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과 함께 블록버스터 전시 시즌이 시작됐다. 2000년 가을 관람객들이 서울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길게 줄을 섰던 ‘오르세 미술관’전 이후, 해외 유명 미술관 소장품이나 거장의 작품을 대형 공간에 유치하는 블록버스터전이 방학 때의 연례행사로 자리잡았다.
블록버스터전은 큰 비용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그러나 작품 임대료와 보험료가 비싼 만큼 주최측이 수익을 내기 위해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기획하고 운영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연출은 조악하며, 무차별적으로 단체관람객을 받아들여 전시장이 장터처럼 북적대는 사태가 올해도 벌어지고 있다. 한 블록버스터전에 학생들을 인솔하고 온 교사는 “1인당 5000원씩 걷어 전시를 보러 왔는데, 사람이 너무 많고 전시를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어 학생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간혹 임대작의 수준과 작품의 진위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는 것도 블록버스터전의 티켓 구입을 망설이게 하는 이유다.
그러나 미술 작품을 보기 위해 해외여행을 가기 어려운 대부분의 학생과 부모에게 블록버스터전은 확실히 좋은 기회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엔 작품 진위 논란은 사라진 듯하고, 전시 기획 수준도 많이 높아졌다. 일부 대형 기획전은 주최측의 ‘정성’이 보여 미술전문가들도 추천하고 있다.
블록버스터전에는 작품명과 작가 이름만 덩그러니 붙어 있을 뿐 작품 설명은 물론, 전시 섹션에 대한 설명이나 시대적 배경 등에 대한 설명글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일정 시간마다 전시도우미(도슨트)의 설명이 있긴 하지만, 단체관람 시 이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따라서 반드시 관람 전에 도록을 구입하거나 무료 리플릿을 꼼꼼히 읽어본 뒤 전시를 보는 게 좋다. 전체 전시 주제와 섹션의 관계, 섹션에서 작품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면 더 효과적이다.
전시를 보기 전에 아트숍에 들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대부분 아트숍에서는 2만~3만원짜리 대형 도록과 5000~7000원짜리 소형 도록 등을 판매한다. 아트숍에서 파는 포스터, 기념품 등을 보면 해당 전시의 ‘마케팅 포인트’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 미술전문지 ‘월간미술’의 류동현 기자는 “부실한 블록버스터전에도 주요작 3~4개는 포함되게 마련이므로 모든 작품을 보기보다 이런 작품을 오랫동안 감상하는 편이 낫고, 왠지 마음이 끌리는 작품이 있다면 그 이유를 생각하는 것이 좋은 감상법”이라고 말한다.
블록버스터 전시장에서 수첩과 펜을 들고 작품을 본 느낌을 꼼꼼히 기록해보자. 미술사의 주요 사상과 미학적 쟁점에 자신도 모르게 다가서 있음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후안 미로 | 전시 기간 및 장소 : 1월25일까지, 경기도미술관/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 관람료 : 성인 700원, 청소년 300원, 어린이 무료/ 전시 설명 : 오후 3시(주말은 11시, 오후 3시) / 무료 리플릿 있음/ 문의 031-481-7000 | |
‘Woman, bird, star’
경기도 안산시에 자리 잡은 경기도미술관에서 후안 미로의 대규모 전시가 열리고 있다. 초현실주의 거장의 대형전이지만, 경기도미술관 개관기념전을 겸하고 있어 일반 블록버스터전과 다르고 입장료도 저렴하다. 유럽여행 중 미로미술관을 찾았을 때보다 더 알차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좋은 작품이 많이 왔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후안미로재단과 협업해 제대로 된 전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출품작은 네 가지 섹션으로 구분되는데 3, 13, 9 같은 숫자의 상징성을 모티프로 한 작품과 사다리, 달, 해, 새 등의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상징들을 풀어낸 작품을 잘 정리해 보여준다.
르네 마그리트 | 전시 기간 및 장소 : 4월1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관람시간 : 오전 10시~오후 9시(주말 6시)/ 관람료 : 성인 1만원, 청소년 8000원, 어린이 6000원/ 전시 설명 : 11시, 오후 1시, 4시, 5시/ 무료 리플릿과 유료 도록 2종/ 문의 02-332-8182 | |
‘회귀’
세계적인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의 대규모 회고전이 서울시립미술관과 벨기에 왕립미술관 공동 주최로 열린다. 저작권료만 1억원을 내고 신세계백화점 본관 공사장 외벽에 설치한 프린트 그림으로 익숙한 ‘골콘다’ 등 르네 마그리트의 오리지널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다. 꿈과 무의식세계 속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을 해방시키려 한 다른 초현실주의자들과 달리, 마그리트는 일상의 구체적인 사물과 공간을 자신의 독특한-엉뚱한-시선으로 재조합해 낯선 상황을 만들어낸다. 사물을 원래 있던 환경에서 떼어내 전혀 다른 장소에 가져가는 ‘고립’, 독수리를 돌의 재질로 바꾸는 등 사물의 특성 가운데 하나를 바꾸는 ‘변경’, 성과 나무 밑동을 결합하는 식의 ‘사물의 잡종화’, 작은 사물을 엄청난 크기로 확대하는 식의 ‘크기의 변화’, 낮과 밤처럼 만날 수 없는 두 대상을 병치하는 ‘이상한 만남’, 두 사물을 하나의 이미지로 응축하는 ‘이미지의 중첩’,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사물이 한 화면에 존재하는 ‘패러독스’ 등 다양한 섹션을 통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회귀’ ‘순례자’ ‘골콘다’ 등은 마그리트의 대표작이므로 절대 놓치지 말 것.
'골콘다'
장 뒤뷔페 | 전시 기간 및 장소 : 1월2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분관 덕수궁미술관/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8시30분/ 관람료 : 성인 1만원, 청소년 7000원, 어린이 5000원/ 전시 설명 : 10시, 오후 3시, 6시30분/ 무료 리플릿과 유료 도록 2종/ 문의 02-2022-0600 | |
‘세사람’
한불 수교 120주년을 기념한 다양한 행사 가운데 하이라이트가 될 만한 ‘장 뒤뷔페’전은 프랑스에서 가장 사랑받는 ‘국민 작가’의 전시. 프랑스 미술 교과서에서 등장 순위 1위인 작가를 국내에 첫 소개하는 것이며, 덕수궁미술관의 전시 역사에서 가장 큰 규모다.
‘기대고 있는 릴리’
1901년에 태어나 ‘본능, 열정, 변덕, 격렬함, 광기’의 예술을 지향한 장 뒤뷔페의 작품은 아이 그림 같은 작품의 가치를 깊이와 역량으로 제대로 보여준다. 특히 ‘모자가봉원’의 유머러스한 표정과 자세, ‘우를르프 정원’의 다양한 선과 색면의 조화, 뒤뷔페의 대표작이면서 그의 다양한 작품 세계를 한눈에 가늠하도록 도와주는 ‘자화상 2’는 전시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원초적 예술’을 주창한 작가가 그린 커다란 눈을 가진 둥근 인물은 크레파스로 그린 아이의 표정 같고, 화면을 탈출한 다양한 선과 면은 기분 좋은 조형으로 또 다른 재미를 보여준다. 시종일관 재미의 끈을 놓지 않는 그의 작업은 광대처럼 작업한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한다. 문학, 음악, 미술을 넘나들었던 거장의 열정, 궁극의 해학과 유쾌함을 느끼기에 손색이 없는 전시다. 이 전시를 보고도 아쉬움이 남는다면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예쁜 화랑 ‘공근혜 갤러리’(02-738-7776)에서 같은 기간에 열리는 장 뒤뷔페 판화전을 찾아볼 것.
반 고흐에서 피카소까지 | 전시 기간 및 장소 : 3월28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관람시간 : 오전 11시~오후 7시/ 관람료 : 성인 1만3000원, 청소년 9000원, 어린이 7000원/ 전시 설명 오후 2시, 4시/ 무료 리플릿과 유료 도록 2종/ 문의 02-587-8500 | |
반 고흐, ‘플라타너스’(좌), 오귀스트 르누아르, ‘로맨라코 양의 초상’
미국의 ‘인상파 미술관’으로 불리는 클리블랜드 미술관의 소장품을 전시하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유럽 인상파/ 후기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 중 94점이 선보인다. 아름다운 여성을 그린 초상화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마네·모네·르누아르·드가 등의 작품을 볼 수 있다. 특히 고흐가 세상을 떠나기 전 생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그린 ‘생레미의 포플라’, 세잔이 만년에 그린 ‘시냇물’, 고갱의 ‘파도 속에서’ 등이 눈길을 끈다. ‘20세기의 전위, 아방가르드’ 섹션에선 추상으로 향한 피카소·브라크·쿠프카의 ‘형태’, 마티스의 강렬한 ‘색채’, 에른스트나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감’ 등 변혁을 지향한 작가들의 작품도 훌륭한 볼거리. 근대 조각의 선구자인 로댕과 피카소·마티스·모딜리아니 등의 작품을 만나봄으로써 인상파에서 20세기 현대미술까지 서양미술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잘긋기 | 전시 기간 및 장소 1월21일까지, 소마미술관/ 관람시간 : 오전 10시~오후 6시/ 관람료 : 성인 3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000원/ 전시 설명 : 11시, 오후 3시/ 무료 리플릿과 유료 도록 1종/ 문의 02-410-1060 | |
박미나, ‘드로잉’ 연작
‘잘긋기’전은 소마드로잉센터의 개관전으로 블록버스터전이라기보다는 한국 현대미술의 한 흐름을 보여주는 대형 기획전이다. 미술의 보조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드로잉의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해 드로잉센터의 방향을 제시하겠다는 의미를 갖는다. 드로잉을 단순한 선(線)적인 표현 수단으로 간주해온 전통적 시각에서 벗어나, 인간의 감성과 신체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감정적·직설적·원초적인 미디어’로 제시한다. 왕성하게 활동하는 40명의 한국 현대 작가들이 참여한 이 전시는 6개의 섹션으로 구성되며,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드로잉의 맥락에 포함시켜 디스플레이했다.
김학량, ‘금산오경’
루브르박물관 | 전시 기간 및 장소 : 3월18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주말 및 공휴일 오후 7시)/ 관람료 : 성인 1만원, 청소년 8000원, 어린이 6000원/ 전시 설명 요일마다 다름/ 무료 리플릿과 유료 도록 2종/ 문의 02-2077-9648 | |
풍경’프랑수아 부셰, ‘목욕하고 나오는 다이아나’(좌),윌리엄 터너, ‘멀리 만이 보이는 강가(우).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박물관 중 하나인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의 소장품 중 16~19세기 회화 70여 점을 전시한다. 주요 작품은 궁정화가 프랑수아 부셰의 ‘목욕하고 나오는 다이아나’, 프랑수아 제라르의 ‘황제복을 입은 나폴레옹 1세’, ‘프시케와 에로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안젤리카를 구하는 로제’, 코로의 ‘티볼리의 빌라 데스테의 정원’, 윌리엄 터너의 ‘멀리 만이 보이는 강가 풍경’ 등이다. 특히 ‘황제복을 입은 나폴레옹 1세’와 ‘프시케와 에로스’는 다른 작품보다 커서 관객의 시선을 끈다.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은 제라르의 그림은 화가의 의지보다 황제의 권력이 과시된 그림이다. ‘프시케와 에로스’는 프시케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진 에로스의 이야기를 그렸지만, 젊은 남녀의 이상화된 벗은 몸을 그린 이 그림은 당시 왕과 귀족들이 미술로부터 구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루브르박물관전은 하루 평균 4000명이 관람하고 있으므로, 가능하면 오후 늦게 방문하는 것이 좋다.
(전시 소개 : 김민경 기자, 김준기 미술평론가, 김은영 독립전시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