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태로 7000여 대의 승용차가 불타고 공공건물이 파손됐다. 화재 진압 중인 소방관들.
하룻밤 사이에만 1000대가 넘는 차량이 불타고, 학교와 상가 건물이 잿더미가 돼버린 모습에 세상 사람들은 경악했다. 분쟁이 끊이지 않는 중동 지역이라면 모를까, 이게 정말 멋과 낭만의 나라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이란 말인가.
소요 사태는 두 소년의 죽음에서 비롯됐다. 10월27일 파리 북동쪽 근교의 클리시 수 부아에서 경찰을 피해 달아나던 아프리카계 15세, 17세 소년이 변압기에 감전사했다.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불상사가 생겼을까.
다른 소년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이렇다. 이날 축구 경기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소년들은 경찰을 발견하고는 달아나기 시작했다. 변전소가 보이자 소년들은 2m가 넘는 담을 뛰어넘었다. 그 와중에 2명이 변압기에 떨어지면서 목숨을 잃었다. 소년들은 특별히 잘못한 일도 없었다. 그런데 왜 달아났을까. 이 지역에 사는 아프리카계 젊은이들이 내뱉는 하소연을 들어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경찰은 우리를 사람 취급 하지 않는다. 시도 때도 없이 불러 세워 온몸을 샅샅이 뒤진다. 체류증을 내보이며 합법적인 거주자라고 항변해도 소용없다. 욕도 함부로 한다. 우리가 모두 범죄자로 보이는 모양이다.”
사르코지 장관 ‘쓰레기’ 발언 후 시위 격화
숨진 소년들의 가족과 이웃들이 진상 조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경찰 당국은 “강도 사건을 수사하러 갔을 뿐이며 소년들을 뒤쫓은 사실이 없다”고 답변했다.
이 지역 젊은이들에게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두 소년을 죽음으로 내몬 현실에 격분했다. 쌓여 있던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다. 거리로 뛰쳐나온 젊은이들은 차량과 쓰레기통에 불을 질렀다. 시위를 막는 경찰에게는 돌을 던졌다. 10월28일과 29일에도 비슷한 시위가 계속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금 과격한 시위 정도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30일 시위대의 분노에 불을 지르는 이가 등장한다. 바로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이다. 그는 TV에 출연해 ‘톨레랑스 제로(무관용)’를 선언하면서 강경한 대응을 공언했다. 그는 이미 며칠 전 교외 지역 젊은이들을 ‘쓰레기’ ‘불량배’로 지칭해 물의를 일으킨 바 있었다.
언론을 통해 반복적으로 알려진 사르코지 장관의 ‘쓰레기’ 발언이 시위대를 자극했다. 이때부터 시위는 폭력적인 양상을 띠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후의 상황을 일지 형식으로 정리해보자.
10월31일 최초로 화염병 등장, 11월2일 파리 교외 22개 도시로 사태 확산, 3일 디종 마르세유 등 지방 도시에서도 방화 발생, 5일과 6일 차량 방화가 최고조에 이르러 전국에서 차량 약 2700대 방화. 사태가 악화일로로 치닫는 와중에 7일에는 소요 참가자에게 맞은 노인이 숨을 거두는 비극이 빚어졌다. 마침내 정부는 8일 비상대책을 발표했고, 9일 통행금지령을 포함한 비상사태를 전국에 발동했다.
사태가 커지자 프랑스를 비롯한 각국 언론은 소요가 촉발된 파리 교외 지역 주민들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태가 이렇게까지 커진 원인을 찾아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이민자의 가난한 생활’이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이었다.
이번 사태가 촉발된 클리시 수 부아는 파리 동쪽에 맞닿은 센 생드니라고 하는 도(道)에 속한 도시로, 대표적인 ‘방리유(banlieu·교외를 뜻하는 프랑스어)’ 가운데 한 곳이다. 파리에서 차로 15분이면 도착할 만큼 가깝다. 하지만 생활수준은 파리와 크게 차이가 난다.
주민의 대부분이 북아프리카계 이민자인 이곳에는 낡은 건물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정부가 이민자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수십 년 전 지은 임대주택들이다. 유리창이 깨지고 벽이 부서져도 그대로 방치된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서 나고 자란 젊은이들은 부모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경제력이 없기 때문.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은 실업률이 그 원인이다. 프랑스 전체 실업률이 10%가량인 데 반해, 이민자가 집단 거주하는 방리유의 실업률은 20%를 웃돈다. 청년 실업률만 따지면 어떤 곳은 40%에 이르기도 한다.
젊은이들은 ‘차별’을 이유로 든다. 이들은 이슬람식 이름을 갖고는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거기에 더불어 센 생드니 출신이라고 하면 방금 전까지도 직원을 구한다고 하던 업체들마저 “이미 사람을 구했다”는 뻔한 거짓말을 해가며 일자리를 주지 않는다고 이들은 하소연한다.
젊은이들은 겉으로는 ‘평등’을 외치는 프랑스 사회가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면서 좌절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민 1세대인 부모들은 이런 차별을 별 비판 없이 수용했다. 프랑스 정부가 애초에 허드렛일을 할 노동력을 충원하기 위해 자신들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
하지만 프랑스에서 태어나 스스로를 프랑스인으로 여기는 이민 2세들은 이런 현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실력이 뒤떨어지면 모를까, 똑같은 프랑스인으로 같은 교육을 받고서도 인종과 종교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취업 실패 후 실의 … 범죄 유혹 빠지기 쉬워
좌절에 빠진 이들은 쉽게 범죄의 유혹에 빠져든다. 마약이나 장물 거래가 주로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방리유에서 이뤄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 방리유는 점점 범죄의 온상으로 변했고, 그럴수록 프랑스 정부와 다른 지역의 프랑스인들은 방리유로부터 관심을 돌렸다.
이번 사태가 있기 전부터도 센 생드니 지역은 ‘험악한 동네’로 악명이 높았다. 한 한국교민이 들려주는 목격담은 이 지역의 어두운 면을 잘 말해준다.
“차를 몰고 이 지역의 한 마을을 지나는데, 흑인 청년 두 명이 여성 운전자 혼자 타고 있는 자동차로 다가갔다. 청년들은 벽돌로 차 유리를 박살내더니 핸드백을 집어 들고 유유히 사라졌다. 밝은 대낮인데도 말이다.”
국가 비상사태 선포까지 초래한 프랑스의 소요 사태는 2주일째를 넘기면서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1968년 5월혁명 이후 최대 소요로 기록된 대규모 방화 및 폭력 사태로 2주일 만에 무려 7000여대의 승용차가 불타고 공공건물이 파손됐다.
프랑스 정부는 이번 사태로 안팎의 비난에 직면했다. 사태를 제때 수습하지 못한 것은 물론, 그동안 사회통합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이번 사태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점 때문이다. 정부가 알제리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1955년에 제정된 비상사태법을 사태 해결책으로 내놓은 데 대해서도 비난이 쏟아졌다. 이번 사태에 주도적으로 나선 젊은이들을 그들의 조부모에게 가했던 것과 똑같은 대책으로 다루려는 것은 그 지역 출신들에 대해 여전한 정부의 권위를 드러내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
이라크전쟁 등을 둘러싸고 프랑스의 잘난 척하는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미국, 영국의 언론들은 이번에 모처럼 맞은 기회를 살려 프랑스를 마음껏 조롱했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이민자 문제를 안고 있는 유럽의 이웃 국가들은 프랑스에 눈을 흘기고 있다. 조용하던 자국의 이민자들이 프랑스 사태에 자극받아 동요하면 어쩌나 하는 우려 때문이다.
이번 사태는 프랑스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할 사건으로 꼽힌다. 어떤 식으로 기록될지는 미지수다. 일부에서는 이번 사태를 1968년의 ‘68혁명’에 비유하기도 한다. 당시 대학생들은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체제에 반발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며 들고일어섰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는 68혁명 때와는 달리 ‘목소리’가 없다. 젊은이들은 그저 차량에 불을 지르고 달아나는 행위에만 집착했다. 일부에서 이번 사태를 철없는 청소년들의 불장난 정도로 치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프랑스 사회의 뿌리 깊은 치부를 드러내 모두들 한 번쯤 생각해보도록 했다는 성과는 올렸다. 의도한 바였건 아니건, 이번 사태가 거둔 소중한 결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