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 비엔날레(1993년)에서 빅토리아 시크릿 란제리를 입고 바이올린을 켠 작가 낸시 랭을 만나기로 한 약속이 여름에서 늦가을로 몇 차례 미뤄지는 동안, 몇 명의 작가와 미술평론가들을 만났다. 그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낸시 랭이란 작가는 어떤지 물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낸시 랭. 요즘 가장 잘나가는 스타죠.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마른기침부터 터뜨리며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미술 작가나 평론가들의 대답에는 뭔가 저항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금발머리에 다이아몬드, 내장 등 잡동사니 사지를 달아 사이보그를 만든 낸시 랭의 ‘타부 요기니’ 시리즈를 알고 있었다. 또 주로 비키니 차림으로 행해진 퍼포먼스에 대해서도.
어쨌든 신기했다. 다양한 미술계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그런 점에서 낸시 랭 같은 경우는 어떤가’라고 묻게 됐기 때문이다. 낸시 랭이 미술계의 문제들을 어떤 식으로든 건드리고 있다는 뜻이다.
낸시 랭을 만난 곳은 서울 강동구 올림픽공원 근처, 그녀가 매일 출근하고 있는 쌈지 사옥의 사무실에서였다. 낸시 랭은 이곳 사무실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패션브랜드 ‘낸시 랭’의 디자인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작가 이름을 상품 브랜드명으로 따오긴 이번이 처음이다. 스포츠웨어처럼 보이지만 셔츠는 몸의 곡선을 드러내고 미니스커트 디자인이 많다. 옷에는 ‘타부 요기니’ 이미지나 그녀가 퍼포먼스에서 외쳐대던 구호 ‘큐티, 섹시, 키티, 낸시!’가 프린트돼 있기도 하다. 샘플로 나온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서 낸시 랭은 말했다.
“‘낸시 랭’ 스타일이죠. 저 자신이 갤러리가 되는 거예요.”
작가 이름 상품 브랜드 사용 처음
사실 낸시 랭만큼 의미를 부여하려는 어떤 시도도 먹혀들지 않는 작가를 만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작가들은 의미 부여를 좋아하고, 어떤 작가들은 ‘의미 부여를 거부하는 작가적 행위’의 의미를 강조하기에 낸시 랭의 경우는 좀 당황스럽다.
낸시 랭은 ‘타부 요기니’의 얼굴이 서양 어린이인 것에 대해 서구 문화에 대한 비판 의도인지 혹은 욕망인가 묻자 “그냥 걔들이 내 눈에 예뻐 보여요”라고 대답한다. 로봇의 몸통, 루이비통 가방의 콜라주가 기계주의나 자본주의를 풍자하냐고 질문했다.
“아뇨. 타부 요기니는 이루지 못한 꿈, 퇴색된 욕망을 이뤄주는 신이고, 우리가 바라는 꿈이에요. 거기 나온 잡동사니들은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고요. 제 작품엔 모두 루이비통 가방이 등장해요. 다른 사람들이 샤넬을 좋아하듯 전 루이비통이 좋아요.”
그녀의 루이비통에 ‘의미’를 부여한 사람은 비행기 기내지에서 우연히 낸시 랭의 작품을 본 프랑수아 들라주 루이비통 아시아태평양 사장이다. 그 인연으로 낸시 랭은 올해 여름 애비뉴엘 루이비통 오프닝 행사에서 영상비디오와 퍼포먼스 작업을 했다.
초청받지 않은 베니스 비엔날레에 가서 퍼포먼스를 한 것은 비엔날레 퍼포먼스를 하는 서구 아티스트들과 비슷한 의도였나?
“하하. 전 비엔날레에서 작가들이 그런 퍼포먼스를 하는 줄도 몰랐어요. 다녀와서 알았죠.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주제가 ‘꿈과 갈등’이었고, 그때 전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지 못한 나의 꿈 때문에 갈등하고 있었어요. 참여 작가가 아니니까 제목을 ‘초대받지 않은 꿈과 갈등’으로 한 것이고요.”
그녀에게서 자기 분열이나 소외, 다양한 존재의 층위들은 찾을 수 없다. 100% 순수 자신의 의지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낸시 랭이 존재할 뿐, 밖에서 가해지는 어떤 분석이나 의미들도 매끈한 표면 위로 미끄러져 간다.
낸시 랭은 너무나 경박하고, 얄팍하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을 찌르는 ‘어떤 것’을 갖고 있다. 그런데 작가로서 그러한 재능을 이용한다기보다 그 자체다. 그러므로 낸시 랭의 작품을 분석하기보다는 ‘낸시 랭이라는 현상 혹은 신드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
‘낸시 랭 신드롬’은 미국 중심으로 세계화한 자본주의 시대에 보통사람들이 가진 속물스런 꿈과 갈등이다. 사람들은 낸시 랭에게 묻지도 않고 그가 교포 3세이거나 최소한 꽤 오래 미국에서-다른 나라도 아니고-살았을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러나 사실 낸시 랭은 미국에서 태어나기만 했고, 국제학교 3년 다닌 것 빼면, 홍익대 미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거의 모든 인생을 한국 땅에서 보낸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한국적인 것에 낯설어한다.
낸시 랭에게는 호적에 있는 박혜령과 미합중국 여권의 낸시 랭이라는 이름 두 개가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 두 개의 이름과 두 개의 국적, 두 개의 언어가 작가적 ‘확장성’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그녀가 ‘속해 있는’ 세상은 현대 미술의 중심지고 명품으로 가득한 뉴욕의 ‘피프스 애버뉴’이며 모든 것이 풍요로운 곳이다. 누가 누구를 착취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속일 필요가 없다. 남자들은 젠틀하고, 여자들은 애교가 넘친다. 보통 이런 세상의 이면에선 부패의 냄새가 나고 균열의 틈이 보이지만, 낸시 랭의 세계는 완전무결하다. 아름다운 표면이 세계의 전체이자 전부이기 때문이다.
한때 바이올리니스트가 꿈이었던 낸시 랭은 “현재의 꿈은 세계적 아티스트가 되어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서울을 현대 미술의 중심지로 만들고 싶어요. 아티스트가 갖는 부가가치가 얼마나 큰지 사람들은 잘 몰라요.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제가 작가로 성공해서 국가에 뭔가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다는 것, 전투죠. 피가 철철 터지는.”
전형적인 압구정 부잣집 ‘날라리’였던 낸시 랭은 대학 때 사업가인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암에 걸려 가세가 기우는 불행을 겪지 않았다면, ‘타부 요기니’를 만들어 베니스로 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전투에서 피를 흘리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너무 힘들어서 술도 마시고 자살할 생각도 했어요. 대학원 때 작업실 구할 돈이 없어서 회화를 할 수가 없었고 스케치북에 아이디어만 그렸어요. 그래서 ‘타부 요기니’란 퍼포먼스를 한 거죠. 그래서 베니스로 갔고요.”
퇴색된 어린 시절의 꿈을 살려내 또 다른 꿈으로 스스로 변신해가는 반 악마이자 반 천사인 ‘타부 요기니’는 낸시 랭의 방어기제다. ‘타부 요기니’는 압구정 여대생의 속물스런 꿈을 작가적 성공이라는 아이디어로 바꿔놓고, “아저씨, 날 좀 똑바로 보세요”라고 외치는 아슬아슬한 그녀의 신체를 브랜드로 변신시킨다.
그녀의 홈페이지에 여대생과 어린 소녀들이 메시지를 남기는 건, 다수의 ‘낸시 랭 워너비’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메라 앞에서 그녀는 독특한 호흡법으로 셔터 순간에 미소를 환하게 터뜨렸고, 허리를 틀고 다리가 ‘길어 보이게’ 섰다. 아, 사람보다 카메라와 더 친밀한 ‘인류’라니.
낸시 랭은 12월14~25일까지 서울 인사동 쌈지길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비키니 입은 현대미술’이란 책도 펴내며, 신년 초에 곧바로 ‘낸시 랭’ 2006년 s/s 패션쇼를 연다.
“현대미술 작품을 누가 사나요? 작가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비즈니스 마인드예요. 너무나 당연한 이치인데, 아닌 척하죠.”
인터뷰를 하던 날 낸시 랭은 아시아의 작가들을 다루는 뉴욕에서 발행되는 ‘theme’란 잡지와 또 다른 인터뷰를 했다. 작가와 셀레브리티를 합친 낸시 랭의 존재가 아시아의 젊은 여성 작가의 전략으로 이해되는 듯했다.
내친김에 어리석은 질문을 하나 더 시도해보았다. 당신은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되기를 원하나요?
“페미니즘을 생각한 적은 없지만, 한국에서 여자로 살면 당연히 차별과 분노를 느끼죠. 우리나라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은 소녀들이에요. 그들의 ‘왕언니’가 되는 것, 그게 또 하나의 제 꿈이죠.”
“낸시 랭. 요즘 가장 잘나가는 스타죠.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마른기침부터 터뜨리며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는 미술 작가나 평론가들의 대답에는 뭔가 저항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금발머리에 다이아몬드, 내장 등 잡동사니 사지를 달아 사이보그를 만든 낸시 랭의 ‘타부 요기니’ 시리즈를 알고 있었다. 또 주로 비키니 차림으로 행해진 퍼포먼스에 대해서도.
어쨌든 신기했다. 다양한 미술계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그런 점에서 낸시 랭 같은 경우는 어떤가’라고 묻게 됐기 때문이다. 낸시 랭이 미술계의 문제들을 어떤 식으로든 건드리고 있다는 뜻이다.
낸시 랭을 만난 곳은 서울 강동구 올림픽공원 근처, 그녀가 매일 출근하고 있는 쌈지 사옥의 사무실에서였다. 낸시 랭은 이곳 사무실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패션브랜드 ‘낸시 랭’의 디자인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작가 이름을 상품 브랜드명으로 따오긴 이번이 처음이다. 스포츠웨어처럼 보이지만 셔츠는 몸의 곡선을 드러내고 미니스커트 디자인이 많다. 옷에는 ‘타부 요기니’ 이미지나 그녀가 퍼포먼스에서 외쳐대던 구호 ‘큐티, 섹시, 키티, 낸시!’가 프린트돼 있기도 하다. 샘플로 나온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서 낸시 랭은 말했다.
“‘낸시 랭’ 스타일이죠. 저 자신이 갤러리가 되는 거예요.”
작가 이름 상품 브랜드 사용 처음
사실 낸시 랭만큼 의미를 부여하려는 어떤 시도도 먹혀들지 않는 작가를 만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작가들은 의미 부여를 좋아하고, 어떤 작가들은 ‘의미 부여를 거부하는 작가적 행위’의 의미를 강조하기에 낸시 랭의 경우는 좀 당황스럽다.
낸시 랭은 ‘타부 요기니’의 얼굴이 서양 어린이인 것에 대해 서구 문화에 대한 비판 의도인지 혹은 욕망인가 묻자 “그냥 걔들이 내 눈에 예뻐 보여요”라고 대답한다. 로봇의 몸통, 루이비통 가방의 콜라주가 기계주의나 자본주의를 풍자하냐고 질문했다.
“아뇨. 타부 요기니는 이루지 못한 꿈, 퇴색된 욕망을 이뤄주는 신이고, 우리가 바라는 꿈이에요. 거기 나온 잡동사니들은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고요. 제 작품엔 모두 루이비통 가방이 등장해요. 다른 사람들이 샤넬을 좋아하듯 전 루이비통이 좋아요.”
‘타부 요기니’ 연작, 혼합매체 2005
초청받지 않은 베니스 비엔날레에 가서 퍼포먼스를 한 것은 비엔날레 퍼포먼스를 하는 서구 아티스트들과 비슷한 의도였나?
“하하. 전 비엔날레에서 작가들이 그런 퍼포먼스를 하는 줄도 몰랐어요. 다녀와서 알았죠.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주제가 ‘꿈과 갈등’이었고, 그때 전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지 못한 나의 꿈 때문에 갈등하고 있었어요. 참여 작가가 아니니까 제목을 ‘초대받지 않은 꿈과 갈등’으로 한 것이고요.”
그녀에게서 자기 분열이나 소외, 다양한 존재의 층위들은 찾을 수 없다. 100% 순수 자신의 의지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낸시 랭이 존재할 뿐, 밖에서 가해지는 어떤 분석이나 의미들도 매끈한 표면 위로 미끄러져 간다.
낸시 랭은 너무나 경박하고, 얄팍하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을 찌르는 ‘어떤 것’을 갖고 있다. 그런데 작가로서 그러한 재능을 이용한다기보다 그 자체다. 그러므로 낸시 랭의 작품을 분석하기보다는 ‘낸시 랭이라는 현상 혹은 신드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
‘낸시 랭 신드롬’은 미국 중심으로 세계화한 자본주의 시대에 보통사람들이 가진 속물스런 꿈과 갈등이다. 사람들은 낸시 랭에게 묻지도 않고 그가 교포 3세이거나 최소한 꽤 오래 미국에서-다른 나라도 아니고-살았을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러나 사실 낸시 랭은 미국에서 태어나기만 했고, 국제학교 3년 다닌 것 빼면, 홍익대 미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거의 모든 인생을 한국 땅에서 보낸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한국적인 것에 낯설어한다.
낸시 랭에게는 호적에 있는 박혜령과 미합중국 여권의 낸시 랭이라는 이름 두 개가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 두 개의 이름과 두 개의 국적, 두 개의 언어가 작가적 ‘확장성’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그녀가 ‘속해 있는’ 세상은 현대 미술의 중심지고 명품으로 가득한 뉴욕의 ‘피프스 애버뉴’이며 모든 것이 풍요로운 곳이다. 누가 누구를 착취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속일 필요가 없다. 남자들은 젠틀하고, 여자들은 애교가 넘친다. 보통 이런 세상의 이면에선 부패의 냄새가 나고 균열의 틈이 보이지만, 낸시 랭의 세계는 완전무결하다. 아름다운 표면이 세계의 전체이자 전부이기 때문이다.
한때 바이올리니스트가 꿈이었던 낸시 랭은 “현재의 꿈은 세계적 아티스트가 되어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서울을 현대 미술의 중심지로 만들고 싶어요. 아티스트가 갖는 부가가치가 얼마나 큰지 사람들은 잘 몰라요.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제가 작가로 성공해서 국가에 뭔가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다는 것, 전투죠. 피가 철철 터지는.”
전형적인 압구정 부잣집 ‘날라리’였던 낸시 랭은 대학 때 사업가인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암에 걸려 가세가 기우는 불행을 겪지 않았다면, ‘타부 요기니’를 만들어 베니스로 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전투에서 피를 흘리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너무 힘들어서 술도 마시고 자살할 생각도 했어요. 대학원 때 작업실 구할 돈이 없어서 회화를 할 수가 없었고 스케치북에 아이디어만 그렸어요. 그래서 ‘타부 요기니’란 퍼포먼스를 한 거죠. 그래서 베니스로 갔고요.”
퇴색된 어린 시절의 꿈을 살려내 또 다른 꿈으로 스스로 변신해가는 반 악마이자 반 천사인 ‘타부 요기니’는 낸시 랭의 방어기제다. ‘타부 요기니’는 압구정 여대생의 속물스런 꿈을 작가적 성공이라는 아이디어로 바꿔놓고, “아저씨, 날 좀 똑바로 보세요”라고 외치는 아슬아슬한 그녀의 신체를 브랜드로 변신시킨다.
그녀의 홈페이지에 여대생과 어린 소녀들이 메시지를 남기는 건, 다수의 ‘낸시 랭 워너비’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메라 앞에서 그녀는 독특한 호흡법으로 셔터 순간에 미소를 환하게 터뜨렸고, 허리를 틀고 다리가 ‘길어 보이게’ 섰다. 아, 사람보다 카메라와 더 친밀한 ‘인류’라니.
낸시 랭은 12월14~25일까지 서울 인사동 쌈지길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비키니 입은 현대미술’이란 책도 펴내며, 신년 초에 곧바로 ‘낸시 랭’ 2006년 s/s 패션쇼를 연다.
“현대미술 작품을 누가 사나요? 작가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비즈니스 마인드예요. 너무나 당연한 이치인데, 아닌 척하죠.”
인터뷰를 하던 날 낸시 랭은 아시아의 작가들을 다루는 뉴욕에서 발행되는 ‘theme’란 잡지와 또 다른 인터뷰를 했다. 작가와 셀레브리티를 합친 낸시 랭의 존재가 아시아의 젊은 여성 작가의 전략으로 이해되는 듯했다.
내친김에 어리석은 질문을 하나 더 시도해보았다. 당신은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되기를 원하나요?
“페미니즘을 생각한 적은 없지만, 한국에서 여자로 살면 당연히 차별과 분노를 느끼죠. 우리나라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은 소녀들이에요. 그들의 ‘왕언니’가 되는 것, 그게 또 하나의 제 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