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부동산이 활동하기 좋은 지방 중소도시의 개발지역 광경. 한 신흥 중소도시의 부동산중개소 밀집지역 광경.지방 부동산 매물이 많이 나와 있는 강남의 한 부동산 중개사무소.(왼쪽부터)
그러나 친구와의 연락은 금세 끊어졌다. 약속했던 반년이 지나고 어느새 아파트 중도금 낼 시기가 다가왔지만 현금이 바닥나 결국 아이들 교육보험마저 해약해야 했다. 더욱 기막힌 사실은 애당초 취득세 300만원을 냈지만 부동산업체가 이중 계약한 사실이 발각돼 추가로 2000여만원의 세금을 추징당한 것. 그제야 ‘사기’인 줄 알았지만 집을 압류한다니 어쩔 수 없이 또 빚을 낼 수밖에 없었다. 땅이라도 담보로 잡아 대출을 받기 위해 알아보니 공시지가는 1000원에도 미치지 못했다. 주변 시세조차 5만원 내외라니 기가 막힐 뿐이었다.
“당해보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자본주의란 게 친절한 사람을 등쳐먹는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적어도 나는 대학까지 나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지는 몰랐어요. …탈북자들이 지원금 홀랑 날리는 사정을 이해하게 되더군요.”
그녀의 친구는 이른바 기획부동산에서 일했던 텔레마케터(전화로 영업하는 사원ㆍ중개보조원), 업계에서 약자로 티엠(TM)으로 불리는 부동산 다단계회사의 직원이었다.
정식 명칭이 ‘부동산매매법인’인 이 신종 사업은 세간에서 기획부동산으로 통하지만 업계에선 오히려 다단계 부동산으로 불린다. 그렇다고 직원들에게 땅을 강매하거나 피라미드 방식으로 이들의 친인척들에게 물건을 떠넘기는 ‘고전적인’ 방식은 절대 쓰지 않는다. 세상 물정 모르는 이들이나 대박의 환상을 좇는 서민들의 꿈을 악용해 이른바 ‘폭탄 돌리기’식 영업 방식을 추구할 뿐이다. 문제는 물건이 겨우(?) 수십만원, 수백만원에 지나지 않는 자석요나 정수기가 아닌 수천만원 혹은 1억원을 넘는 부동산이라는 점. 가격을 빼면 대부분의 행태가 ‘불법 다단계 판매’와 여러모로 흡사하다. 기획부동산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1. 적극적인 텔레마케팅 전법
강원 횡성에 연고라곤 찾아볼 수 없는 J씨가 이곳 땅에 투자를 한 계기는 올 봄에 걸려온 단 한 통의 전화였다. 휴대전화로 걸려온 낯선 전화 한 통을 무심코 응대해준 것이 실수였던 것. 평소 친절하다는 평을 듣는 그였기에 낯선 아주머니의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매몰차게 내치지 못했다. 결국 한 달에 두세 번씩 걸려오는 전화공세에 굴복하고 소소한 재테크 컨설팅을 받기에 이른다.
(기획부동산 업체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재산을 형성한 이들의 신상정보를 확보하고 집요한 전화공세를 펼친다. 현재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만 200여 업체가 밀집해 있으며, 인터넷을 통해 말주변이 뛰어난 주부·학생 등을 텔레마케터로 뽑아 적게는 20~30명, 많게는 200명까지 두고 파상적인 전화공세를 펼친다. 자격증이 필요 없기 때문에 대박을 노리는 이들의 진출이 활발하게 이뤄진다.)
최근 기획부동산이 대거 몰려들기 시작한 테헤란로 광경.개발 열풍이 몰아친 전남 신안군의 한적한 농지 풍경. 전남 해남군 산이면 한 부동산중개소 앞에서 외지인들이 땅을 사기 위해 상담하고 있다(왼쪽부터).
J씨가 퇴근시간을 이용해 방문한 ‘쫛쫛컨설팅’ 사무실은 강남 테헤란로에서도 가장 번듯한 빌딩에 위치한 회사였다. 화려한 조명과 원목가구로 꾸며진 사무실에서 깔끔한 영업사원이 그를 맞이한다. 통화 당사자인 텔레마케터는 바쁘다고 해서 만날 수도 없었다. 수많은 이들이 상담하고 있었고, 테이블에는 이 회사 사장의 인터뷰 기사를 표지에 실은 잡지가 자랑스럽게 비치돼 있었다.
(△△컨설팅, 쫛쫛인베스트, ##종합개발 등은 서울 강남의 기획부동산 업체들이 즐겨 쓰는 회사명이다. 이들은 무조건 강남에 보증금 1억원, 월 1000만~2000만원짜리 사무실을 얻고 상담방·전무방·사장방 등을 화려한 인테리어로 장식한다. 또한 1년마다 인근 빌딩으로 이사하는 방식으로 귀찮은 고객들을 피하기도 한다. 회사가 겉모습에 치중하는 이유는 끊임없이 새로 충원되는 내부고객(영업사원)과 외부고객(소비자)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서다. 대표 업체들은 방송 광고까지 펼치며 소비자를 현혹한다.)
3. 사기에 가까운 수법들
실장이라는 사람이 J씨에게 다짜고짜 강원도 신도시 개발도면을 보여주고는 얻기 힘든 고급정보라며 투자를 권한다. 내친김에 다음날 당장 현장 방문에 나서자고 강요한다. 믿기 어렵다는 반응에는 업체 사장과 한 유력 정치인의 친분관계를 거론하며 대응하고, 실제로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기도 한다. 언론에 게재된 개발 예상 기사는 기본으로 제공한다. 개발 예정 후보지는 소개 기사가 넘쳐날 정도로 많은데, 이들은 심한 경우 기사 내용을 바꾸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개발 예상 지역 도면은 설계사무실에 의뢰해 이른바 가짜도면을 제작한다. 지도에 나타난 상업지구나 주거지역은 모두 조작된 것이다. 정치인들과 찍은 사진 역시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면 쉽게 이해가 된다.
J씨는 한 텔레마케터한테서 두 달간 무려 10여통에 이르는 전화공세 끝에 유혹에 넘어갔다. 그렇다면 왜 이들 영업사원은 통신판매에 열을 올릴까. 비밀은 바로 수익 분배구조에 있다. 생활정보지나 인터넷을 통해 모집된 부동산 텔레마케터들은 판매 실적에 따라 다단계 방식으로 수입이 배정된다. 이 조직은 보조원과 부장, 실장으로 구성돼 있고, 150만원에 이르는 활동비와 평당 1000원~3만원에 이르는 판매수당이 지급된다.
개발지와 전혀 상관없는 평당 1만원짜리 땅이 있다고 치자. 기획부동산은 계약금만 주고 가계약에 들어간다. 그리고 잔금 납부를 미룬 채 이 땅을 업체의 영업사원과 텔레마케터들에게 5만원짜리 물건이라고 소개한다. 이때 몇 가지 ‘쇼’가 덧붙여지기도 한다.
“몇몇 우수 영업사원들이 이 땅을 팔았다고 가장하여 수천만원의 판매수당을 공개석상에서 지급하는 행사를 벌입니다. 그럼 직원들은 흥분하게 마련이고 ‘나도 저렇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지요. 마치 종교집단 부흥회 같은 모습입니다.”(S기획부동산 전 영업사원)
원가 5만원으로 부풀려진 이 땅은 금세 판매수당 평당 2만5000원이 붙고 중간간부 수익 2만5000원이 추가돼 10만원으로 불어난다. 기획부동산 물건이 대체적으로 현시가에서 10배 정도 폭등하는 비밀이 여기에 숨어 있다. 결국 이 땅을 500평만 팔아도 영업사원에게는 1인당 1250만원이 떨어지니 친구와 친척까지 끌어들이는 데 혈안이 될 수밖에 없는 것.
판매의 또 다른 비결은 소비자가 동원할 수 있는 돈에 맞춰 땅을 분할, 판매하는 방법. J씨가 “4000만원 정도밖에 구할 수 없다”고 하자, 회사는 알아서 적당하게 땅을 잘라 준비해왔다. 이럴 경우 대개 공동지분으로 한 필지에 수십명의 지주가 생긴다. 또한 아무렇게나 땅을 나눠주기 때문에 쓸데없는 맹지가 생겨나기도 한다.
가장 큰 문제는 계약금만 주고 땅을 확보한 뒤, 무차별적인 영업으로 땅을 팔아치우고 세금을 내지 않고 잠적하는 방식인 미등기전매 관행. 기획부동산이 활개를 칠 수 있는 것도 이 관행 때문이다.
“‘미등기전매’는 악덕 기획부동산이 살아남는 생존요건으로 악용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손 안 대고 코를 풀고 있지요. 물론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전가되고 있습니다.”(전직 기획부동산업자 최모씨)
원래 기획부동산에서 거래되는 부동산은 소유권이 법인 명의로 돼 있어야만 매도(판매, 분양)할 수 있는데 그러한 사실이 쉽게 무시되고 있다. 속았다 싶어 법적 대응을 하려 해도 상대편이 사라져버린 경우가 태반이다. 보통 2년 정도 지나서 땅값이 오르지 않는 경우에 소송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는 이미 업체가 이름을 바꾸거나 업종 자체를 바꿔 잠적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항의한 사람이 이들 업체의 폭력적 위세에 눌려 조용히 넘어간다. 그들이 감언이설로 현실을 왜곡했다 해도 그 말을 녹음까지 해두는 사람은 없다. 개발 계획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을 뿐이지 법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
“기획부동산은 흔히 ‘개미귀신’으로 불립니다. 소액투자자(개미)들의 단물을 한꺼번에 모조리 뽑아먹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토지는 생각보다 넓고, 사기꾼이 많다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다음카페 ‘부동산으로 부자 되기’ 모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