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 가족 찾기’ 캠페인을 통해 발굴된 한 가족의 모습.
선씨는 지난 11월 다국적 제약사인 한국노바티스가 저출산 고령화 시대를 맞아 실시한 ‘한국 5대(代) 생존 가족 찾기’ 범국민 캠페인에서 선정된 26가족 가운데 홍옥순(92) 할머니 가족의 일원이다. 손자인 선씨의 직계가족은 홍 할머니와 부모님, 아내, 아들 내외, 손자 등 8명. 이 중 선씨 이하 가족들은 모두 서울에 거주한다.
혈연 있어야 가족인가요? … 입양가족도 늘어
5대가 생존한 것도 희귀한 일이지만 선씨 가족이 1년에 60여 차례나 할머니와 부모님이 계신 충남 서
산을 찾는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일주일에 한 번꼴을 웃도는 셈이다.
“힘들죠. 그래도 우린 모이는 게 일과예요. 얼굴을 자주 대하다 보면 연애하는 것처럼 애틋해요. 주위에선 ‘대단하다’고 하지만, 제가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 결국 어디겠어요?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사는 게 아니잖아요.”
날로 파편화되고 있는 가족해체 현상은 선씨에겐 남의 일일 터. 그러나 5대 가족의 사례는 현실과는 지극히 대조적인 ‘이념형’일 뿐이다. 산업화와 직업이동 등에 따라 대가족에서 핵가족, 이젠 그것조차 뛰어넘어 ‘1인 가족’으로까지 분화해버린 가족의 형태 변화는 이미 대한민국 가정의 대세가 됐다.
유교적 전통의 가치가 퇴색하고 가부장적 질서가 무너지면서 3대조차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광경을 찾아보기 힘든 요즘, 가족의 형태는 1인 가족을 비롯해 ‘딩크족’(부부생활을 정상적으로 유지하면서도 의도적으로 자녀를 두지 않는 맞벌이 부부), 한 부모 가족(편부·편모 가족), 재혼가족, 공동체 가족, 동성커플 가족 등으로까지 다층적으로 변모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부부와 자녀들로 이뤄진 형태가 가장 일반적이긴 하다. 하지만 진화는 ‘현재진행형’이다. 이러한 가족 형태의 분화는 가족 개념에 대한 사람들의 사고가 바뀐 데에도 기인하지만, 거꾸로 가족 형태의 변화가 생각의 전환을 유도하기도 한다.
신언항 교수 부부와 입양한 ‘막둥이’인 동영이.
신 교수는 “동영이의 입양은 말로 형언하기 힘든 기쁨이자 우리 부부가 받은 축복”이라고 말한다. 그는 가족이 갖는 의미에 대해 “인간의 기본적 본능인 안정성에 대한 추구는 가족이라는 ‘관계 형성’에 의해 충족될 수 있다”면서도 “전통적 의미의 가족 형태가 해체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안타까운 추세이긴 하지만, 성인들의 경우 안정감에 대한 욕구를 동아리나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대리충족할 수 있는 만큼 가족 형태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사내에서 딩크족으로 통하는 회사원 황모(32) 씨에겐 부부관계가 곧 가족관계다. 5년 전 결혼한 그는 아이를 낳을 생각이 지금으로선 전혀 없다. 훗날 생각이 바뀌면 직접 낳거나 입양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관심이 없다기보다 아이를 싫어합니다. 아내는 필요성을 못 느끼고요. 가문의 대를 잇는 것도 형님이 계시니까 문제가 없죠. 지금 저 말고 제 가족의 구성원은 아내뿐입니다. 그러니 가족은 곧 아내이고, 가족관계가 곧 부부관계인 거죠. 아버지가 계시는, 제가 아들로서 속해 있는 집은 ‘같이 아주 많은 추억을 공유하는, 꽤나 힘겨운 시간을 함께 이겨내며 성장해온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나 할까요?”(황씨)
그런 황씨도 1년에 설과 추석 두 번의 명절과 아버지 생신 때는 ‘추억을 공유한 사람들’을 찾아가려 한
다.
가족 외형보다 질 따지는 시대 도래
2005년 8월, 일본 국립인구문제연구소는 20년 후인 2025년이 되면 1인 가족이 일본의 가족 형태 중 35%를 차지해 가장 일반화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기를 원하는 젊은이들이 점점 늘고 있는 우리나라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흥미로운 것은 가족의 개념이 더 이상 혈연과 혼인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혈연관계가 없더라도 애환을 공유하는 이들을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묶으려는 풍조가 생겨나면서 새로운 대체가족의 형태가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초 한 언론에 1인 가족의 대표 격으로 소개된 동서대(부산) 공연예술학부장 차순례(49·여) 교수는 “가족이란 서로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라고 정의했다. 부모님이 작고한 데다 형제도 없고 결혼도 하지 않아 그에겐 법적인 가족이 없다. 하지만 주부, 기업인, 변호사, 교수 등 적지 않은 지인(知人)들이 그에겐 곧 가족이다.
그렇다면 ‘가족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가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20년간 빈곤·결식 아동 돕기 운동을 펼쳐온 (사)부스러기사랑나눔회(이하 나눔회) 이경림(43) 사무총장에 따르면, 나눔회가 지원하는 6000여 명의 빈곤·결식 아동 중 60% 이상이 한 부모 가정의 아이들이다. 1996년 이후 부쩍 늘어난 이들의 상당수는 한창 인성이 형성될 시기인 6~7세 무렵 30대 중반~40대 초반인 부모의 이혼이나 가출 등으로 방치된 경우다. 특히 편부 가족일 경우 아이가 육아와 가사를 감당하지 못하는 아버지에 의해 농촌의 조부모에게 맡겨지는 이른바 ‘조손(祖孫)가족’이 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이 총장은 “피로 맺어진 가족은 해체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한 부모 가정은 부모의 ‘동거생활’이 해체된 결과일 뿐, 아이들에게 만남이나 전화통화 등을 통해 연결고리만 만들어준다면 부모와의 신뢰관계는 깨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는 “저출산으로 아이들의 존재가 점점 귀해지는 만큼 그들의 양육을 사회 전체가 책임지는 ‘사회적 가정’의 개념 도입이 필요한 때가 됐다”고 말한다.
가족의 개념이 한집에서 함께 살며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을 뜻하는 ‘식구(食口)’와 구분이 모호해지는 현상도 굳어지고 있다. 한국가족상담교육연구소 송말희 선임연구원은 “우리 사회에 갖가지 형태의 가족들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제 가족의 외형보다 질을 따지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시사한다”며 “가족 내 다른 구성원이 이성이든 동성이든 혹은 애완동물이든 ‘나’와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존재라면 사회 기본집단으로서의 가족은 서로 모습은 달리할지언정 영속될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박사는 지난
10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기업은 시속 100마일(160km)로 변한다. 가족 형태도 빠르게 변해서 시속 60마일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는 가족 형태의 변화가 다른 사회 시스템에 비해 결코 그 속도가 느리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전통적 형태의 가족은 붕괴되고 있다. 그럼에도 ‘가족의 재구성’은 대를 이어 계속될 것이다. 그것이 비록 영화 ‘가족의 탄생’에 등장하는 복잡다단한 군상(群像)의 조합으로 이뤄진 유사(類似)가족이거나 대체가족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