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그 대목에서 꼬마가 에이미에게 청혼하잖아요. 그게 뭘 의미하죠?”
“성인들의 특징은 울지 못하는 거죠. 연민에 대해 양가(兩價)적인 것도.”
“남자 주인공의 직업이 유명인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이미지 컨설턴트라는 사실이 어떤 의미를 갖나요?”
“가식이나 위선 아닐까요?”
지난 12월20일 오후 5시, 서울 강동구 암사동의 한국영상응용연구소 상담센터 ‘사이’(http://visualtherapy.co.kr). 수천 개는 됨직한 비디오테이프들이 빼곡히 들어찬 10평 남짓한 세미나실에서 존 터틀타웁 감독의 영화 ‘키드’(원제 Disney’s the Kid)를 막 관람한 5명의 내담자(상담심리학에서의 피상담자)가 이곳의 심영섭(40·영화평론가, 대구사이버대학 상담 및 행동치료학과 교수) 대표와 영화를 본 소감을 나누고 있다. 일종의 집단상담이다.
2000년에 제작된 ‘키드’는 사회적으론 성공가도를 달리지만 괴팍한 성격을 지닌 한 중년 남성(브루스 윌리스 분)이 자신의 유년기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 소년을 만나게 되면서 어린 시절의 꿈을 되찾으며 변화해가는 과정을 그린 가족영화.
선진국선 보편화, 국내에선 생소
단순한 단체관람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내담자들이 영화를 보는 목적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이들은 영화를 보며 각자 느낀 감정과 생각들을 나이와 직업, 개인신상을 서로 모르는 사이인 상대 내담자들에게 털어놓는 과정을 통해 마음 한구석에 잠재한 정신적 상처를 위안받는다. 그래서인지 ‘사이’에서 이들은 철저히 익명. 가슴 한쪽에 단 명찰에 ‘강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개풀 뜯는 소리’ 등 스스로 정한 별칭만 적혀 있을 뿐이다.
2005년 11월 국내 최초의 영상치료 상담센터를 표방하고 문을 연 ‘사이’에서 내담자들에 대한 치유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로 영화다. 국내에서는 다소 생소하지만, 이러한 시네마테라피(cinematherapy·영화치료)는 미국이나 독일, 영국 등지에선 비디오 보급이 보편화된 1990년대부터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미술치료, 음악치료, 연극치료는 귀에 익었다. 그런데 영화치료라….
“엄밀히 말하면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 CF, 애니메이션 등 각종 영상을 내담자의 내적 치유와 자기성장 수단으로 삼는 새로운 예술치료 방법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이’에선 시네마테라피가 아닌 비주얼테라피(visualtherapy·영상치료)라는 표현을 쓰죠.” 심 대표는 “치료라기보다는 상담을 통한 치유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힐링 시네마(Healing Cinema·치유적 영화 보기)에 어울리는 적확한 표현이다”라고 말한다.
시네마테라피, 나아가 비주얼테라피는 심리학과 영화·영상을 접목한 심리치료법이다. 자연 ‘감상’이 중심이다. 영상 보기를 통해 내담자 자신을 돌아보게 함으로써 자신 또는 가족관계에서 파생된 문제들을 재삼 되새기고 대인관계의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다. 상담심리 전문가가 특정 영화나 영상을 엄선하면 여러 명의 내담자가 함께 그것을 본 뒤 의견을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마음을 열게 된다. 자신을 객관화하는 기회가 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개인이 혼자 무의식적으로 영화를 보거나 TV를 시청하는 행위와는 무척 다른 셈이다.
영상치료는 ‘감상치료’에만 머물지 않는다. 내담자들로 하여금 직접 간단한 셀프 다큐멘터리나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함으로써 ‘표현치료’를 도모하기도 한다. 2006년 4월 ‘사이’가 안산노동자센터와 함께 이주노동자 관련 영화 만들기 치료를 실시한 게 대표적 사례다. 이와 같은 ‘비디오 다이어리(video diary)’의 제작과정 역시 내담자 자신과 주위 사람들, 그리고 상황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또 다른 집단상담을 위한 도구 구실을 한다.
한 발짝 물러서서 삶을 관조
영상치료는 결국 정신보건을 위한 것. 그렇다면 왜 영화인가?
“영화야말로 ‘나’의 삶을 비춰볼 수 있는 ‘1000개의 거울’이기 때문이죠. 스크린은 ‘나의 문제’에 대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적당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해줍니다. 또한 다른 어느 매체보다 공감각적이고 에너지의 응집력이 강합니다. 무의식이나 과거 기억으로의 퇴행도 가능하죠.”(심영섭 대표)
이런 까닭에 영상치료에 활용되는 영화의 장르는 대개 다양한 인간관계와 갈등구조가 녹아든 드라마나 코미디다. 등장인물들은 내담자에겐 동지이거나 적 혹은 경쟁자다. 한없는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비주얼테라피를 체험하고 싶은 내담자들은 ‘사이’의 상담심리 전문가(6명)들과 특정한 영화를 본 뒤 개별상담을 받거나, 1년에 두 차례 실시되는 영화 집단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사이’가 문을 연 초기엔 청소년과 여성 내담자가 많았지만, 지금은 남성들도 적지 않다.
이날의 내담자들도 12월19일부터 22일까지 나흘간(오전 11시~오후 7시) 이어지는 집단상담에 참가한 경우다. 광주, 전주 등 지방에서 올라온 열성파도 있다. 모두 비주얼테라피를 처음 접했다고 한다. 영화는 이들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걱정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 신념, 내적인 슬픔, 자존감 등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자신을 30대라고 밝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남성)는 “참가한 지 이틀밖에 안 됐지만, 집단상담을 통해 그동안 내가 어렵거나 마음이 아팠을 때 느낀 기억들을 다른 내담자와 공유함으로써 삶의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여성 내담자 ‘강물’도 “‘사이’를 찾아오는 과정과 이곳에서 영화를 보며 각자의 생각을 교환하는 과정 모두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고 여긴다”며 “소통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점이 무엇보다 마음에 든다”고 했다.
‘사이’는 구의중학교 등 각급 교육기관 관계자들과 삼성전자 등 대기업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영상치료 연수프로그램도 진행해왔다. ‘영화를 활용한 스트레스 관리’ ‘영화를 활용한 리더십 발휘’ 등이 그 예다.
영상물을 보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문제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서 삶을 관조하는 것. 이는 때때로 ‘자가치료’(전문용어로는 ‘자기조력적 치료’)도 가능하게 하지 않는가? 심 대표는 “‘주몽’ 같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강렬한 마음의 정화를 경험하는 것도 낮은 정도의 치유로 볼 수는 있지만, 장기적인 효과는 영상치료보다 약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성인들의 특징은 울지 못하는 거죠. 연민에 대해 양가(兩價)적인 것도.”
“남자 주인공의 직업이 유명인의 이미지를 관리하는 이미지 컨설턴트라는 사실이 어떤 의미를 갖나요?”
“가식이나 위선 아닐까요?”
지난 12월20일 오후 5시, 서울 강동구 암사동의 한국영상응용연구소 상담센터 ‘사이’(http://visualtherapy.co.kr). 수천 개는 됨직한 비디오테이프들이 빼곡히 들어찬 10평 남짓한 세미나실에서 존 터틀타웁 감독의 영화 ‘키드’(원제 Disney’s the Kid)를 막 관람한 5명의 내담자(상담심리학에서의 피상담자)가 이곳의 심영섭(40·영화평론가, 대구사이버대학 상담 및 행동치료학과 교수) 대표와 영화를 본 소감을 나누고 있다. 일종의 집단상담이다.
2000년에 제작된 ‘키드’는 사회적으론 성공가도를 달리지만 괴팍한 성격을 지닌 한 중년 남성(브루스 윌리스 분)이 자신의 유년기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 소년을 만나게 되면서 어린 시절의 꿈을 되찾으며 변화해가는 과정을 그린 가족영화.
선진국선 보편화, 국내에선 생소
단순한 단체관람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내담자들이 영화를 보는 목적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이들은 영화를 보며 각자 느낀 감정과 생각들을 나이와 직업, 개인신상을 서로 모르는 사이인 상대 내담자들에게 털어놓는 과정을 통해 마음 한구석에 잠재한 정신적 상처를 위안받는다. 그래서인지 ‘사이’에서 이들은 철저히 익명. 가슴 한쪽에 단 명찰에 ‘강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개풀 뜯는 소리’ 등 스스로 정한 별칭만 적혀 있을 뿐이다.
2005년 11월 국내 최초의 영상치료 상담센터를 표방하고 문을 연 ‘사이’에서 내담자들에 대한 치유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로 영화다. 국내에서는 다소 생소하지만, 이러한 시네마테라피(cinematherapy·영화치료)는 미국이나 독일, 영국 등지에선 비디오 보급이 보편화된 1990년대부터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영화를 본 후 심영섭 대표(왼쪽에서 두 번째)와 집단상담을 하고 있는 내담자들.
“엄밀히 말하면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 CF, 애니메이션 등 각종 영상을 내담자의 내적 치유와 자기성장 수단으로 삼는 새로운 예술치료 방법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이’에선 시네마테라피가 아닌 비주얼테라피(visualtherapy·영상치료)라는 표현을 쓰죠.” 심 대표는 “치료라기보다는 상담을 통한 치유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힐링 시네마(Healing Cinema·치유적 영화 보기)에 어울리는 적확한 표현이다”라고 말한다.
시네마테라피, 나아가 비주얼테라피는 심리학과 영화·영상을 접목한 심리치료법이다. 자연 ‘감상’이 중심이다. 영상 보기를 통해 내담자 자신을 돌아보게 함으로써 자신 또는 가족관계에서 파생된 문제들을 재삼 되새기고 대인관계의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다. 상담심리 전문가가 특정 영화나 영상을 엄선하면 여러 명의 내담자가 함께 그것을 본 뒤 의견을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마음을 열게 된다. 자신을 객관화하는 기회가 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개인이 혼자 무의식적으로 영화를 보거나 TV를 시청하는 행위와는 무척 다른 셈이다.
영상치료는 ‘감상치료’에만 머물지 않는다. 내담자들로 하여금 직접 간단한 셀프 다큐멘터리나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함으로써 ‘표현치료’를 도모하기도 한다. 2006년 4월 ‘사이’가 안산노동자센터와 함께 이주노동자 관련 영화 만들기 치료를 실시한 게 대표적 사례다. 이와 같은 ‘비디오 다이어리(video diary)’의 제작과정 역시 내담자 자신과 주위 사람들, 그리고 상황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또 다른 집단상담을 위한 도구 구실을 한다.
한 발짝 물러서서 삶을 관조
영상치료는 결국 정신보건을 위한 것. 그렇다면 왜 영화인가?
“영화야말로 ‘나’의 삶을 비춰볼 수 있는 ‘1000개의 거울’이기 때문이죠. 스크린은 ‘나의 문제’에 대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적당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해줍니다. 또한 다른 어느 매체보다 공감각적이고 에너지의 응집력이 강합니다. 무의식이나 과거 기억으로의 퇴행도 가능하죠.”(심영섭 대표)
이런 까닭에 영상치료에 활용되는 영화의 장르는 대개 다양한 인간관계와 갈등구조가 녹아든 드라마나 코미디다. 등장인물들은 내담자에겐 동지이거나 적 혹은 경쟁자다. 한없는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비주얼테라피를 체험하고 싶은 내담자들은 ‘사이’의 상담심리 전문가(6명)들과 특정한 영화를 본 뒤 개별상담을 받거나, 1년에 두 차례 실시되는 영화 집단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사이’가 문을 연 초기엔 청소년과 여성 내담자가 많았지만, 지금은 남성들도 적지 않다.
이날의 내담자들도 12월19일부터 22일까지 나흘간(오전 11시~오후 7시) 이어지는 집단상담에 참가한 경우다. 광주, 전주 등 지방에서 올라온 열성파도 있다. 모두 비주얼테라피를 처음 접했다고 한다. 영화는 이들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걱정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 신념, 내적인 슬픔, 자존감 등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자신을 30대라고 밝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남성)는 “참가한 지 이틀밖에 안 됐지만, 집단상담을 통해 그동안 내가 어렵거나 마음이 아팠을 때 느낀 기억들을 다른 내담자와 공유함으로써 삶의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여성 내담자 ‘강물’도 “‘사이’를 찾아오는 과정과 이곳에서 영화를 보며 각자의 생각을 교환하는 과정 모두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고 여긴다”며 “소통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점이 무엇보다 마음에 든다”고 했다.
‘사이’는 구의중학교 등 각급 교육기관 관계자들과 삼성전자 등 대기업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영상치료 연수프로그램도 진행해왔다. ‘영화를 활용한 스트레스 관리’ ‘영화를 활용한 리더십 발휘’ 등이 그 예다.
영상물을 보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문제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서 삶을 관조하는 것. 이는 때때로 ‘자가치료’(전문용어로는 ‘자기조력적 치료’)도 가능하게 하지 않는가? 심 대표는 “‘주몽’ 같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강렬한 마음의 정화를 경험하는 것도 낮은 정도의 치유로 볼 수는 있지만, 장기적인 효과는 영상치료보다 약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