임을 당한 로마 철학자 루시어스 세네카의 말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는 데 평생이 걸린다”는 문장이다. ‘살아 있음’과 ‘죽어감’은 일생을 통틀어 뒤섞여 있는 인간의 모순이다. 하지만 이 모순에 초연해질수록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는 게 아닐까. 평생 동안 ‘죽음’이란 테마를 붙들고 있던 헤밍웨이는 노년의 걸작 ‘노인과 바다’에서 마침내 생사가 동아줄처럼 온전하게 갈마든 한 장면을 써낸다. 노인이 거대한 돛새치를 죽이기 위해 투쟁하다가 내뱉는 독백이 그것이다.
“이제는 도리어 네가 날 죽이고 있구나. 하지만 너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어. 너처럼 장대하고 아름답고 고결한 존재를 나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자, 내 형제야, 어서 와서 나를 죽이렴. 누가 죽고, 누가 죽이든 나는 이제 상관없단다.”
새벽 3시에 바다에 빠진 故 정주영 회장 “거참, 시원하군”
우선 떠오르는 것이 작고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대한 것이다. 그는 1973년 11월 울산에 건설 중이던 현대중공업 공사 현장에 들렀다. 그는 새벽 3시께 혼자 숙소를 나와 직접 지프를 몰고 작업등이 드문드문 켜진 일대를 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길이 아닌 곳을 따라갔던 그는 갑자기 헤드라이트 앞에 나타난 바위를 피하느라 핸들을 급히 돌려야만 했다. 차는 곧장 절벽 아래로 추락해 깊이 12m의 바다 속으로 빠졌다.
그 이후 과정을 전하는 기록은 놀랍기만 하다. 그는 수압을 이겨내며 지프 문을 급히 연 다음, 물이 차 안을 가득 채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단숨에 수중으로 빠져나왔다. 경비원이 그에게 무슨 변고가 났다는 생각에 겁에 질려 벼랑으로 달려오자, 온통 젖은 그가 수면 위로 떠오르며 말했다. “이봐, 빨리 밧줄 던져.” 밧줄을 잡고 물 밖으로 빠져나온 그가 한 말은 이렇게 전해진다. “거참, 시원하군.”
정창화 감독은 1960년대 무협영화를 주로 만들던 원로 영화인이다. 그가 자신의 연출부 스태프로 일했던 임권택 감독과 함께 몇 해 전 부산국제영화제의 자기 작품 회고전에 나와 들려준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오래 여운을 남겼다.
“그 무렵에는 우리 영화계가 너무 영세했어요. 모든 걸 감독의 임기응변에 맡기던 시대였지요. 지금은 무술감독과 스턴트맨도 쓰지만 그때는 아무도 없었어요. 특수효과 장치나 컴퓨터그래픽은 상상도 못했고요. 총격 장면에서는 실제 총을 썼는데, 어느 날 맞은편에서 탕 소리가 나더니 제가 쓰러져서 정신을 잃었어요. 탄환이 날아와 왼쪽 가슴에 맞은 거지요. 저는 무슨 이런 일이 있나 하고 생각했는데, 잠바 안주머니에 꽂아둔 대본에 총알이 박혀 있더군요. 그러고 나니 알 것 같았어요. 인생은 태어날 때 받은 선물이고, 우리는 그걸 잠시 빌려 쓰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요.”
그는 그 후 오래지 않아 더 넓은 물인 홍콩 영화계로 건너갔고, 자기 영화 인생의 전성기를 맞았다.
창무극 분야의 원로 예인인 공옥진 선생이 전란 도중 겪은 위기는 좌와 우, 남과 북으로 갈린 우리네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전설적인 경관이다. 그는 한창 시절 현장 공연이나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전쟁이 나자 정읍에서 경찰 일을 하던 남편은 먼저 피난 가고, 제 곁에는 태어난 지 사흘 된 딸아이만 남았습니다. 아이를 업고 퉁퉁 부은 얼굴로 뒤따라 천태산으로 피난 가는데, 산후조리를 못해 손발이 저리고 쑤셔왔지요. 그런데 누군가 ‘저기 경찰 부인 간다’고 밀고해 저는 곧장 처형대로 끌려갔어요.
붉은 완장을 찬 사람이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기에 소리나 한가락 하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저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불렀는데, 순간 주위가 숨죽은 듯 조용하더군요. 그동안 제 아기는 낯 모르는 아주머니 품에 안겨 고아가 될 운명도 모른 채 자고 있었지요. 소리 한가락 더 하라고 해서 ‘심청전’도 불렀습니다. 완장 찬 사람은 그걸 다 듣고 인민군에게 총을 거두라고 하더니, 재주가 아깝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고단할 때 노래나 한두 곡 불러달라’고 하더군요.
제가 파묻힐 뻔했던 흙구덩이 앞에서 아기를 다시 품에 안고 나니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저는 저를 구원할 것은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죽기 직전 그렇게도 원했던 것이 결국 인생도 살려낼 거라고요.”
지프를 탄 채 바다에 빠졌다가 살아난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왼쪽), 6·25전쟁 때 총살 위기에서 판소리를 불러 살아난 무용가 공옥진 씨.
가장 심각한 테러는 1946년 7월에 벌어졌다. 그 무렵 그는 밤마다 숙소를 바꾸고 있었지만 그의 동향을 훤히 파악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는 서울 신당동에 있는 미군 중위 집에서 저녁에 비밀회담을 마치고 나오다 권총을 소지한 청년들에게 납치됐다. 괴한들은 그에게 민족에게 죄를 지었다는 내용의 유서를 쓰게 한 뒤 학교 뒷산에서 그의 목을 졸랐다. 그는 눈이 가려지고 두 다리가 결박된 상태였다. 하지만 어린 시절 태껸을 배웠던 그는 눈가리개를 가까스로 내린 뒤 절벽에 가까운 비탈길로 몸을 던졌다. 그는 낙법으로 살아난 것이다.
그는 테러로 인한 두통과 상처를 안고 살았지만, 그걸 하소연한 적은 없었다. 초기에 그의 생각은 이랬다. “설마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 했겠냐. 내 뜻을 꺾으려고 위협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날이 갈수록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음이 분명해지자 비장하게 결의했다. 그는 식구들에게 말하곤 했다.
“혁명가는 이부자리에서 죽지 않는다. 나는 거리에서 쓰러질 것이다. 그래도 너희들은 울지 말고, 싸워라.”
암살기도만 서른한 차례 불사신 드골 대통령
그는 결국 1947년 7월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숨을 거뒀다. 당시 그는 경호원들과 7인승 리무진에 타고 있었는데, 괴한들이 차량 뒤편 유리창 쪽으로 저격했다. 그가 차 안에서 쓰러지면서 남긴 마지막 말에는 ‘하나가 된 조국’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조선이다….”
나라 바깥으로 눈을 돌려보면, 현대를 살았던 위인들 가운데 프랑스의 샤를 드골만큼 죽음의 위기를 자주 겪은 이가 있을까 싶다. 그는 기록에 남은 암살기도만 서른한 차례를 넘겼다. 우파의 지지를 받아온 그는 알제리를 프랑스 식민통치에서 독립시킨 다음부터는 되레 우파 무장조직의 타깃이 됐다.
그는 1961년 아내 이본과 함께 대통령 전용차량을 타고 고향으로 가고 있었는데, 길가에 매설해둔 플라스틱 대형 폭탄이 폭발했다. 길 전체가 화염에 휩싸여 운전기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었는데, 드골은 냉담한 표정이었다. “그냥 달려.” 그 명령에 대통령 전용차인 시트로엥은 불길을 정면돌파했다.
이듬해 8월 역시 같은 우파 무장조직이 수류탄에 기관총까지 동원해 도로를 달리던 대통령 차량을 공격했다. 그러나 여전히 대통령의 지시는 단순했다. “계속 달려.” 그의 차량 앞 타이어와 뒤 유리가 난사당했는데, 드골의 상처는 유리 파편이 꽂힌 양복을 털다가 손가락에 생긴 것뿐이었다.
결국 이 암살 미수사건 주모자 3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드골은 두 사람을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유일하게 처형대에 올랐던 이는 한 해 전 드골이 직접 국가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 기사 십자훈장을 수여한 한 공군 중령이었다.
작가로서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진정 관심을 가졌던 것은 죽음의 문제였다. 그는 투우든 수렵이든, 살인이든 전쟁이든 폭력의 갖가지 양상을 글로 썼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다뤄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기 작품세계에 조응이라도 하듯 거칠고 모험에 찬 삶을 살았다. 세 차례에 걸친 참전 경험도 그렇지만, 위험한 아프리카 수렵 여행은 그의 개성의 단면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1954년 1월 그는 아내 메리와 함께 우간다의 장엄한 머치슨 폭포를 경비행기를 타고 선회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나타난 따오기 떼의 군무를 피하려다 밀림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는 사망했다는 소식까지 전해질 정도였는데, 사실 아내는 갈비뼈를, 자신은 어깻죽지를 다쳤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다음 날의 일이었다. 부부를 병원으로 후송할 비행기가 이륙했는데, 꼭 1분 후 연료탱크가 폭발해 비행기 전체가 화염에 휩싸인 채 다시 밀림으로 추락했다. 헤밍웨이는 찌그러져 더는 개폐되지 않는 문을 머리로 들이받아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 그는 두뇌와 간, 비장과 신장이 크게 상했다.
헤밍웨이, 연이은 비행기 추락사고도 추억으로 여겨
비행기 추락사고를 겪은 처칠 전 영국 총리(왼쪽)와 피격을 당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위기 앞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이 말이 당시 이미 세계적 지명도를 가지고 있던 그를 취재하러 온 기자에게 작가로서 격(格)을 지키기 위해 남긴 ‘공식적인 감회’였는지, 무의식중에 노출된 ‘날것 그대로의 심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쪽이라도 이틀 연속 비행기 추락을 겪은 이에게서 나온 평범한 육성을 넘어서는 것만은 분명하다.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한 또 다른 위인으로는 윈스턴 처칠이 있다. 역시 모험적인 삶을 동경했던 처칠은 서른여덟 살 때인 1912년 처음 비행기를 탔다. 당시는 영국 전체를 통틀어도 비행기 조종사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는 조종법까지 익혔으며, 경비행기를 타고 공중제비를 돌기도 했다.
1919년 여름에는 런던 근처 크로이돈 비행장에서 이륙한 뒤 양력을 제대로 받지 못해 높다란 나무 우듬지를 들이박고는 추락했다. 그는 ‘이제 죽는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상반신을 가로지른 벨트가 벗겨지면서 처칠은 비행기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결국 그는 이 사건 이후 직접 조종간을 잡는 일을 접고 말았다.
시상 이유에 대한 시비가 없지 않지만 그는 나중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회상록 등에서 보여주는 수사법에는 비범한 데가 있었다. 그가 늘 하는 말도 함축적이고 유머러스했다. 그는 1922년 총선에서 1만 표라는 큰 차이로 지역구 의원 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때 그가 한 말 역시 그랬다. “나는 비행기에서 추락하고, 선거에서도 떨어졌다.”
로널드 레이건은 피격을 겪은 가장 최근의 미국 대통령이다. 그는 취임한 지 10주째 되던 1981년 3월30일 워싱턴 힐튼호텔에서 노동자 대표들에게 연설하고 나오다 총격을 당했다. 이 사건은 암살자의 동기가 전례 없는 것이었다. “사모하던 영화배우 조디 포스터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방탄차 문에 튄 탄환 파편을 맞았는데, 그것은 그의 왼쪽 겨드랑이를 몇 cm 관통하고 갈비뼈에 튄 다음 폐를 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의 심장 바로 옆에서 진행을 멈췄다. 그는 총격 직후 경호팀장 제리 파가 몸으로 덮치는 바람에 방탄차 뒷좌석 쪽으로 넘어지면서 현장을 떠났는데, 한참 동안이나 자신의 피격 사실을 몰랐다. 다만 “제리가 너무 심하게 쓰러뜨려 갈비뼈 쪽이 아프다”고만 말했다.
그는 피격이 확인돼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눈물을 글썽이는 부인 낸시에게 “여보, 내가 몸을 숙이는 걸 잊었어” 하고 사과했다. 그리고 대통령비서실 사람들이 연이어 도착하자 “이봐, 이러면 가게는 누가 보는 거야?”라고 농담했다. 그리고 수술실에 들어가 무영등 아래 누운 채로 집도의들에게 말했다. “모두들 공화당원이겠지요?” 벤저민 에런으로 알려진 흉부외과 전문의는 “그렇습니다, 대통령님” 하고 말하고는 “최소한 오늘만은 우리 모두 공화당원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그 직후 마취가 진행됐다. 에런은 민주당원이었다.
그는 함께 피격됐던 대변인 짐 브래디와 경호원 티모시 매카시를 언급하며 “짐과 팀을 위해 기도하겠네”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총을 쏜 그 소년을 위해서도 기도하겠네”라고 덧붙였다.
피격 후 수술실 들어가던 레이건 “모두들 공화당원이지?”
비장한 용기라기보다는 낙관적이고 우아한 기품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이 같은 그의 모습은 조지 워싱턴 대학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측근들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이 일이 있은 뒤부터 레이건은 재임 기간 내내 백악관 사람들에게 맹렬한 충성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피격사건과 거기 대응한 그의 자세에는 분명히 감화력과 전화위복의 힘이 있었다. 어쩌면 칠순의 그는 앞으로 대통령으로서 행할 숱한 연설문보다, 그 극명한 위기 때 환자로서 자신이 드러내는 내면이 더 큰 웅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일 분 후의 삶’에서 처음 인용한 금언이 있다. 그것은 제자인 황제 네로에게 죽임을 당한 로마 철학자 루시어스 세네카의 말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는 데 평생이 걸린다”는 문장이다. ‘살아 있음’과 ‘죽어감’은 일생을 통틀어 뒤섞여 있는 인간의 모순이다. 하지만 이 모순에 초연해질수록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는 게 아닐까. 평생 동안 ‘죽음’이란 테마를 붙들고 있던 헤밍웨이는 노년의 걸작 ‘노인과 바다’에서 마침내 생사가 동아줄처럼 온전하게 갈마든 한 장면을 써낸다. 노인이 거대한 돛새치를 죽이기 위해 투쟁하다가 내뱉는 독백이 그것이다.
“이제는 도리어 네가 날 죽이고 있구나. 하지만 너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어. 너처럼 장대하고 아름답고 고결한 존재를 나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자, 내 형제야, 어서 와서 나를 죽이렴. 누가 죽고, 누가 죽이든 나는 이제 상관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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