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을 주도해 옥고를 치른 바 있는 문부식씨는 당시의 운동권 상황을 해부하면서, ‘우리 안의 폭력을 제대로 성찰할 때 국가의 폭력도 제대로 성찰할 수 있다’는 화두를 던짐으로써 뜨거운 논쟁을 불러왔다. 논란의 핵심은 다음 몇 가지로 압축된다.
민중을 학살하고 권력을 찬탈했던 독재자와 그 일당들은 반성하는 낌새조차 없는데 왜 그에 대항해 싸웠던 사람들이 먼저 반성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군사독재와 유착해 ‘겨울 공화국’아래서 오히려 번영을 구가했다는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성찰을 촉구함으로써 그런 세력들의 ‘역사 물타기 작전’에 봉사하는 것 아닌가? 독재권력에 대한 대중들의 자발적 협력 메커니즘과 우리 안의 권력숭배 경향에 대한 분석에 치우침으로써 막강한 보수반동세력을 오히려 도와주는 것 아닌가?
“자기반성이건 사회적 요구이건 성찰은 계속되어야”
그 기초 위에서 문부식의 ‘우리 안의 파시즘론’은 사회적 성찰보다 내면적 성찰을 앞세우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종교적 근본주의’라고 비판받았다. 모두가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는 식의 논법은 위험한 ‘정치적 허무주의’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조용히 해야 할 자기성찰을 소란스럽게 너무 큰소리로 외치지 말자’는 동료들의 당부도 이어졌다.
이런 고언들에 일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발언은 현실적 파장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학문적 잣대로 판단할 때, 하나의 이론으로서 개진된 ‘일상적 파시즘론’이 엄밀한 정당화 근거를 결여하고 있다는 큰 약점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이론의 뼈대는, 한국 사회에서도 구체화되고 있는 복잡한 현실에 대한 복합적 대응이라는 다원적 사회진화의 소산이다. 모든 종류의 근본주의에 대한 회의가 그 바탕을 이룬다. 단순 기준으로 세상을 나누고 선악의 극단적 이분법으로 대상을 판단하는 태도, 그리고 모든 문제를 근원적이고 전면적인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근본주의라고 부른다면, 문부식씨의 주장보다 근본주의로부터 먼 것은 없다. 따라서 그에 대해 종교적 근본주의 운운하는 것은 피상적 독해의 전형을 보여주는 근본적(?) 오독에 불과하다.
우리 안의 폭력을 성찰해야 국가폭력도 제대로 다룰 수 있다는 주장이 정치적 허무주의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이 주장이 만약 논리적 선후 관계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안의 파시즘론에서 건질 수 있는 핵심적 통찰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국가폭력 비판과 함께 일상의 공간에 넓고 깊게 스며 있는 폭력에 대한 비판적 감수성도 필수적이라는 데 있다.
그렇다면 국가 파시즘 비판과 일상적 파시즘에 대한 비판은 서로 제로섬 관계가 아니라 경쟁적 협업관계인 것이다. 이 협력관계를 어떻게 생산적으로 발전시키느냐 하는 것이 한국 지식사회의 중요한 과제다. 그 결과에 따라 우리들의 정치적 실천능력이 크게 높아지고, 우리 사회가 좀더 살 만한 곳이 될 수 있다.
성찰은 그것이 자기반성이 됐건 사회적 성찰에의 요구가 됐건 더 활발해져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아직도 엄청난 편견과 허위의식, 부정과 부패, 억압과 차별이 횡행하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들춰내고 고발하며 고치고 다시 짓는 작업은 생각하고 실행할 수 있는 모든 수준에서 끊임없이 장려되어야 한다.
반성 없는 사회, 성찰이 부족한 역사는 반성과 성찰이 논의되고 실천됨으로써만 비로소 바뀌어질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따른다. 더 무겁고 많은 과오를 범한 집단과 세력들에게 책임을 엄중히 따져 묻는 작업과, 우리 안의 폭력을 극복하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지는 매우 넓게 열려 있다. 그 선택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도, 성찰은 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다.
민중을 학살하고 권력을 찬탈했던 독재자와 그 일당들은 반성하는 낌새조차 없는데 왜 그에 대항해 싸웠던 사람들이 먼저 반성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군사독재와 유착해 ‘겨울 공화국’아래서 오히려 번영을 구가했다는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성찰을 촉구함으로써 그런 세력들의 ‘역사 물타기 작전’에 봉사하는 것 아닌가? 독재권력에 대한 대중들의 자발적 협력 메커니즘과 우리 안의 권력숭배 경향에 대한 분석에 치우침으로써 막강한 보수반동세력을 오히려 도와주는 것 아닌가?
“자기반성이건 사회적 요구이건 성찰은 계속되어야”
그 기초 위에서 문부식의 ‘우리 안의 파시즘론’은 사회적 성찰보다 내면적 성찰을 앞세우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종교적 근본주의’라고 비판받았다. 모두가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는 식의 논법은 위험한 ‘정치적 허무주의’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조용히 해야 할 자기성찰을 소란스럽게 너무 큰소리로 외치지 말자’는 동료들의 당부도 이어졌다.
이런 고언들에 일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발언은 현실적 파장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학문적 잣대로 판단할 때, 하나의 이론으로서 개진된 ‘일상적 파시즘론’이 엄밀한 정당화 근거를 결여하고 있다는 큰 약점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이론의 뼈대는, 한국 사회에서도 구체화되고 있는 복잡한 현실에 대한 복합적 대응이라는 다원적 사회진화의 소산이다. 모든 종류의 근본주의에 대한 회의가 그 바탕을 이룬다. 단순 기준으로 세상을 나누고 선악의 극단적 이분법으로 대상을 판단하는 태도, 그리고 모든 문제를 근원적이고 전면적인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근본주의라고 부른다면, 문부식씨의 주장보다 근본주의로부터 먼 것은 없다. 따라서 그에 대해 종교적 근본주의 운운하는 것은 피상적 독해의 전형을 보여주는 근본적(?) 오독에 불과하다.
우리 안의 폭력을 성찰해야 국가폭력도 제대로 다룰 수 있다는 주장이 정치적 허무주의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이 주장이 만약 논리적 선후 관계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안의 파시즘론에서 건질 수 있는 핵심적 통찰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 국가폭력 비판과 함께 일상의 공간에 넓고 깊게 스며 있는 폭력에 대한 비판적 감수성도 필수적이라는 데 있다.
그렇다면 국가 파시즘 비판과 일상적 파시즘에 대한 비판은 서로 제로섬 관계가 아니라 경쟁적 협업관계인 것이다. 이 협력관계를 어떻게 생산적으로 발전시키느냐 하는 것이 한국 지식사회의 중요한 과제다. 그 결과에 따라 우리들의 정치적 실천능력이 크게 높아지고, 우리 사회가 좀더 살 만한 곳이 될 수 있다.
성찰은 그것이 자기반성이 됐건 사회적 성찰에의 요구가 됐건 더 활발해져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아직도 엄청난 편견과 허위의식, 부정과 부패, 억압과 차별이 횡행하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들춰내고 고발하며 고치고 다시 짓는 작업은 생각하고 실행할 수 있는 모든 수준에서 끊임없이 장려되어야 한다.
반성 없는 사회, 성찰이 부족한 역사는 반성과 성찰이 논의되고 실천됨으로써만 비로소 바뀌어질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따른다. 더 무겁고 많은 과오를 범한 집단과 세력들에게 책임을 엄중히 따져 묻는 작업과, 우리 안의 폭력을 극복하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지는 매우 넓게 열려 있다. 그 선택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도, 성찰은 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