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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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 모이는 ‘조리혈’ 자손 번성

  • 김두규/ 우석대 교수 dgkim@core.woosuk.ac.kr

    입력2003-07-10 14: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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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물 모이는 ‘조리혈’  자손 번성

    500년 된 하병수 옹의 고가(古家). 하병수 옹 집안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제사용 수저(작은 사진).

    경남 창녕읍 술정동에는 지은 지 500년이 됐지만 옛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초옥(草屋)이 있다. 현재 하병수 옹(河丙洙·84)이 거주하고 있는 이 초가집은 하옹의 16대 조상 하자연(河自淵)이 지은 집이다.

    하자연이 이곳에 터를 잡은 내력이 흥미롭다. 무오사화(1498)에 연루돼 귀양을 간 그의 윗대 조상이 귀양지인 경상도 영천에서 병사하자 하자연은 초상을 치른 뒤 1506년 가족을 이끌고 고향인 진주로 낙향했다. 당시에는 영천에서 진주로 가려면 청도와 창녕을 거쳐야 했는데 하자연과 그 가족이 창녕에 도착했을 무렵 날이 저물어 대충 자리를 잡고 야숙(野宿)을 해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야숙지 뒤에는 반달 모양의 구릉(丘陵)이 둘러처져 있고 그 위에는 큰 당산나무가 서 있었으며 앞에는 넓은 논밭이 펼쳐져 있어 터가 아주 좋아 보였다. 게다가 이곳에는 동족인 하(河)씨들이 살고 있었다. 하자연은 즉시 이 땅을 사 집을 지었는데, 이때가 1507년이다.

    그로부터 몇 십년 후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이 집에 들렀다가 뒤에 있는 정자를 보고 술정기(述亭記)를 지었는데, 그 후 이곳 지명이 ‘술정리’가 됐다.

    이 집은 다른 집과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집을 지을 때 못을 전혀 쓰지 않았다. 둘째, 일반 집들은 지붕과 서까래 사이에 나뭇개비 혹은 수수깡을 엮어 올리고 그 위에 ‘알매’라고 하는 흙을 바르는데 이 집은 흙을 바르지 않았다. 셋째, 마루 윗부분만 대패로 반듯하게 하고 아래는 통나무를 그대로 살렸다. 넷째, 초가지붕은 볏짚이 아니라 그곳에서 멀지 않은 우포늪에서 가져온 억새로 이었다. 지금도 그 전통이 고스란히 이어져 내려와 10년에 한 번씩 우포늪에서 가져온 억새로 지붕을 새로 하고 있다.



    하자연이 터를 잡은 뒤 자손이 한창 번성하던 중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하자연 후손들이 화왕산에 있는 큰 굴에서 9년간 피난생활을 하다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주변에 있던 집들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잡초만 무성하였는데 유독 이 집만은 그대로 있었다.

    그 후 부분적으로 기둥이나 지붕을 갈기는 했지만 하자연이 지은 집은 지금까지 500년 동안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하자연의 후손들은 이렇게 오랜 세월 집이 온전하게 보전되는 것이 집터가 명당이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대개 한반도의 집들이 나무나 풀로 지은 것이 많기 때문에 화재에 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 집이 몇 백년 동안 화재를 피해서 살아남기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곳 터는 화기(火氣)를 제압할 만한 적절한 수기(水氣)가 있다고 한다. 하병수 옹은 “이 집이 화왕산의 끝자락에 위치한 덕분에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수기가 강해서 화재를 만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이곳 터는 풍수상 ‘조리혈’이라고 한다. 조리는 쌀을 이는 데 사용하는 도구로 이러한 형태의 터에 자리를 잡으면 많은 재물이 모여 집안이 번성한다고 한다.

    명당에 터를 잡은 덕에 발복하는 것일까? 초옥이 500년 동안이나 그대로 보존되어오는 것만도 신기할 노릇인데, 현재 하자연의 후손 약 400세대가 서울 창녕 대구 등지에서 잘살고 있다고 한다.



    실전 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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