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할 수 있다.” 오랜만에 ‘흑백사진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보자. 5공 말기인 1986년은 문익환목사가 5·3인천사태 배후조종자로 구속되고, 유성환의원(당시 신민당)은 국시(國是) 발언으로 구속되는 등 시끄러웠다. 또한 운동권 학생들은 건국대에 모여 민주화와 함께 반미 구호를 외침으로써, 국내 정치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이러한 86년을 보내고 87년 새해를 맞이한 직후의 일이다.
87년 1월8일 도하 언론은 ‘홍콩 교민, 납북 도중 극적 탈출’이란 제목의 기사를 쏟아냈다. 기사 내용은 ‘서진통상 홍콩본부장 윤모씨(당시 28세)가 동거녀가 포함된 북한 공작원에게 유인돼 싱가포르 주재 북한대사관까지 갔다가,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으로 탈출했다’며 ‘북괴가 윤씨를 납치하기 위해 동거녀를 이용한 미인계를 구사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언론에 보도된 북한 공작조직의 윤씨 납치시도 경위는 이러했다.
외무부-안기부 설명 달라 아리송
‘87년 1월2일 윤씨가 김옥분(당시 34세·일명 수지 김) 여인과 동거하는 홍콩의 한 아파트로 조총련계 한국인 남자 두 명이 찾아왔다. 이들은 김여인에게 빌려준 돈 4000만원을 내놓으라고 따지다가 윤씨에게 음료수와 담배를 사오라고 시켰다. 윤씨가 담배를 사가지고 왔을 때 세 사람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음날 조총련계 사람 한 명이 윤씨를 찾아와 “김여인이 부채를 갚지 못해 싱가포르로 데려갔으니, 당신이 싱가포르에 와서 대신 부채를 갚겠다는 각서를 쓰고 부인을 데려가라”고 했다. 1월4일 오후 윤씨가 싱가포르에 도착하자, 김여인의 친구라는 여인이 피켓을 들고 마중나와서 샹그릴라호텔로 안내했다. 다음날 이 여인이 호텔로 찾아와 ‘포트빌 포트가(街) 19번지’라고 쓰인 쪽지를 주며 찾아가라고 해 가보니, 북한대사관이었다. 윤씨가 북한대사관으로 들어가지 않고 망설이자 안에서 그 여인이 나타나 들어오라고 해 들어갔다. 그래서 리창용이라는 북한대사 대리를 만났는데 리창용은 이렇게 협박했다.
“부인을 만나려면 평양에 가야 한다. 그 전에 당신은 유고를 경유해 스위스로 가서 ‘나는 서울에서 사업을 하며 문익환목사와 유성환의원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그런데 검찰이 두 사람을 구속하고 신상옥-최은희는 남조선에서 살해됐다’고 밝혀라. 우리의 말을 듣지 않으면 부인은 만날 수 없고, 서울에 있는 당신 가족도 죽는다. 탈출할 생각은 아예 말라.”
다음날 숙소를 콕피트호텔로 옮긴 윤씨는 리창용과 함께 유고행 비행기를 예약하러 여행사에 갔으나 표가 없어 호텔로 되돌아왔다. 그러다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호텔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한국대사관으로 탈출했다.’
이러한 보도가 나오도록 자료를 돌린 곳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안기부였다. 그러나 당시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에 근무한 외무부 직원들은 전혀 다른 판단을 했다. 한 관계자는 “당시 언론은 윤씨가 북한대사관 직원에게 잡혀 있다가 바로 우리 대사관으로 탈출한 것으로 보도했지만, 사실은 미국대사관을 거쳐서 왔다. 1월5일 싱가포르 주재 미국대사관에서 ‘북한대사관을 탈출했다는 한국인이 와있다’고 연락해줘서 우리가 가서 윤씨를 데리고 왔다”고 말했다.
당시 다각도로 윤씨를 신문했던 외무부 직원들은 “윤씨가 북한대사관에 간 것은 사실인 것 같은데, 진술이 횡설수설이었다”고 기억한다. 윤씨의 여권에는 1월4일 홍콩을 떠난 출국 도장과는 별도로, 1월3일 홍콩을 출국했다 다시 입국한 도장이 찍혀 있었다. 왜 윤씨는 그런 행동을 했을까. 윤씨의 설명은 이러했다고 한다.
“원래는 1월3일 싱가포르로 가기 위해 홍콩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밟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런데 비행기 고장으로 출발이 하루 늦어져 다시 입국함으로써 입국 도장을 찍게 되었다. 그날 나는 항공사에서 잡아준 호텔에서 자고 다음날인 1월4일 싱가포르에 왔다.”
외무부 직원들은 “비행기 출발이 늦춰졌으면 집에 가서 자지, 왜 호텔에서 잤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윤씨는 “아내를 데려간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올지 몰라 호텔에서 잤다”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외무부 직원들이 “연락이 집으로 가지 어떻게 호텔로 가겠는가”고 묻자, 윤씨는 “연락은 호텔로 오게 돼 있었다”고 우겼다고 한다.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외무부 직원들은 윤씨의 주장을 신뢰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안기부는 윤씨 주장을 신뢰했다. 윤씨 사건을 키워야겠다고 판단한 안기부는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에 “각 언론사로 하여금 싱가포르로 기자를 보내게 할 테니, 윤씨의 기자회견을 준비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이에 대해 외무부 직원들은 ‘안기부가 외무부 직원에 대해 명령을 내릴 수 있는지 유권해석을 내려 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총무처로 보내면서까지 거세게 저항했다.
3일 동안 이러한 공방이 계속되자, 안기부는 윤씨를 태국으로 옮겨 기자회견을 갖게 했다. 이런 이유로 윤씨는 1월9일 방콕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그날로 서울에 와 또 기자회견을 했다. 이때 윤씨는 “살아서 돌아온 것이 꿈만 같다. 싱가포르에서 북한 공작원이 ‘돈을 갚지 않으면, 부인을 일본 술집에 팔아 넘기겠다’고 위협해서 북한 공작원을 따라 나서게 되었다”며 처음과는 다른 말을 했다. 그러나 주요 언론은 사설을 통해 북한의 윤씨 납치 미수를 비판했고, 한 신문은 윤씨의 수기를 게재하기도 했다.
그런데 윤씨가 귀국한지 18일째 되는 1월27일 ‘김여인이 윤씨와 동거한 아파트에서 목졸려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홍콩발 기사가 터져나왔다. 언론은 ‘김여인의 아파트에서 악취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홍콩 경찰이 문을 따고 들어가 보니, 김여인이 안방 침대 옆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감식 결과 김여인은 1월초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이것이 윤씨 사건에 관한 마지막 보도였다. 그러나 언론은 1월14일 발생한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보도에 매몰돼 윤씨 사건에서 눈을 돌렸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95년 기자는 충북 C시에 사는 김여인의 가족을 만나,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안기부에 의해 조총련계 공작원으로 지목됐던 김여인은 가난한 농부의 둘째딸로, 고향에서 초등학교만 겨우 나왔다. 그 뒤 서울로 올라와 시내버스 안내양으로 일하다 예쁜 얼굴 덕분에 술집 접대부가 됐는데, 이때 일본인의 현지처 노릇을 했다. 76년 김여인은 홍콩인 양청화(梁靑華)와 위장결혼하는 형식으로 홍콩에 건너가 접대부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다 민첩건축공사(敏捷建築公司) 전무인 홍콩인 오민명(吳敏明)의 ‘세컨드’가 돼 딸을 낳았다.
86년 여름 김여인은 이 딸을 데리고 고향집을 찾아와 아이를 맡긴 뒤 홍콩으로 돌아갔는데, 그해 10월 윤씨와 함께 다시 와서 “결혼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때 윤씨도 결혼한 적이 있는 듯 예닐곱살쯤 되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석달 뒤 윤씨 납북미수사건이 터지고, 이어 김여인이 교살된 시체로 발견됐다는 것이다.
김여인의 가족은 “솔직히 우리도 옥분이의 행적은 다 알지 못한다. 물론 옥분이가 일본인 현지처 노릇을 했고, 홍콩에서도 일본인을 상대했으니 일본인한테 생활비를 타쓴 적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총련 자금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윤씨 납북미수사건이 터진 직후 안기부 충북 분실에서 나와 우리 집을 다 뒤졌지만 간첩이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70대 노인이던 김여인의 노모는 안기부 분실에 불려가 상소리를 들어가며 조사받았다. 그러다 김여인이 변사체로 발견되자 집으로 돌아왔는데, 딸을 잃은 노모는 그 뒤 시름시름 앓다가 97년 세상을 떠났다.
김여인이 변사체로 발견된 뒤 안기부는 과연 적절한 후속 수사를 했을까. 김여인 가족은 “누가 옥분이를 죽였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과연 옥분이가 간첩이었는지는 명확히 밝혀 달라”고 요구했다. 김여인의 오빠는 “옥분이 시체가 발견된 뒤 홍콩경찰은 옥분이가 사귄 남자를 다 조사했다. 오민명도 조사받고 무혐의로 풀려난 뒤 이곳에 와서 딸을 데려갔는데, 당시 그는 ‘한국정부가 비자를 내주지 않아 이렇게 늦게 왔다’고 말했다. 왜 우리 정부는 이런 조사조차도 하지 않았는가”고 항의했다. 홍콩경찰은 우리 정부에 대해 윤씨를 조사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우리 정부는 협조해 주지 않았다. 이후 홍콩경찰은 김여인 피살사건에 대해 범인을 잡지 못한 ‘미제’(未濟)사건으로 넘겨 놓았다.
윤씨는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윤씨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김여인 변사문제로 안기부로부터 조사받은 흔적도 없다. 95년 기자는 윤씨가 서울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의 주소지로 찾아갔으나 마침 아파트 재개발을 위해 철거하고 난 다음이라 허탕을 쳤다.
당시 윤씨가 싱가포르 주재 북한대사관에 간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렇다면 윤씨는 과연 북한 공작원에 속아 북한대사관에 간 것일까. 김여인의 변사체가 발견된 뒤 언론은 윤씨가 김여인을 죽이고 싱가포르로 도주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제기했었다. 그게 맞는다면 윤씨는 납북이 아니라 자진 월북을 하려 했을 수도 있다. 안기부는 최소한 이에 대한 조사를 하고 윤씨를 풀어줬어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없다.
육군 대위로 전역한 윤씨는 홍콩산 비디오 수입업을 하기 위해 86년 7월 홍콩에 갔다가 여섯 살 연상의 김여인을 만나 동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10월 김여인과 함께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와 10월16일자로 혼인신고를 했다. 윤씨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87년 1월 귀국한 직후 윤씨는 “안기부 직원들로부터 일관된 진술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많이 맞았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왜 안기부는 윤씨에게 일관된 진술을 하라고 주먹질을 했을까. 그리고 김여인을 죽인 자는 과연 누구일까. 이 문제는 이미 13년이 지난 사건이므로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김여인이 조총련계 공작원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재조사를 해서, 공작원이 아니었다면 합당한 신원(伸寃)작업을 해줘야 한다.
당시 정치상황으로 볼 때 안기부는 공안정국 조성을 위해 윤씨사건이 진짜로 납북사건이기를 바랐을 수도 있다. 기자는 당시 안기부의 고위층이었던 인사들에게 윤씨사건에 대해 질의했으나 하나같이 대답을 피했다. 윤씨 납북미수사건을 키운 주체가 비록 5공의 안기부일지라도, 현 정부는 술집 접대부이자 무지한 농군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여인의 죽음을 내팽개쳐 두지 말고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용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87년 1월8일 도하 언론은 ‘홍콩 교민, 납북 도중 극적 탈출’이란 제목의 기사를 쏟아냈다. 기사 내용은 ‘서진통상 홍콩본부장 윤모씨(당시 28세)가 동거녀가 포함된 북한 공작원에게 유인돼 싱가포르 주재 북한대사관까지 갔다가,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으로 탈출했다’며 ‘북괴가 윤씨를 납치하기 위해 동거녀를 이용한 미인계를 구사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언론에 보도된 북한 공작조직의 윤씨 납치시도 경위는 이러했다.
외무부-안기부 설명 달라 아리송
‘87년 1월2일 윤씨가 김옥분(당시 34세·일명 수지 김) 여인과 동거하는 홍콩의 한 아파트로 조총련계 한국인 남자 두 명이 찾아왔다. 이들은 김여인에게 빌려준 돈 4000만원을 내놓으라고 따지다가 윤씨에게 음료수와 담배를 사오라고 시켰다. 윤씨가 담배를 사가지고 왔을 때 세 사람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음날 조총련계 사람 한 명이 윤씨를 찾아와 “김여인이 부채를 갚지 못해 싱가포르로 데려갔으니, 당신이 싱가포르에 와서 대신 부채를 갚겠다는 각서를 쓰고 부인을 데려가라”고 했다. 1월4일 오후 윤씨가 싱가포르에 도착하자, 김여인의 친구라는 여인이 피켓을 들고 마중나와서 샹그릴라호텔로 안내했다. 다음날 이 여인이 호텔로 찾아와 ‘포트빌 포트가(街) 19번지’라고 쓰인 쪽지를 주며 찾아가라고 해 가보니, 북한대사관이었다. 윤씨가 북한대사관으로 들어가지 않고 망설이자 안에서 그 여인이 나타나 들어오라고 해 들어갔다. 그래서 리창용이라는 북한대사 대리를 만났는데 리창용은 이렇게 협박했다.
“부인을 만나려면 평양에 가야 한다. 그 전에 당신은 유고를 경유해 스위스로 가서 ‘나는 서울에서 사업을 하며 문익환목사와 유성환의원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그런데 검찰이 두 사람을 구속하고 신상옥-최은희는 남조선에서 살해됐다’고 밝혀라. 우리의 말을 듣지 않으면 부인은 만날 수 없고, 서울에 있는 당신 가족도 죽는다. 탈출할 생각은 아예 말라.”
다음날 숙소를 콕피트호텔로 옮긴 윤씨는 리창용과 함께 유고행 비행기를 예약하러 여행사에 갔으나 표가 없어 호텔로 되돌아왔다. 그러다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호텔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한국대사관으로 탈출했다.’
이러한 보도가 나오도록 자료를 돌린 곳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안기부였다. 그러나 당시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에 근무한 외무부 직원들은 전혀 다른 판단을 했다. 한 관계자는 “당시 언론은 윤씨가 북한대사관 직원에게 잡혀 있다가 바로 우리 대사관으로 탈출한 것으로 보도했지만, 사실은 미국대사관을 거쳐서 왔다. 1월5일 싱가포르 주재 미국대사관에서 ‘북한대사관을 탈출했다는 한국인이 와있다’고 연락해줘서 우리가 가서 윤씨를 데리고 왔다”고 말했다.
당시 다각도로 윤씨를 신문했던 외무부 직원들은 “윤씨가 북한대사관에 간 것은 사실인 것 같은데, 진술이 횡설수설이었다”고 기억한다. 윤씨의 여권에는 1월4일 홍콩을 떠난 출국 도장과는 별도로, 1월3일 홍콩을 출국했다 다시 입국한 도장이 찍혀 있었다. 왜 윤씨는 그런 행동을 했을까. 윤씨의 설명은 이러했다고 한다.
“원래는 1월3일 싱가포르로 가기 위해 홍콩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밟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런데 비행기 고장으로 출발이 하루 늦어져 다시 입국함으로써 입국 도장을 찍게 되었다. 그날 나는 항공사에서 잡아준 호텔에서 자고 다음날인 1월4일 싱가포르에 왔다.”
외무부 직원들은 “비행기 출발이 늦춰졌으면 집에 가서 자지, 왜 호텔에서 잤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윤씨는 “아내를 데려간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올지 몰라 호텔에서 잤다”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외무부 직원들이 “연락이 집으로 가지 어떻게 호텔로 가겠는가”고 묻자, 윤씨는 “연락은 호텔로 오게 돼 있었다”고 우겼다고 한다.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외무부 직원들은 윤씨의 주장을 신뢰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안기부는 윤씨 주장을 신뢰했다. 윤씨 사건을 키워야겠다고 판단한 안기부는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에 “각 언론사로 하여금 싱가포르로 기자를 보내게 할 테니, 윤씨의 기자회견을 준비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이에 대해 외무부 직원들은 ‘안기부가 외무부 직원에 대해 명령을 내릴 수 있는지 유권해석을 내려 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총무처로 보내면서까지 거세게 저항했다.
3일 동안 이러한 공방이 계속되자, 안기부는 윤씨를 태국으로 옮겨 기자회견을 갖게 했다. 이런 이유로 윤씨는 1월9일 방콕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그날로 서울에 와 또 기자회견을 했다. 이때 윤씨는 “살아서 돌아온 것이 꿈만 같다. 싱가포르에서 북한 공작원이 ‘돈을 갚지 않으면, 부인을 일본 술집에 팔아 넘기겠다’고 위협해서 북한 공작원을 따라 나서게 되었다”며 처음과는 다른 말을 했다. 그러나 주요 언론은 사설을 통해 북한의 윤씨 납치 미수를 비판했고, 한 신문은 윤씨의 수기를 게재하기도 했다.
그런데 윤씨가 귀국한지 18일째 되는 1월27일 ‘김여인이 윤씨와 동거한 아파트에서 목졸려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홍콩발 기사가 터져나왔다. 언론은 ‘김여인의 아파트에서 악취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홍콩 경찰이 문을 따고 들어가 보니, 김여인이 안방 침대 옆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감식 결과 김여인은 1월초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이것이 윤씨 사건에 관한 마지막 보도였다. 그러나 언론은 1월14일 발생한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보도에 매몰돼 윤씨 사건에서 눈을 돌렸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95년 기자는 충북 C시에 사는 김여인의 가족을 만나,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안기부에 의해 조총련계 공작원으로 지목됐던 김여인은 가난한 농부의 둘째딸로, 고향에서 초등학교만 겨우 나왔다. 그 뒤 서울로 올라와 시내버스 안내양으로 일하다 예쁜 얼굴 덕분에 술집 접대부가 됐는데, 이때 일본인의 현지처 노릇을 했다. 76년 김여인은 홍콩인 양청화(梁靑華)와 위장결혼하는 형식으로 홍콩에 건너가 접대부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다 민첩건축공사(敏捷建築公司) 전무인 홍콩인 오민명(吳敏明)의 ‘세컨드’가 돼 딸을 낳았다.
86년 여름 김여인은 이 딸을 데리고 고향집을 찾아와 아이를 맡긴 뒤 홍콩으로 돌아갔는데, 그해 10월 윤씨와 함께 다시 와서 “결혼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때 윤씨도 결혼한 적이 있는 듯 예닐곱살쯤 되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석달 뒤 윤씨 납북미수사건이 터지고, 이어 김여인이 교살된 시체로 발견됐다는 것이다.
김여인의 가족은 “솔직히 우리도 옥분이의 행적은 다 알지 못한다. 물론 옥분이가 일본인 현지처 노릇을 했고, 홍콩에서도 일본인을 상대했으니 일본인한테 생활비를 타쓴 적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총련 자금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윤씨 납북미수사건이 터진 직후 안기부 충북 분실에서 나와 우리 집을 다 뒤졌지만 간첩이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70대 노인이던 김여인의 노모는 안기부 분실에 불려가 상소리를 들어가며 조사받았다. 그러다 김여인이 변사체로 발견되자 집으로 돌아왔는데, 딸을 잃은 노모는 그 뒤 시름시름 앓다가 97년 세상을 떠났다.
김여인이 변사체로 발견된 뒤 안기부는 과연 적절한 후속 수사를 했을까. 김여인 가족은 “누가 옥분이를 죽였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과연 옥분이가 간첩이었는지는 명확히 밝혀 달라”고 요구했다. 김여인의 오빠는 “옥분이 시체가 발견된 뒤 홍콩경찰은 옥분이가 사귄 남자를 다 조사했다. 오민명도 조사받고 무혐의로 풀려난 뒤 이곳에 와서 딸을 데려갔는데, 당시 그는 ‘한국정부가 비자를 내주지 않아 이렇게 늦게 왔다’고 말했다. 왜 우리 정부는 이런 조사조차도 하지 않았는가”고 항의했다. 홍콩경찰은 우리 정부에 대해 윤씨를 조사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우리 정부는 협조해 주지 않았다. 이후 홍콩경찰은 김여인 피살사건에 대해 범인을 잡지 못한 ‘미제’(未濟)사건으로 넘겨 놓았다.
윤씨는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윤씨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김여인 변사문제로 안기부로부터 조사받은 흔적도 없다. 95년 기자는 윤씨가 서울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의 주소지로 찾아갔으나 마침 아파트 재개발을 위해 철거하고 난 다음이라 허탕을 쳤다.
당시 윤씨가 싱가포르 주재 북한대사관에 간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렇다면 윤씨는 과연 북한 공작원에 속아 북한대사관에 간 것일까. 김여인의 변사체가 발견된 뒤 언론은 윤씨가 김여인을 죽이고 싱가포르로 도주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제기했었다. 그게 맞는다면 윤씨는 납북이 아니라 자진 월북을 하려 했을 수도 있다. 안기부는 최소한 이에 대한 조사를 하고 윤씨를 풀어줬어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없다.
육군 대위로 전역한 윤씨는 홍콩산 비디오 수입업을 하기 위해 86년 7월 홍콩에 갔다가 여섯 살 연상의 김여인을 만나 동거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10월 김여인과 함께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와 10월16일자로 혼인신고를 했다. 윤씨를 기억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87년 1월 귀국한 직후 윤씨는 “안기부 직원들로부터 일관된 진술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많이 맞았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왜 안기부는 윤씨에게 일관된 진술을 하라고 주먹질을 했을까. 그리고 김여인을 죽인 자는 과연 누구일까. 이 문제는 이미 13년이 지난 사건이므로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김여인이 조총련계 공작원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재조사를 해서, 공작원이 아니었다면 합당한 신원(伸寃)작업을 해줘야 한다.
당시 정치상황으로 볼 때 안기부는 공안정국 조성을 위해 윤씨사건이 진짜로 납북사건이기를 바랐을 수도 있다. 기자는 당시 안기부의 고위층이었던 인사들에게 윤씨사건에 대해 질의했으나 하나같이 대답을 피했다. 윤씨 납북미수사건을 키운 주체가 비록 5공의 안기부일지라도, 현 정부는 술집 접대부이자 무지한 농군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여인의 죽음을 내팽개쳐 두지 말고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용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