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 처음으로 김미경씨(45)의 전화를 받았다. ‘주간동아’에 실린 ‘그리운 얼굴 찾기’ 캠페인 기사를 읽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미국으로 떠난 지 20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는 오빠 김진식씨(53)를 찾아달라고 울먹였다. 헤어지게 된 사연을 정리해서 인적사항과 함께 이메일로 신청하라고 설명했지만 직접 만나야 한다며 막무가내였다.
1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김미경씨와 대한항공 기장인 남편 김용배씨(54), 아들을 찾는 김명수 할아버지(80)까지 세 명이 도착했다. 김용배씨는 비행중 ‘주간동아’ 캠페인을 접하고 드디어 처남을 찾을 방법이 생겼다며 책을 들고 한달음에 집으로 왔었다고 한다. 김진식씨의 호적등본, 1983년까지 보낸 편지들, 결혼사진 등 가족들은 이미 모든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
팔순 부친 아들 상봉 학수고대
김할아버지의 2남4녀 중 장남인 진식씨는 1982년 미군 린다 리처드슨씨와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듬해까지 편지 왕래가 있었지만 곧 이사한다는 소식을 끝으로 연락이 두절됐다. 진식씨가 동생 국식씨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는 군인인 아내가 독일로 파견될 것 같으나 자신은 미국에 남을 계획이라고 적혀 있었다. 가족들은 이 무렵 이미 진식씨가 이혼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사연을 설명하면서 20년 동안 아들이 살아 있기만 바라며 버텨온 김할아버지는 어느새 눈시울을 적셨고, 미경씨도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 “운이 따르면 하루 만에도 찾는다. 최고의 새해 선물을 받을지도 모른다”며 가족들을 위로했다. 사실 진식씨가 신분이 확실한 미국 여성과 결혼했고 영문이름, 전 주소지, 생년월일 등 비교적 자세한 인적사항이 있었기 때문에 전례에 비추어 찾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곧 시카고의 강효흔 탐정과 연락을 취해 사연을 정식으로 접수했다. 그 사이 강탐정은 프랑스에 사는 박인혜씨가 신청한 15년 전 헤어진 친구 이혜정씨를 찾는 데 성공해 한국-미국 ‘그리운 얼굴 찾기’ 무료 캠페인은 드디어 10회를 채웠다.
하지만 박인혜씨에 이어 열한 번째 행운의 주인공을 찾는다는 기사가 나간 후 8개월이 넘도록 김진식씨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다. 강탐정은 주민 데이터베이스를 샅샅이 뒤지고 20년 전 주소지를 찾아가보았으나 김씨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김씨가 미국식 이름으로 바꾸었다면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찾는 것, 그야말로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였다.
2차로 강탐정은 이혼한 부인 린다 김씨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시카고에서 불과 3시간 거리에 살고 있는 린다씨의 주소를 알아내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으나 답변이 오지 않았다. 린다씨는 전 남편을 찾는 일에 협조할 뜻이 없는 듯했다. 캠페인은 벽에 부딪혔고 시간만 흐르자 강탐정은 이쯤에서 포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김진식씨의 가족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미경씨는 거의 매일같이 주간동아와 강탐정에게 전화를 걸어와 “노부의 마지막 소원을 풀어달라”고 애원했다. 직접 시카고로 찾아가겠다는 의욕도 보였다. 차마 포기하라는 말을 할 수 없었던 강탐정은 “찾아보겠다” “노력하겠다”는 답변을 거듭하면서 “가능성이 없는데 가족들에게 희망을 남겨놓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라며 직업적인 고뇌에 빠지기도 했다.
그가 마지막 희망을 건 것은 탐정정보네트워크. 미국의 탐정들은 분야별로 정보네트워크를 만들어 은밀히 도움을 주고받는다. 얼마나 많은 네트워크를 확보하느냐가 탐정의 능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네트워크의 도움을 받으면 그 이상으로 갚아야 하기 때문에 웬만한 일이 아니면 네트워크에 올리지 않는다. 강탐정은 “김씨 가족을 돕기로 마음먹은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8월 중순 네트워크에 김진식씨의 사연을 올리고 협조를 요청했다”고 했다.
며칠 후 네트워크의 한 탐정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LA에 살고 있는 피터 김이라는 사람이 생년월일이 같고 예전에 사용하던 이름이 김진식이라고 했다. 강탐정은 곧바로 한국의 김미경씨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미경씨는 큰언니 복덕씨(56)에게, 복덕씨는 다시 LA에 유학중인 아들 박용진씨(29)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족 이름조차 정확히 기억 못해
용진씨는 연락을 받자마자 빛 바랜 외삼촌의 사진을 들고 주소지로 달려갔다. 이웃으로부터 틀림없다는 확인을 받고는 그날 수업도 빼먹고 종일 집 앞에 앉아 외삼촌의 귀가를 기다렸다.
감격의 만남은 눈물바다가 아니라 당혹감과 의심으로 시작됐다. 낯선 이의 출현에 놀란 김진식씨는 조카의 입에서 나오는 가족들의 이름조차 기억해내지 못했다. 조카의 손에 들린 자신의 사진과 결코 낯설지 않은 이름들 속에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김씨는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돼 아내와 이혼하고 줄곧 혼자 살았다. 게다가 1995년 급성뇌종양으로 뇌의 일부를 떼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잦은 코피와 구토 증세로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위급한 상황이어서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목숨마저 위태로웠다.
수술대 위에 누운 후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1년이 지나 있었다. 퇴원은 했지만 그는 부분기억상실증으로 고생했다. 특히 95년을 전후로 7년간은 완전 기억의 공백 상태였다. 그런 몸으로 세탁소 일을 하며 홀로 살아온 김씨에게 갑작스러운 가족의 출현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1년 반 정도 가족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이즈음 그조차도 포기한 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한국의 김씨 가족은 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복덕, 덕자, 미경씨 세 자매는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용진씨로부터 “삼촌이 맞다”는 확인전화를 받자마자 곧바로 LA행 비행기를 탔다. 8월21일 LA에 불쑥 나타난 세 자매를 보고 진식씨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이렇게 하루면 올 수 있는 거리에 살면서 20년이 넘도록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억울할 뿐이었다.
미경씨는 “우리 부부는 기회만 나면 미국에 가서 오빠 소식을 수소문했다. LA 한인 타운을 지날 때 거지가 보이면 혹시라도 오빠가 아닐까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다. 전화번호부를 뒤져 김진식이라는 이름을 찾는 무모한 짓도 해보았고 미국 정부기관의 고위관료에게 부탁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해도 찾을 수 없던 오빠가 살아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미국에 머문 4박5일 동안 김진식씨는 꼬박꼬박 누이들의 아침을 챙겨주었다. “가족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해보는 게 소원이었다”는 말에 누이들은 또 눈물을 찍어냈다.
추석 때 진식씨가 한국을 방문하기로 하고 누이들은 먼저 귀국했다. 다음은 연로하신 아버지에게 이 소식을 알리는 일만 남았다. 자녀들은 청심환부터 꺼내놓고 아버지에게 장남의 생존 소식을 전했다. 김명수 할아버지는 하얗게 머리가 센 아들의 사진을 쥐고 셔츠 앞자락이 다 젖도록 울었다. 아들 소식을 기다리다 끝내 눈도 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아내의 얼굴을 떠올렸을 것이다.
한국-미국 ‘그리운 얼굴 찾기’ 무료 캠페인 열한 번째 사연도 절망 속에서 희망을 건져올리며 그렇게 종결지어졌다.
1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김미경씨와 대한항공 기장인 남편 김용배씨(54), 아들을 찾는 김명수 할아버지(80)까지 세 명이 도착했다. 김용배씨는 비행중 ‘주간동아’ 캠페인을 접하고 드디어 처남을 찾을 방법이 생겼다며 책을 들고 한달음에 집으로 왔었다고 한다. 김진식씨의 호적등본, 1983년까지 보낸 편지들, 결혼사진 등 가족들은 이미 모든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
팔순 부친 아들 상봉 학수고대
김할아버지의 2남4녀 중 장남인 진식씨는 1982년 미군 린다 리처드슨씨와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듬해까지 편지 왕래가 있었지만 곧 이사한다는 소식을 끝으로 연락이 두절됐다. 진식씨가 동생 국식씨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는 군인인 아내가 독일로 파견될 것 같으나 자신은 미국에 남을 계획이라고 적혀 있었다. 가족들은 이 무렵 이미 진식씨가 이혼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사연을 설명하면서 20년 동안 아들이 살아 있기만 바라며 버텨온 김할아버지는 어느새 눈시울을 적셨고, 미경씨도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 “운이 따르면 하루 만에도 찾는다. 최고의 새해 선물을 받을지도 모른다”며 가족들을 위로했다. 사실 진식씨가 신분이 확실한 미국 여성과 결혼했고 영문이름, 전 주소지, 생년월일 등 비교적 자세한 인적사항이 있었기 때문에 전례에 비추어 찾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곧 시카고의 강효흔 탐정과 연락을 취해 사연을 정식으로 접수했다. 그 사이 강탐정은 프랑스에 사는 박인혜씨가 신청한 15년 전 헤어진 친구 이혜정씨를 찾는 데 성공해 한국-미국 ‘그리운 얼굴 찾기’ 무료 캠페인은 드디어 10회를 채웠다.
하지만 박인혜씨에 이어 열한 번째 행운의 주인공을 찾는다는 기사가 나간 후 8개월이 넘도록 김진식씨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다. 강탐정은 주민 데이터베이스를 샅샅이 뒤지고 20년 전 주소지를 찾아가보았으나 김씨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김씨가 미국식 이름으로 바꾸었다면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찾는 것, 그야말로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였다.
2차로 강탐정은 이혼한 부인 린다 김씨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시카고에서 불과 3시간 거리에 살고 있는 린다씨의 주소를 알아내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으나 답변이 오지 않았다. 린다씨는 전 남편을 찾는 일에 협조할 뜻이 없는 듯했다. 캠페인은 벽에 부딪혔고 시간만 흐르자 강탐정은 이쯤에서 포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김진식씨의 가족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미경씨는 거의 매일같이 주간동아와 강탐정에게 전화를 걸어와 “노부의 마지막 소원을 풀어달라”고 애원했다. 직접 시카고로 찾아가겠다는 의욕도 보였다. 차마 포기하라는 말을 할 수 없었던 강탐정은 “찾아보겠다” “노력하겠다”는 답변을 거듭하면서 “가능성이 없는데 가족들에게 희망을 남겨놓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라며 직업적인 고뇌에 빠지기도 했다.
그가 마지막 희망을 건 것은 탐정정보네트워크. 미국의 탐정들은 분야별로 정보네트워크를 만들어 은밀히 도움을 주고받는다. 얼마나 많은 네트워크를 확보하느냐가 탐정의 능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네트워크의 도움을 받으면 그 이상으로 갚아야 하기 때문에 웬만한 일이 아니면 네트워크에 올리지 않는다. 강탐정은 “김씨 가족을 돕기로 마음먹은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8월 중순 네트워크에 김진식씨의 사연을 올리고 협조를 요청했다”고 했다.
며칠 후 네트워크의 한 탐정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LA에 살고 있는 피터 김이라는 사람이 생년월일이 같고 예전에 사용하던 이름이 김진식이라고 했다. 강탐정은 곧바로 한국의 김미경씨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미경씨는 큰언니 복덕씨(56)에게, 복덕씨는 다시 LA에 유학중인 아들 박용진씨(29)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족 이름조차 정확히 기억 못해
용진씨는 연락을 받자마자 빛 바랜 외삼촌의 사진을 들고 주소지로 달려갔다. 이웃으로부터 틀림없다는 확인을 받고는 그날 수업도 빼먹고 종일 집 앞에 앉아 외삼촌의 귀가를 기다렸다.
감격의 만남은 눈물바다가 아니라 당혹감과 의심으로 시작됐다. 낯선 이의 출현에 놀란 김진식씨는 조카의 입에서 나오는 가족들의 이름조차 기억해내지 못했다. 조카의 손에 들린 자신의 사진과 결코 낯설지 않은 이름들 속에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김씨는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돼 아내와 이혼하고 줄곧 혼자 살았다. 게다가 1995년 급성뇌종양으로 뇌의 일부를 떼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잦은 코피와 구토 증세로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위급한 상황이어서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목숨마저 위태로웠다.
수술대 위에 누운 후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1년이 지나 있었다. 퇴원은 했지만 그는 부분기억상실증으로 고생했다. 특히 95년을 전후로 7년간은 완전 기억의 공백 상태였다. 그런 몸으로 세탁소 일을 하며 홀로 살아온 김씨에게 갑작스러운 가족의 출현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1년 반 정도 가족의 이름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이즈음 그조차도 포기한 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한국의 김씨 가족은 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복덕, 덕자, 미경씨 세 자매는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용진씨로부터 “삼촌이 맞다”는 확인전화를 받자마자 곧바로 LA행 비행기를 탔다. 8월21일 LA에 불쑥 나타난 세 자매를 보고 진식씨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이렇게 하루면 올 수 있는 거리에 살면서 20년이 넘도록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억울할 뿐이었다.
미경씨는 “우리 부부는 기회만 나면 미국에 가서 오빠 소식을 수소문했다. LA 한인 타운을 지날 때 거지가 보이면 혹시라도 오빠가 아닐까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다. 전화번호부를 뒤져 김진식이라는 이름을 찾는 무모한 짓도 해보았고 미국 정부기관의 고위관료에게 부탁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해도 찾을 수 없던 오빠가 살아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미국에 머문 4박5일 동안 김진식씨는 꼬박꼬박 누이들의 아침을 챙겨주었다. “가족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해보는 게 소원이었다”는 말에 누이들은 또 눈물을 찍어냈다.
추석 때 진식씨가 한국을 방문하기로 하고 누이들은 먼저 귀국했다. 다음은 연로하신 아버지에게 이 소식을 알리는 일만 남았다. 자녀들은 청심환부터 꺼내놓고 아버지에게 장남의 생존 소식을 전했다. 김명수 할아버지는 하얗게 머리가 센 아들의 사진을 쥐고 셔츠 앞자락이 다 젖도록 울었다. 아들 소식을 기다리다 끝내 눈도 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아내의 얼굴을 떠올렸을 것이다.
한국-미국 ‘그리운 얼굴 찾기’ 무료 캠페인 열한 번째 사연도 절망 속에서 희망을 건져올리며 그렇게 종결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