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63

..

실감나는 약육강식 맹수세계의 쿠데타

호랑이 ‘십육강’ 에버랜드 사파리 제왕 등극 … 이전 지배자 사자들은 숨죽인 생활

  • 사진= 김형우 기자 free217@donga.com 글=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6-11-30 13:1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진보인가, 보수인가. 감세인가, 증세인가…
    • 사람 간의 다툼은 대체로 가치관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 그런데 가치관을 둘러싼 논쟁은 정치권을 거치면서 아귀다툼으로 바뀌곤 한다.
    • 합종연횡, 이합집산…. 별로 반갑지 않은 정치권 용어가 언론에 다시 오르내린다.
    • ‘DJ’ ‘창(昌)’ 등 뒷전에 밀려난 정치인들도 이따금씩 목소리를 높인다.
    • 바야흐로 2007년 대선 레이스가 시작된 것이다. 사자와 호랑이의 권력투쟁을
    •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맹수들의 권력투쟁은 여전히 힘을 가졌기에 거칠고,
    • 꼭대기에 올라섰기에 매서웠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아귀다툼처럼. <편집자>
    지난 이야기

    실감나는 약육강식 맹수세계의 쿠데타

    수사자와 암호랑이의 ‘러브’가 만들어낸 라피도(오른쪽)와 크리스가 다투고 있다. 수호랑이와 암사자의 혼혈인 타이온은 매우 귀하다.

    비너스는 사파리의 여제(女帝)다. 공동정권의 주인인 아이디-테크노 형제를 비롯해 사파리의 모든 수사자가 비너스를 흠모한다. 비너스는 가장 힘이 센 수컷을 다스림으로써 ‘작은 초원’을 지배한다. 비너스의 마음을 얻는 자가 곧 왕(王)이다.

    비너스는 ‘색공’을 무기로 왕 여럿을 대를 이어 거느려왔다. 그가 세상을 다스리는 법은 영특하면서도 비겁하다. 비너스는 마음에 안 드는 사자나 호랑이가 있으면 살며시 그 앞으로 다가선다. 그러면 비너스에게 매료된 수사자가, 비너스가 눈길을 준 사자나 호랑이를 호되게 혼내준다.

    비너스의 관능에 포박당한 어린 수사자들은 연거푸 쿠데타를 일으켰고, 왕좌에 오른 어린 수사자가 어른이 되면 비너스에게 매료된 또 다른 젊은 수사자가 반역을 일으키면서 ‘맹수 제국’의 왕위는 이어져나갔다. ‘사자 제국’은 과연 영원할 것인가. (‘주간동아’ 508호 ‘맹수의 제왕전쟁, 피도 눈물도 없다’ 제하의 기사 참조)

    실감나는 약육강식 맹수세계의 쿠데타

    착호는 백호(白虎)의 유전인자를 가진 F1이다.

    늦가을, 소슬바람은 차가웠다. 오후는 무료했고 흙은 푸석푸석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한 살배기 암사자 니케가 수염을 곧추세우고 주변을 응시한다. 호랑이 두 마리가 소란스럽게 싸움을 벌였기 때문이다. 아직 암고양이 태가 남아 있는 어린 니케의 눈매가 사나워진다. 호랑이들이 버릇없이 싸움을 벌인다는 투다. 니케를 따라 동갑내기 수사자 세 마리가 떼로 호랑이들에게 달려든다.



    먹이를 놓고 다투던 암호랑이 달래(1)와 들호(4)는 배를 땅에 붙이고 어깨를 곧추세운 뒤 사자들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비너스 제국’의 두 축이던 아이디(6)-테크노(6) 형제의 윽박지름이 떠오른 것일까. 들호가 먼저 발톱을 집어넣고 잽싸게 꽁무니를 뺀다. 세 살 터울의 언니가 도망가는 모습을 본 달래는 구릉 너머로 내달렸으나 그곳도 속수무책이긴 마찬가지였다.

    아직은 데데한 니케는 옛 여제 비너스(7)를 닮았다. 수사자의 사타구니를 핥고 빠는 모양새가 능숙하다. 또래의 수사자들은 니케의 옆자리를 차지하려고 벌써부터 아귀다툼을 벌인다. 니케도 비너스와 같이 사람 눈으론 종잡을 수 없는 뭔가 특별한 매력을 가진 듯하다.

    6년 전 천하(전설의 사자왕)의 품속에서 권력에 눈뜬 비너스처럼, 니케는 자신의 시대를 예비하고 있었다.

    실감나는 약육강식 맹수세계의 쿠데타

    백호(白虎) 홍비가 방금 전 싸움을 벌인 수사자 레오 쪽을 바라보고 있다.

    아이디-테크노 10년 정권 순식간에 붕괴

    에버랜드 와일드사파리는 호랑이와 사자가 동거하는 독특한 공간이다. 날마다 각각 10여 마리의 사자와 호랑이가 방사되는데, 맹수들의 권력다툼과 사랑, 질투는 다듬어지지 않았을 뿐 진화의 어느 갈림길에서 엇갈린 사람의 그것과 얼마간 닮았다. 맹수들의 권력투쟁은 힘을 가졌기에 거칠고, 꼭대기에 올라섰기에 매섭다. 마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아귀다툼처럼.

    실감나는 약육강식 맹수세계의 쿠데타

    사파리의 새 실력자 십육강(왼쪽)이 비너스 수하의 테크노를 흠씬 패고 있다.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이라고 했던가. 사람의 권력이 그러하듯 성한 것은 쇠하게 마련이다. 5년 넘게 사파리를 발 아래에 두었던 비너스의 몰락은 비참했다. 비너스와 함께 10년을 이어온 사자의 시대도 아이디-테크노 공동정권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비너스 앞에서 오금을 펴지 못하던 호랑이들은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때는 지난해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솔바람에 햇살이 가벼워진 오후, 비너스는 여느 날처럼 사자 무리를 이끌고 사파리에서 호랑이 구역으로 향했다. 갈기털을 곧추세운 수사자들은 늘 그래왔듯 호랑이들을 흠씬 패주었다. 몰려온 사자 무리에 혼비백산한 호랑이들은 후미진 곳에서 공포에 떨었고, 비너스는 더욱 광폭하게 호랑이들을 몰아세웠다.

    그러나 한 마리의 호랑이는 달랐다. 한국호랑이(시베리아 호랑이) 십육강(4·수컷). 그는 자세를 낮추고 수염을 뻣뻣하게 세운 뒤 사위를 응시했다. 갈기털을 세우고 날뛰던 공동정권의 한 축 테크노가 십육강의 앞쪽으로 다가섰다. 일대일 맞장. 테크노의 훅을 연거푸 피한 십육강이 테크노의 관자놀이를 정확하게 가격하길 수 차례. 공동정권의 한 축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실감나는 약육강식 맹수세계의 쿠데타

    하이에나는 사자나 호랑이를 건드리지 못한다(좌).낮잠을 즐기는 반달가슴곰(우).

    권력과 성욕 밀착관계 … 호랑이 제왕, 모든 암컷 독차지

    ‘사자와 호랑이 싸움의 승자는?’이라는 오래된 질문의 정답은 ‘둘 중 힘센 놈이 이긴다’다. 그런데 호랑이는 독불장군(獨不將軍)이요, 유아독존(唯我獨存)이다. 부모형제도 타도해야 할 경쟁자일 뿐 우군이 될 수 없다. 반면 사자는 고양잇과 동물로는 특이하게 떼로 싸움을 벌인다. 10년 동안 사자가 일방적으로 호랑이를 압도한 것은 뭉칠 줄 모르는 단독자(單獨者) 호랑이와 사자 집단의 다툼이었기 때문이다.

    야생에서 맹수의 권력욕은 영토와 먹이, 성욕에서 비롯한다. 사파리에선 먹이가 충분하게 주어지는 터라 먹이와 권력욕의 상관관계는 비교적 엷으나, 권력을 가진 수컷이 암컷들과 영토를 갖는 것은 야생과 마찬가지다. 고양잇과 맹수의 암컷들은 볼품없는 수컷에겐 좀처럼 몸을 허락하지 않는다. 특히 야생에서 단독자로 생활하는 호랑이는 ‘센 놈’이 거의 모든 암컷을 독식한다.

    한바탕 싸움을 끝낸 니케가 동갑내기 수컷 세 마리와 수런거리는 사이 백호(白虎) 한 마리(홍비)가 어릴 때 싸우다가 성기를 잃은 수사자 유로(2)에게 싸움을 걸어온다. 착호의 아비는 백호, 어미는 F1(F1은 백호와 일반 호랑이의 사랑이 만들어낸 일종의 하이브리드로 백호는 아니다)인데, 유로는 괴상한 빛을 띤 이 호랑이가 무서웠는지 이내 니케의 무리로 숨어들었다.

    인간으로 치면 고자(鼓子)인 유로의 처세술은 얼마간 사람을 닮았다. 저보다 약한 사자, 호랑이 앞에서는 수사자로 행세하고, 기운이 센 맹수들 앞에서는 암컷처럼 교태를 부린다. 유로가 대(大)자로 누워 속살을 보여주며 어린 수컷들의 관심을 끌자, 질투심이 동했는지 니케가 유로의 등가죽을 물어뜯는다. 자글거리는 흙에 등을 비비면서 아픔을 달래는 유로의 처지가 왠지 서글퍼 보였다.

    1990년생인 라피도와 크리스는 사파리의 괴물이다. 수사자 사룡과 암호랑이 명랑의 새끼인 이들은 반은 호랑이고 반은 사자인 라이거다. 독특한 성적 취향을 가졌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애틋하게 ‘러브’를 했던 두 맹수의 아이들은 자식을 가질 수 없다고 한다(사자와 호랑이의 잡종은 2세를 낳을 수 없다). 두 마리의 라이거 앞에서 등을 땅에 비비며 괴로워하고 있는 유로만큼이나 이들도 처량해 보였다. 금지된 사랑이 낳은 비극이라고나 할까.

    현재 사파리의 권력은 ‘사자 제국’을 무너뜨리고 ‘호랑이 제국’을 세운 십육강이 독점하고 있다. 십육강은 ‘호랑이 자치구’의 우두머리였던 호비(5·수컷)를 무릎 꿇린 뒤, 사자 제국의 두 축이던 테크노-아이디 형제를 차례로 돌려세운 이 초원의 절대강자다. 암호랑이들은 이제 수컷들 중에서 십육강에게만 아랫도리를 허락한다. 십육강은 사자들의 구박으로부터 암컷들을 지켜준 영웅이기도 하다.

    실감나는 약육강식 맹수세계의 쿠데타

    전성기의 비너스를 빼닮은 암사자 니케(맨 오른쪽)가 호랑이 구역을 응시하고 있다.

    사자와 호랑이는 25일 전후로 발정이 온다. 발정은 5~7일 이어지는데, 발정기엔 실력자가 암컷을 데리고 다니면서 하루에 20~60회 짝짓기를 한다. ‘러브’에 걸리는 시간은 10~40초. 짝짓기를 통해 2~3일 동안 자극을 줘야 배란을 하는 까닭에 임신은 발정이 시작된 지 사흘 뒤부터 가능하다. 수태가 가능한 ‘그날’에 하위 수컷이 암컷에게 접근했다가는 실력자에게 ‘제대로’ 두들겨 맞는다.

    사자는 호랑이보다 강자독식이 덜 엄격하다. 왕이 잠을 자거나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 서열이 낮은 수컷도 짝짓기를 할 수 있다. 서열이 최하위인 사자는 호랑이 암컷을 건드리기도 하는데, 라피도와 크리스의 탄생이 그런 사례다. 발정난 암컷 한 마리를 상대로 25일마다 수백 회의 방사를 하는 수컷은 전체 암컷을 1년 넘게 상대하다 보면 아랫도리 힘이 떨어진다. 과다한 섹스가 쿠데타의 빌미가 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재집권 노리는 사자들 호시탐탐

    올 여름 십육강은 틈만 나면 아이디와 테크노를 두들겨 팼다. 물론 그대로 물러설 비너스가 아니었다. 비너스의 승부수는 사자 제국의 왕으로 벌써부터 간택해놓은 젊은 수사자 쿠쿠. 비너스보다 여섯 살 어린 쿠쿠는 다른 수사자나 암사자가 비너스에게 다가오면 송곳니를 드러내고 위협하곤 했다. 아이디-테크노 형제도 쿠쿠의 젊은 혈기가 부담스러웠는지 쿠쿠를 호되게 꾸짖지 못했다.

    비너스의 바람과 달리 쿠쿠와 십육강의 싸움 역시 싱겁게 끝났다. 아이디, 테크노, 쿠쿠가 차례대로 십육강에게 꼬리를 내린 것이다. 왜 이들은 떼로 십육강을 공격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질투심 때문이었다. 아이디, 테크노, 쿠쿠는 공동의 적 십육강에 맞서기보다는 비너스를 차지하고자 자기들끼리 싸워댔다. ‘좀처럼 뭉칠 줄 모르는’ 호랑이들의 행태를 이들이 답습한 셈이다.

    쿠데타로 집권한 위정자들이 그러하듯 쿠쿠의 다스림은 광폭하다. 10월엔 암사자 보우에게 치명상을 입히기도 했다. 십육강의 위세에 눌린 사자들은 넓었던 영토를 잃고 ‘사자 자치구’에서 옹색하게 생활하고 있다. 호랑이들이 시비를 걸어올 때마다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는 옛 여제 비너스가 측은하기도 하다. 털색이 짙어지고, 검버섯이 피어나는 등 비너스는 몸도 예전 같지 않다.

    10년 만에 등장한 ‘호랑이제국’은 영원할 것인가.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옛사람들의 말이 공연한 소리는 아닐 터. 낮잠에서 깨어난 니케가 또래의 수사자들을 거느리고 호랑이들을 매섭게 노려본다. 날카로워진 소슬바람이 니케의 털을 흩날린다. 겨울은 유전자에 추위가 각인돼 있는 호랑이의 계절이다. 니케는 사자가 싸움하기에 좋은 내년 여름을 예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움말 : 황수전 에버랜드 사육사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