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이농로씨(왼쪽)와 구순의 두 시어머니, 둘째아들 가족과 함께한 황인화씨(가운데).
작은방은 황씨의 큰시어머니(96)와 시어머니(95) 두 분이 함께 쓰는 곳이다. 황씨는 두 시어머니와 시아버지(1990년 작고)를 모시며 육십 평생을 보냈다. 뿐인가, 2001년과 2002년 잇따라 세상을 떠난 친정 부모의 말년을 지켰고 극심한 경제적 고통 속에서도 4형제를 대학, 대학원까지 공부시켰다. 둘째아들의 어린 두 손자(6살, 2살)를 도맡아 키우다시피 하며 폐백 음식, 이바지 음식 납품으로 생활비도 보탠다. 효부, 효녀, 자애로운 할머니이자 어머니, 또한 인고하는 아내로서 전통적 가치에 기반한 ‘대한민국 어머니’의 아픈 삶을 온몸으로 감당해온 것이다.
시아버지 주벽 감내 … 시어머니 병 수발도 기꺼이
그렇다고 그녀가 오직 부덕(婦德)만 아는 순종적이고 말수 적은 여인은 아니다. 오히려 낙천적이고 활동적이며 나름의 오기와 고집도 갖춘 여장부다. ‘효행수상자 대전효도회’ 회장 일을 열성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 한 예. 황씨는 “이왕 주어진 운명이라면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 그 안에서 행복과 보람을 찾는다”는 마음으로 살아왔다고 한다. 또한 “먹고살기 힘든 데 비하면 어른 모시는 것은 큰일이 아니다. 한 분 모시나 네 분 모시나 거기서 거기”라며 “오히려 그분들이 계셨기에 오늘의 내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도 했다.
황씨는 경북 상주 출신이다. 종가 넷째아들의 장녀로 집안 어른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자랐다.
“어찌나 예뻐하셨는지 전 우리 부모님이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자라다시피 했어요. 교직에 몸담으셨던 친정아버지께서 사업을 하신다고 5, 6년간 서울살이를 하실 때도 식구 중 저만 고향 종가에 남았지요. 거기서 어른 공경하는 법, 제상 차리고 손님 접대하는 법을 절로 익혔지요.”
여고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간호사 생활을 했다. 스물네 살 되던 해 동료 간호사이던 고종사촌 시누이의 중매로 남편 이농로씨(67)를 만났다.
“결혼해 대전 시가에 들어와보니 시어머님이 두 분이시더군요. 큰어머님께 소생이 없자 작은댁을 들여 남편 형제를 보신 거지요. 또 시아버님 성품은 얼마나 별나시던지요. 남들은 ‘시어머니가 둘이니 고생이 자심하지 않았느냐’ ‘두 시어머니 사이에서 갈등이 많았겠다’고들 하지만 거기 신경 쓸 여력이 없었어요. 셋이 똘똘 뭉쳐도 시아버님 한 분 감당하기가 어려웠거든요.”
툭하면 “친정으로 살림 빼돌리는 것들”이라며 두 아내와 며느리에게 생트집을 잡던 시아버지는 술을 좋아하고 주벽도 심했다. 어찌나 식구들을 달달 볶아대는지 집에 있을 수가 없어 두 시어머니와 함께 옆집 지붕 위에서 날밤을 새운 일도 숱하게 많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황씨는 시부모 봉양에 최선을 다했다. 남편이 사업을 한다지만 내일 일을 알 수 없게 힘든 살림이었다. 친정에 손 벌리고 여기저기 아는 데서 돈 끌어모아 부도를 막는 것도 그녀가 할 일이었다. 편물이니 옷 수선이니 집에서 할 수 있는 부업은 죄다 하며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쳤다.
“정부미 보조를 받아 살았는데 식구가 많으니 20kg짜리 밀가루 한 포대가 일주일을 못 갔어요. 마흔 다 돼선가, 이렇게는 정말 못 살겠다 싶어 몇 번 수면제를 먹었지요. 한번은 정말 제대로 죽자 싶어 꽤 많은 양을 털어넣었는데 그래도 살데요. 밖에서 돌아온 남편이 비몽사몽하는 날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담배만 피던 모습이 떠올라요. 죽지는 않겠다 싶고, 무슨 뾰족한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랬겠지요.”
황씨는 그때 결심했다고 한다. 내 언젠가 큰소리치며 살리라, 그때를 위해 내 테두리만큼은 확실히 지키리라, 내게 맡겨진 이 가정을 끝까지 지키리라.
86년, 시아버지가 “주역을 보니 지금이 나 죽을 때”라며 물 한 모금을 넘기지 않았다. 황씨는 하루 한 시간씩 동쪽을 향해 꿇어앉아 천지신명께 시아버지의 수명 연장을 빌고 또 빌었다.
“왠지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늘의 보살핌 덕분일까, 열흘 만에 시아버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정말 거짓말처럼 다른 어른이 되셨지요.”
시아버지는 그로부터 4년을 더 살았다. 그러면서 평생 지고 온 가족, 친지들과의 갈등과 반목을 모두 풀고 갔다. 향년 89세로 임종하기 직전, 시아버지는 식구들을 불러 앉혀놓고 황씨에게 그간 아들 내외를 닦달해 챙겨놓았던 비상금 600만원을 고스란히 넘겨주었다. “내가 너 때문에 살았다, 네가 이 집안을 살렸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97년 황씨는 또 한번 어려운 결심을 했다. 친정 부모를 모시기로 한 것이다. “시집 와 할 만큼 했으니 이제 내 부모님 모시는 데 눈치 볼 것 없다”는 대찬 결심이었다. 당시 친정어머니는 21년째 중풍으로 자리보전을 하고 있었다.
“그 몇 해 전부터 남동생이 두 분 어른을 모시고 있었는데, 동생 집에 사정이 생겨 더는 모시기 어렵게 된 거예요. 평생 교직에 몸담으셨던 친정아버지는 자상하신 한편 성품이 꼿꼿하고 깨끗한 분이셨지요. 처음에는 ‘내가 딸네 집에 왜 가느냐’며 버티셔서 모셔오느라 애를 먹었지요.”
당시 집안 경제 사정은 최악이었다. 그러나 황씨는 “부모 모시는 데 딸 아들이 어디 있고, 돈 많고 적음이 어디 있느냐”며 계획대로 행했다. 이후 7년간 그녀는 친정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젊은 시절 못다 한 친부모와의 정을 살뜰히 나눴다. 남편 이농로씨도 장인 장모에게 효성을 다해 주위로부터 “세상에 다시없는 사위”라는 칭찬을 들었다.
“어려운 살림 속에서 4형제 착하게 자라 정말 감사”
친정 부모를 모셔온 이듬해부터 시어머니도 혼자 힘으로 용변을 가릴 수 없게 됐다. 친정어머니 대하는 것과 똑같이 웃음으로 보살피는 그녀에게 시어머니는 “황인화 신세 언제 갚나, 황인화 아니면 누가 날 살려주나” 하며 감사의 말을 쏟아내곤 했다. 그러나 치매가 심해진 요즘은 욕을 할 때도 적지 않다고 한다. 황씨는 “섭섭한 게 아니라 마음 아프고 안쓰러울 뿐”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어수선하고 늘 어려운 집안 살림에도 네 형제는 잘 자라주었다. 황씨는 “보통은 부모가 자식 생각을 더 하지만, 나처럼 살다 보면 애들보다 집안 어른들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다”며 “그런 가운데에서도 착하고 성실하게 자라준 아이들이 정말 고맙다”고 했다. “절박할 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건 누가 뭐래도 아이들 덕분”이라는 것이다.
“남들은 ‘희생’이라지만, 전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어요. 좀 아플라 해도 제가 없으면 꼼짝없이 밥 굶고 누워 있을 사람이 여럿이니 자리보전하고 있을 수가 없었지요. 제가 이때껏 큰 병은 앓아본 적이 없는데, 아마도 그게 제 건강 비결인가 봅니다.”
요즘도 황씨는 늘 바쁘다. 끼니때마다 밥을 떠먹여 주어야 하는 사람이 시어머니에 손자 둘, 합쳐 셋이나 된다. 큰시어머니는 아직 혼자 거동이 가능하다지만 역시 구순 노인이라 한시도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두 분 어른 목욕시키고 머리카락 다듬는 것도 황씨 일이다. 대전효도회 일이며 노인정 어르신들 챙기는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가끔 친구들이 ‘니 행복은 어디서 찾니’ 하고 물으면 ‘내 안에서 찾지’ 하고 대답해요. 세상에는 공짜가 없지요. 그저 순간순간 살아내려 애썼을 뿐인데 어느새 여기저기서 효부니 효녀니 하는 소리를 듣게 됐어요. 그런 칭찬도 고맙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역시 제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이에요. 의무가 아닌 정과 사랑으로 부모님들과 평생을 함께한 것, 또 똑같은 마음으로 자손들과 함께하고 있는 우리 가정 그 자체. 제 인생의 의미는 바로 거기 있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