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선교사로 4대에 걸쳐 한국에 살며 활동해온 언더우드 일가가 입국 119년 만에 이 땅을 떠난다는 소식이다. 언더우드 1세인 원두우(元杜尤ㆍ미국명 Horace Grant Underwoodㆍ1859~1916) 목사는 1885년 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최초로 입국해서 오늘의 연세대학교를 설립하고 새문안교회를 일군 인물이다. 그의 유지가 증손자(언더우드 4세)인 원한광(元漢光ㆍ61) 한ㆍ미교육위원회 위원장에게까지 이어진 것이다.
언더우드 일가는 한국 과학사에도 중요한 인물이다. 언더우드 1세는 1884년 미국 장로교의 파견 선교사로 12월16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85년 1월25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지만, 갑신정변의 후유증을 앓던 조선에 바로 들어오지 못했다. 대신 일본에서 헵번 목사 집에 기거하면서 이수정에게서 2개월 동안 한국어를 배운 뒤 그해 4월5일에야 조선 땅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첫 근대병원이자 의학교육 기관이기도 한 광혜원(廣惠院)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면서 선교사인 동시에 과학교사 역할을 수행했다.
또 대학 설립을 희망하여 1915년 서울 종로의 YMCA 회관에서 선교단체와 연합하여 60여명 학생으로 경신(儆新)학교 대학부를 설립했다. 이것이 바로 연희전문(延禧專門)의 출발점이며 오늘의 연세대학교로 발전했다. 당시 연희전문은 문과 상과 농과 신과 수물과(數物科) 화학과의 6개 학부를 허가받았으나, 실제 개교시에는 문과 상과 수물과 3과로 출발했다. 여기 수물과가 바로 한국 역사에서 최초의 대학 자연과학 학과인 셈이다.
실제로 수물과는 훗날 한국 과학을 이끌어갈 주역들을 다수 배출했다. 한국 최초의 천문학 박사로 초대 관상대장을 지낸 이원철(李源喆ㆍ 1896~1963) 박사와 한국 최초의 물리학 박사로 서울대 총장(1951)과 문교부 장관(1956)을 한 최규남(崔奎南ㆍ1898~1992) 박사가 모두 연희전문 출신이다.
이원철 박사는 1919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26년 한국인 최초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최규남 박사는 26년 연희를 졸업하고 32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들은 모두 미시간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연희전문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루퍼스 교수 덕택이다. 짧은 글로 한국 과학사에 미친 연희전문 수물과의 역사를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실로 한국 근대과학의 남상(濫觴)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서울에서 태어난 언더우드 2세인 원한경(元漢慶ㆍHorace Horton Underwoodㆍ1890~1951) 박사는 1933년 연희전문 제3대 교장이 되어 학교를 더욱 발전시켰고 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ty)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한국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특히 학회지 한 권을 차지하며 34년에 발표된 논문 ‘한국의 배(Korean Boats and Ships)’는 지금도 한국 선박사 연구에 좋은 참고자료로 남아 있다.
연희전문은 한국 과학사의 개척지였다. 그런데도 안타깝게 오늘의 연세대는 한국 근대과학사의 개척자인 언더우드를 비롯한 많은 선교사들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 한국의 기독교는 지금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했건만, 우리의 기독교 역사가 바로 한국 과학 발달의 시작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기독교 지도자들은 망각한 모양이다. 연세대와 기독교계의 과학사 연구에 대한 무관심은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는다.
언더우드 일가는 한국 과학사에도 중요한 인물이다. 언더우드 1세는 1884년 미국 장로교의 파견 선교사로 12월16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85년 1월25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지만, 갑신정변의 후유증을 앓던 조선에 바로 들어오지 못했다. 대신 일본에서 헵번 목사 집에 기거하면서 이수정에게서 2개월 동안 한국어를 배운 뒤 그해 4월5일에야 조선 땅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첫 근대병원이자 의학교육 기관이기도 한 광혜원(廣惠院)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면서 선교사인 동시에 과학교사 역할을 수행했다.
또 대학 설립을 희망하여 1915년 서울 종로의 YMCA 회관에서 선교단체와 연합하여 60여명 학생으로 경신(儆新)학교 대학부를 설립했다. 이것이 바로 연희전문(延禧專門)의 출발점이며 오늘의 연세대학교로 발전했다. 당시 연희전문은 문과 상과 농과 신과 수물과(數物科) 화학과의 6개 학부를 허가받았으나, 실제 개교시에는 문과 상과 수물과 3과로 출발했다. 여기 수물과가 바로 한국 역사에서 최초의 대학 자연과학 학과인 셈이다.
실제로 수물과는 훗날 한국 과학을 이끌어갈 주역들을 다수 배출했다. 한국 최초의 천문학 박사로 초대 관상대장을 지낸 이원철(李源喆ㆍ 1896~1963) 박사와 한국 최초의 물리학 박사로 서울대 총장(1951)과 문교부 장관(1956)을 한 최규남(崔奎南ㆍ1898~1992) 박사가 모두 연희전문 출신이다.
이원철 박사는 1919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하여 26년 한국인 최초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최규남 박사는 26년 연희를 졸업하고 32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들은 모두 미시간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연희전문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루퍼스 교수 덕택이다. 짧은 글로 한국 과학사에 미친 연희전문 수물과의 역사를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실로 한국 근대과학의 남상(濫觴)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서울에서 태어난 언더우드 2세인 원한경(元漢慶ㆍHorace Horton Underwoodㆍ1890~1951) 박사는 1933년 연희전문 제3대 교장이 되어 학교를 더욱 발전시켰고 왕립아시아학회(Royal Asiatic Society)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한국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특히 학회지 한 권을 차지하며 34년에 발표된 논문 ‘한국의 배(Korean Boats and Ships)’는 지금도 한국 선박사 연구에 좋은 참고자료로 남아 있다.
연희전문은 한국 과학사의 개척지였다. 그런데도 안타깝게 오늘의 연세대는 한국 근대과학사의 개척자인 언더우드를 비롯한 많은 선교사들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 한국의 기독교는 지금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했건만, 우리의 기독교 역사가 바로 한국 과학 발달의 시작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기독교 지도자들은 망각한 모양이다. 연세대와 기독교계의 과학사 연구에 대한 무관심은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