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규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
“원칙 앞에 장사 있나. ‘시장논리’로만 싸우려니 힘에 부친다.”
요즘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의 조사를 받고 있는 몇몇 기업 관계자들의 말이다. 이들만 가슴 졸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보통신부(이하 정통부), 산업자원부, 금융감독위원회(이하 금감위), 통신위원회, 방송위원회 등 각 정부 기관들도 바짝 긴장해 있다. 그간 ‘업계 특수성’을 들어 행정지도 혹은 관행의 이름으로 이어져온 각종 규제들에 대해, 공정위가 “경쟁 촉진의 원칙대로 가라”며 시정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것도 매우 공격적이고 공개적인 방식으로.
강 위원장 장수 비결은 개혁 의지와 전문·유연성
‘사상 최강’으로 통하는 현 공정위를 이끌고 있는 이는 강철규(60) 위원장이다. 강 위원장은 2003년 3월 취임 당시부터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 이동걸 금감위 부위원장과 더불어 참여정부의 대표적 경제개혁 인사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2년 7개월이 지난 지금, ‘살아남은’ 이는 강 위원장뿐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변함없는 신뢰가 큰 구실을 했으나 그만으론 부족했을 터. 대통령의 ‘특별한 신뢰’가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하는 것이 요즘세태이기 때문이다. 개혁 의지와 더불어 전문성, 유연성, 논리적 설득력까지 갖춘 것이 장수의 비결이란 중론. 전경련 관계자들조차 강 위원장에 대해선 호의적 평가를 내놓곤 한다.
공정위에서 파견된 이성구 국무총리실 규제개혁기획단 국장은 “정부와 ‘코드’가 잘 맞는 덕분에 정치적으로 좌고우면할 필요가 없다. 소신대로 순수하게 일처리를 해나간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된 듯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취임 초기부터 강 위원장이 “잘한다”는 박수만 받은 것은 아니다. 2004년 ‘시장개혁 로드맵 3개년 계획’을 완성하기까지는 규제를 피하려는 재계와 ‘재벌 개혁’을 요구하는 여론 사이에서 적잖은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그러나 강 위원장은 숱한 강연활동과 토론회 참여 등을 통해 공정위 안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끈질긴 설득으로 재계가 순자산의 25%를 다른 회사에 투자 못하도록 하는 출자총액제한 제도에 동의토록 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으론 직접 규제보다 시장자율 감시 쪽으로 정책 방향을 잡아 일정 정도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 2004년 18개이던 출자총액제한 대상 대기업 집단이 올해 11개로 줄어든 것이 그 한 예다.
하지만 이뿐이었다면 공정위는 지금과 같은 ‘파워’를 갖기 힘들었을 것이다. 재벌규제 기관쯤으로 여겨지던 공정위가 국민들로부터 ‘소비자 편에 선 기관’이란 신뢰를 얻게 된 데에는 공정위 본연의 업무랄 수 있는 독점규제 등의 사안에 대해 어느 때보다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구실을 한 것이 주효했다.
2004년 6월16일, 부산우체국 대회의실에서 열린 공정위 전원회의 순회 심판 광경.
일단 리듬을 타기 시작한 공정위의 행보는 강 위원장의 강력한 지지와 뚝심 있는 대외활동에 힘입어 갈수록 탄력을 받았다. 산업 각 분야의 불공정 행위와 카르텔 적발에 적극적으로 나서 혁혁한 ‘전과’를 쌓아올렸다. 그중 ‘백미’는 올 5월 KT에 사상 최대 규모인 116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것. KT와 하나로텔레콤이 카르텔 형성으로 소비자들에게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는 것이었다.
KT도 KT지만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정통부였다. 그동안 유선·무선을 떠나 통신사업자의 요금 결정은 정통부 관할 사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KT는 “공정위가 문제 삼는 부분은 당시 부도 위기에 몰린 하나로텔레콤을 위해 정통부의 행정지도에 따라 시행한 것”이라며 즉각 소송을 제기했다.
정통부는 물론 통신업계는 이 사건을 “공정위가 드디어 정통부에 전면전을 선포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정통부 모 과장은 “공정위는 이미 가진 것도 많으면서 통신까지 먹으려 하나. 통신산업은 그 특수성으로 인해 특정 사업자가 시장을 지배할 수 없도록 감시하고 각 업체의 균형 발전을 돕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공정위 관계자 또한 “정통부는 사업자 위주로 판단할 뿐 소비자 이익은 등한시하고 있다”고 정면 비판했다.
비슷한 논란은 금융 등 타 분야에서도 재연되고 있다. 공정위가 은행들의 수수료 담합 건에 관심을 보이자 “금감원이 있는데 이중 규제 아니냐”는 지적이 고개를 든 것. 이에 대해서도 공정위 측은 “금감원은 은행 건전성 규제에 치중하면 된다. 우리 목적은 금융거래의 공정경쟁 여부와 금융소비자 보호”라 일축했다.
2003년 6월 한 대기업에서 부당내부거래 조사를 하고 있는 공정위 조사관들.
공정위의 적극적 행보에 대해 각 사업자들은 “이중규제”라 반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존의 규제기관들보다는 ‘말’이 통해 좋다”는 상반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엄하지만 원칙대로 움직이니 분명하지 않느냐”는 것.
이러한 사업자들의 복잡한 의중은 공정위가 2004년 7~12월 피조사 업체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불만 및 제도 개선사항’ 조사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 피조사 업체들은 공정위 직원들의 청렴도는 뛰어나지만(83.7%), 관련업계 실태 파악 능력은 부족하다(59.6%)는 답을 내놓았다.‘업계별 특수성’에 대해 좀더 고려해달라는 주문일 것이다.
요즘 공정위는 재벌 이슈, 카르텔 이슈에 이어 소비자보호 이슈에서도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벌일 계획이다. 재정경제부 산하에 있던 한국소비자보호원을 가져오게 된 것 또한 고무적이다. 한편으로는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기업의 조사 거부 및 방해 행위 대응을 위한 강제조사권 도입을 추진 중이다. 카르텔 과징금 부과 한도도 종전의 ‘관련 매출액 5%’에서 10%로 상향 조정했다. 대신 최초 자진신고자에 대해서는 과징금을 완전 면제하는 ‘당근’도 마련해놓은 상태다.
공정위의 활발한 움직임이 화제가 되면서 요즘 국회에선 “차제에 공정위의 위상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상경 열린우리당 의원이 주도하는 ‘공정경쟁정책포럼’이 진원지다. 이 의원 외에 신학용 오제세 이계안 채수찬(이상 열린우리당), 김정훈 나경원 유승민 이계경(이상 한나라당), 이승희(민주당) 의원 등이 참여하고 있다.
공정경쟁정책포럼은 9월1일 권오승 서울대 교수(법학)를 초청 ‘경쟁법의 이념과 공정거래위원회의 위상 재정립’을 주제로 1차 세미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권 교수는 “독점규제법을 통한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의 촉진’은 공정위의 고유 권한이 맞다. 하지만 ‘과도한 경제력 집중의 억제’(재벌 개혁)나 ‘공정한 거래질서 확립’(소비자 문제)은 공정거래법이 아닌 다른 법안을 통해 관리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폈다. 재벌 문제는 고도의 정치적 성격을 띠는 만큼 공정위의 독립성을 해칠 수 있고, 소비자 문제는 당사자 상호 간 사적 자치의 영역에 속하는 경우가 많아 법원으로 이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상경 의원실은 “ 권 교수의 강의 내용과 포럼이 지향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에서도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내년 3월 임기 만료 … 연임이냐 교체냐
하지만 공정위는 아직 ‘관할 업무를 털어버리는 부분’에 대해선 논의할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듯하다. 강 위원장은 “부당 공동행위 억제, 대기업 집단의 소유 지배구조 개선,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거래 해결 등이 공정위의 중심과제”란 점을 분명히 해왔다. 그러나 국회는 물론 시민단체에서도 공정위 위상 재정립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만큼 장기적으로는 본격적인 논의를 피할 수 없을 듯하다.
2006년 3월이면 강 위원장의 임기는 끝난다. 재계 일각에선 “강 위원장이 청와대 쪽에 연임 의사를 표했으나 ‘위원회 위원장은 단임이 상례’라는 답을 들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신빙성이 적다. 공정위의 한 고위 인사는 “오히려 연임 가능성이 높은 걸로 안다”며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위원장이 엉뚱한 인물로 바뀐다면 지금의 기조를 이어가기 힘들 것”이라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