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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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의 오아시스’ 작은대학이 있네

순수 교양 고전 읽고 토론하며 진리 탐구… ‘참된 학문’ 나누는 대안대학 노릇 톡톡

  • < 송홍근 기자 > carrot@domga.com

    입력2004-10-14 1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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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성의 오아시스’ 작은대학이 있네
    ”전공 공부는 시험 때나 잠깐 하는 정도죠. 저 같은 인문학 전공자들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고시에 승부를 걸든지, 아니면 미치도록 영어 공부에 매달리든지. 전공을 살려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사람은 ‘정신 나간 놈’ 취급을 당하기 십상이죠.”(명문 K대 재학생 P씨)

    P 씨의 말처럼 대학이 ‘지성의 전당’에서 ‘취업학원’이나 ‘고시촌’으로 전락한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대학들이 영어회화, 컴퓨터 등 실용강의를 강화하면서 한국사 철학개론 등을 교양필수 과목에서 제외했고, 심지어 교양국어를 가르치지 않는 대학도 생겨났다.

    학생들의 ‘학문 편식’도 하루가 다르게 심해져 실용과목엔 수백명이 몰리는 반면, 진지한 성찰을 요구하는 교양과목은 개설돼 있다 하더라도 인원을 채우지 못해 폐강되거나 여러 단과대학 학생들을 모아 대형 강의로 진행되기 일쑤다.

    캠퍼스도 없고 전공도 없어

    이처럼 ‘기능인 양성소’로 변모한 대학과 대학문화에 정면으로 반기를 내걸고, 여전히 ‘지성의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대학’과 학생들이 있다. 서울 신촌에서 입학시험도, 교사(校舍)도 전공도 없이 교수와 학생들의 열정과 지적 욕구로만 꾸려지고 있는 ‘작은대학’(공동대표 정갑용 이홍균)과 고전(古典)에 목마른 이 대학 학생들이 바로 그 주인공.



    작은대학은 ‘대학 찾기’ ‘대학 높이기’ ‘대학 낮추기’를 설립 이념으로 삼고 있다. 지적 토론이 쏟아지는 대학의 참모습을 찾고, 비판적 지성으로 대학의 뜻을 높이고, 인류의 지적유산을 되새겨 삶의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밑거름이 되자는 의미다. 기술학문이 판치는 대학의 현실에서 작은대학은 ‘참된 학문’을 나누는 일종의 대안대학 노릇을 하고 있는 것.

    작은대학의 역사는 1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존의 대학들이 양적 팽창과 직업인 양성에 치중해 대학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을 개탄한 박영신(연세대 사회학과) 진덕규(이화여대 정외과) 교수 등 5명의 교수들이 91년 11월 ‘작은대학 운동 선언서’를 발표하고, “교수들과 학생들이 직접 고전을 읽고 그것에 대한 비판적 대화를 통해 한국 사회를 개혁해 나가자”며 ‘작은대학’의 출범을 세상에 알렸다.

    “당시 교수님들의 열정은 정말 대단했어요. 우리들도 마찬가지였고요. 수업을 마치고 밥자리 술자리에서도 그날 읽은 고전에 대해 토론하곤 했으니까요. 토론 문화가 척박한 한국 사회에서 작은대학은 일종의 오아시스 노릇을 했습니다. 내용을 파악하기도 힘든 책들이었지만 한 권 한 권 읽어가면서 느낀 뿌듯함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93년 6월 작은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1기 졸업생 류정아씨의 말이다.

    ‘지성의 오아시스’ 작은대학이 있네
    1기 졸업생 중엔 ‘모교’ 교수가 돼 후배들을 가르치는 사람도 있다.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이황직 박사(33)가 그 주인공. 이박사는 현재 작은대학의 ‘큰 기둥’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은대학의 모든 직책은 순우리말로 만들어져 있는데 총장은 대들보, 큰 기둥은 지도교수, 중간 대들보는 동창회장, 작은 기둥은 학생들이다. 이박사는 “총장이니 지도교수니 하는 말에는 권위의식이 내재돼 있다”며 “학생과 교수들이 서로 수평적인 관계가 되고자 우리말 호칭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작은대학에서는 1년 동안 20권의 책을 읽고 20개의 ‘쪽글’(보고서)을 제출하면 ‘마친 보람’이란 이름의 학위를 받는다. 언뜻 졸업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어 보이지만, 필독서 명단에 오른 책들은 모두가 녹록치 않은 것들. 플라톤의 ‘국가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같은 고전부터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롤스의 ‘사회정의론’ 같은 사회과학서, 노자의 ‘도덕경’ 헤겔의 ‘법철학’ 등 어렵기로 소문난 철학서들을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작은대학의 수업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을까. 7월8일 오후 연세대 위당관 303호. 토론을 벌이는 대학생들의 열기로 강의실이 후끈하다. 작은대학 17, 18기 학생 10여명과 김형철 교수(연세대 철학과)가 J.S 밀의 ‘자유론’에 담긴 철학의 현대적 의미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고전을 저마다의 논리로 해석해 온 학생들의 논리엔 빈틈이 없다.

    “문명은 무엇을 말하는가? 문명이 야만보다 나은 것이라는 판단은 문명과 야만 모두가 합의한 것인가, 아니면 문명 혼자 내린 독단인가?”(윤석민씨 · 연세대 1학년·작은대학 18기)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권력관계가 개입된 경우에도 평범한 사람들이 언론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그렇다면 밀의 주장은 보충해야 할 필요가 있다.”(장진혁씨·서울대 석사과정·작은대학 17기)

    돈이 안 되는 책 귀중한 가치 발견

    학생들의 토론을 듣고 있던 김교수는 가끔씩 보충설명을 해줄 뿐 수업에 자주 끼어들지 않았다. 학생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다. 작은대학 정갑영 공동대표는 “학생들은 고전 읽기를 통해 학문하는 사람의 기본 자세를 배우고 토론을 통해 다양한 시각을 접함으로써 판단능력을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돈이 되지 않는 책들이지만 학생들은 ‘고전 읽기’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 있는 공부라고 입을 모은다. 고전을 읽는 게 쉽지 않지만 읽었을 때의 성취감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이다.

    “대학에 입학해서 실망을 많이 했어요. 고등학교의 주입식 교육과 별반 다르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이곳에서 고전을 읽으면서 살아가는 지혜,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윤석민씨·연세대 1학년 ·작은대학 18기)

    “수백명이 듣는 교양강의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비록 한 달에 두 번밖에 안 되지만 작은대학에서 책을 읽고 서로 토론하면서 ‘앎’을 실현하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입니다.”(김시형씨·이화여대 3학년·작은대학 18기)

    작은대학 학생들은 기능인(技能人)이 아닌 지성인(知性人)이 되기 위해 난해한 고전을 읽고, 자유롭고 비판적인 담론을 함께 나누며 앎을 실현하고 있다. 작은대학 대들보 박영신 교수는 “한국에 제대로 된 대학이 있다면 작은대학은 필요 없다”고 말한다. 대학이 대학 본연의 목적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고전을 통한 살아 있는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대학 바로 세우기’에 나선 작은대학 교수들과 학생들. 시대의 흐름과 동떨어진 듯 보이는 이들의 노력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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