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10월30일 출입기자들과 북악산 산행 중 기자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
강연 시작 전에는 “(내 강연이) 여러분에게 공감을 못 주면 ‘헛방’”이라고 했다. 또 “내가 (권양숙 여사에게) ‘집사람’이라고 하면 ‘여보쇼, 거기(관저)가 당신 집이오?’ 그러면 할 말 도 없고 해서 ‘여사님’ 이렇게 부른다. 오늘 집에 가면 여사님께서 ‘대통령이 돼가지고 헛방이 뭐요’, ‘그럼 뭐라고 말해. 헛방을 헛방이라고 하지’, 오늘 헛방 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대선 때 특유의 어법으로 젊은층 파고들어
특강에서는 이밖에도 수많은 ‘노무현식 어법’이 쏟아졌다. 강연 준비 과정을 설명하면서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처럼 소문난 강사 별로 들을 말 없다”며 “여러분과의 강연을 약속해놓고 준비를 안 했다. 왜? 강연의 도사니까”라고 말해 일단 폭소를 유도했다. 그러고는 “근데 하루하루 날짜가 다가오니까 걱정이 태산같이 다가왔다. 할 말이 너무 많으면 이 말 꺼냈다 저 말 꺼냈다 실패하는 게 도사의 운명”이라고 했다.
노 대통령의 ‘신기하다’는 말은 야당에 공격의 빌미를 줬다. 한나라당은 즉각 ‘대통령이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정답’이란 논평을 냈다. 김대은 부대변인 명의의 논평은 “어떻게 대통령이 됐는지 알고 보면 하나도 신기할 것도 없다”며 “총풍, 세풍, 안풍, 병풍, 기양풍, 설훈풍 등 사악한 정치 공작 덕분이었기 때문”이라고 비꼬았다.
노 대통령의 말, 특히 어법은 일선 정치인 시절부터 꾸준히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아울러 노 대통령의 말은 늘 자신의 정치적 부침을 결정하는 가름자가 되곤 했다. 13대 야당 국회의원 당시 ‘청문회 스타’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특유의 공격적인 직설화법이 국민들의 체증을 풀어줬기 때문이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노무현 후보의 어법은 젊은이들의 열정을 파고들었다.
취임 후에도 ‘독특한 어록’은 이어졌다. 절제된 표현만 사용하는 대통령만을 봐온 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죠”(2003년 3월9일, 검사와 대화), “전부 힘으로 하려고 하니 대통령이 다 양보할 수도 없고, 이러다 대통령직을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 위기감이 든다”(5월21일, 5·18행사추진위 간부 면담)가 시작이었다.
그러다 2004년 봄 17대 총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을 지지한 ‘말’ 때문에 탄핵까지 당했지만 지금도 노 대통령의 거침없는 어법은 변화가 없다. “대통령 권력을 통째로 넘길 수도 있다” 같은 위험천만한 말에서부터 “대통령이 어떻게 됐는지 나도 신기하다”는 너무 ‘솔직한’ 말까지.
이런 상황에서 노 대통령은 최근 자신의 심중을 가장 잘 꿰뚫어보기로 소문난 윤태영 제1부속실장을 신설된 연설기획비서관에 기용했다. 연설기획비서관은 비서실장의 통제를 받지 않는 대통령 직속이다. 윤 비서관의 집무실은 부속실 바로 옆에 마련됐다.
“대구, 역설, 도치, 강조, 비유 많이 써”
청와대 김만수 대변인은 “대통령 행사와 관련한 메시지 준비 및 연설문 기획업무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연설기획비서관 자리를 신설해 윤 부속실장을 임명했다”고 설명했다. 윤 비서관 스스로는 “홍보수석실이 있기는 하지만 대통령 곁에서 언제든 말씀을 듣고 체계적으로 메시지를 관리하는, 말하자면 특화된 기능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윤 비서관은 노 대통령이 청와대 밖으로 내보낼 메시지의 방향을 정해 밑그림을 그리고, 기존의 강원국 연설비서관은 실무적인 연설문 작성 업무를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윤 비서관은 11일 노 대통령의 어법에 대해 묻자 “대구, 역설, 도치, 강조, 비유를 많이 쓰시는 편”이라며 “공식화되고 정제되지는 않았지만 언어가 살아 있다”고 표현했다.
노 대통령 스스로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으면 가급적 줄여야겠지만, 그렇다고 생소한 언어라고 무조건 잘못됐다는 식의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한다. 윤 비서관은 이에 대해 “‘대통령의 언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런 인식에 따라 노 대통령은 어법을 바꾸려는 노력은 그다지 하지 않는 편이다. 따라서 대통령 취임 전이나, 취임 후나 지금이나 기본적인 어법에는 큰 변화가 없다.
노 대통령은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것 못지않게 말을 많이 하는 것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일례로 취임 후 지금까지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북악산을 세 번 올랐는데, 산행 중에도 끊임없이 말을 한다. 화제는 산세 설명에서부터 정국 현안까지 다양하다. 10월30일 산행을 마치고 기자들과 삼계탕 점심을 하는 자리에선 선 채로 마이크를 잡고 한 시간가량을 얘기하는 바람에 나중에는 대통령의 말을 받아 적던 기자들이 오히려 기진맥진했다.
대통령이 말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에 구설에 자주 오르고 말의 무게도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다. 노 대통령은 사석에서 “국회의원 시절에 대통령이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보고 ‘나는 대통령이 되더라도 저러지 말아야지’ 생각했는데, 막상 대통령 자리에 앉으니 많이 하게 되더라”고 토로한 바 있다.
윤 비서관은 이에 대해 “과거에는 대통령이 밀실에서 몇몇 참모들에게만 이런저런 말을 했지만, 지금은 대통령의 말을 공개적 장소에서 누구나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역대 대통령보다 길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반박했다. 또 “대통령이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국정을 소상히 챙기려는 열정이 많다는 의미도 된다”고 주장했다.
참여정부의 남은 임기 동안 대통령의 말이 또 어떤 풍파를 일으키고, 정국 흐름을 반전시킬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