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천 심사위원을 잡아라! 마치 007영화를 방불케 하는 추격전이 여의도 정가에서 벌어지고 있다. 겉으로 야 아무런 내색도 나지 않고 평온하지만, 공천을 희망하는 사람들마다 한 번이라도 더 심사위원을 만나 읍소하거나 ‘눈 도장’을 찍기 위해 쫓고 쫓기는 긴박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는 것.
이런 광경은 지난해 12월20일 일찌감치 조직책 선정위원회를 구성한 새천년민주당(이하 민주당)의 경우가 특히 심하다. 민주당의 경우는 창당에 따른 조직책 선정이 곧 공천이기 때문에 조직책 선정위가 공천 심사위나 마찬가지.
서울 강북지역의 민주당 공천을 희망하는 교수 출신의 A씨. “신정을 맞아 아침 일찍부터 조직책 선정위원의 집은 다 찾아 다녔다. 그러나 정작 힘깨나 쓸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 얼굴은 구경도 할 수 없었다. 애써 전화번호를 구했지만 핸드폰도 꺼져 있었고, 일부 인사는 핸드폰 번호를 아예 바꾸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다녀갔다는 성의나마 남기기 위해 빈집의 대문에 대고 절하고 왔다.”
민주당의 조직책 심사위원은 정균환위원장을 비롯해 김중권 유재건 신낙균 장을병 이준 부위원장, 이재정 총무위원장, 이성호의원, 강병중 창당준비위원(부산상공회의소소장) 등 모두 9명. 여기에 윤철상의원이 조직책 선정의 실무 간사를 맡고 있다. 유재건부위원장은 서울, 김중권부위원장은 대구-경북(TK), 강병중위원은 부산-경남(PK), 신낙균부위원장은 여성계 등등 각기 분야가 나뉘어 있지만 “실질 심사는 지역이나 직능별로 나누어 제각기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해서 모두 함께한다”는 설명이다.
이들의 의원회관사무실이나 개인사무실, 집 등에는 공천 희망자들이 자신의 이력-경력 사항과 당선을 자신하는 이유들을 구체적으로 기술한 ‘참고 자료’가 수백권씩 ‘배달’돼 있다. 유망한 상대후보의 비위사실을 적은 것들도 많다.
민주당 조직책선정위는 법정 지구당 창당 작업을 위해 이미 3차에 걸쳐 59개 지구당의 조직책을 선정했으며 다른 지역구의 선정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모이는 장소는 아무도 모른다. 흔히 ‘시내 모처’라고 표현될 뿐이다. 회합 시간과 집결 장소는 각자의 휴대폰으로 통보된다. 만나는 장소는 한적한 외곽 호텔이나 콘도 등이 주로 사용되지만, 절대로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공천 희망자나 보도진들이 이를 애써 추적해 헐레벌떡 쫓아갈 즈음이면 이미 회의는 끝났거나, 다른 장소로 옮겨간 다음이다. 지난 15대 총선 때도 국민회의 심사위원들은 리베라호텔, 워커힐호텔 빌라, 기흥의 콘도 등으로 극비 보안 속에 옮겨다녔다.
이 때문에 ‘밀실 공천’이란 비난도 받지만 현실 정치 여건에서는 부득이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렇지 않고서는 쏟아져 들어오는 각종 로비로 인해 도저히 공천 작업이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도권 공천을 노리는 국민회의 당료 B씨. “심사위원들이 같은 당에 있던 사람들이니만큼 아무래도 만나거나 부탁하는 일이 쉽지 않겠나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한 심사위원에게 ‘알현’을 요청했더니 ‘장관급 인사들이 만나자고 해도 일체 만나주지 않았다’면서 냉정하게 거절하더라. 소위 실세들에게 미리 부탁을 해놓았지만, 내 말이 얼마나 전달될지 회의적이다.”
여권에서는 이번 민주당의 공천이 과거에 비해 훨씬 잡음이 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우선 심사위원들부터 유재건 신낙균부위원장이나 이재정총무위원장처럼 구정치인 냄새가 덜한 사람들이다. 윤철상의원을 제외하면 ‘동교동 색채’도 배제됐다. 심사위원들의 면면에는 이번 총선 공천에 대한 김대중대통령이나 여권 핵심의 속내가 깃들여 있다. ‘공천과 관련해 일체의 사연(私緣)을 배제하고 오로지 한 석이라도 더 늘릴 수 있는 당선 가능성에만 집중한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당초 정치권에서는 정균환전사무총장이 조직위원장을 맡은 것부터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공천 스타일을 아는 사람들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15대 총선 공천 때에도 김대통령은 이종찬 권노갑 정대철 등 당내 중진들을 공천심사위에 포함시켰지만, 위원장으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조순형사무총장을 발탁했다. 조의원은 지난 87년 대선 당시 김총재에게 반기를 들고 후보 단일화 운동을 펼쳤던 인물. 평민당 창당 때에도 따라가지 않았다. 그런 조의원을 공천심사위원장으로 임명한 데 대해서는 “만일 조총장이 부정한 돈 100원이라도 받았다는 증거를 내게 가져오면 큰 상을 주겠다”는 김대통령의 농담 한마디가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공천심사위원장은 어느 누구보다도 객관성과 공정성을 담보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평소 그같은 ‘실천’을 보여주지 못한 사람들은 그 자리를 맡을 수 없다는 것이 김대통령의 지론인 셈. 그렇지 않다면 극심한 의견 충돌을 감당해 낼 수 없기도 하다. 정균환위원장 역시 총장 시절부터 사욕이 없으며, 맡은 일은 성실하게 해낸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한 조직책 심사위원은 “정위원장이 격무에 시달려 입술이 다 터졌다”면서 “김대통령은 정위원장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조직책 심사위에서 한 가지 더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최재승기획위원장이 빠진 사실. 이는 최위원장이 강력히 고사했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바로 ‘호남권 물갈이’에 있다. 역으로 보면 최위원장의 조직책 심사위원 고사는 그만큼 호남권 현역 의원들의 물갈이 폭이 클 것임을 예고한다. 호남권 의원 전원과 이러 저러한 인연이 얽힌 최위원장으로서는 공천 발표 후의 후유증과 잡음을 감당하기 어려워 미리 손들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15대의 경우, 호남권 Y전의원은 공천에서 탈락하자 “공천을 줄 것처럼 얘기해 당사 마련 특별 당비 1억원과 후원금 1억원을 냈다”면서 “공천 심사 막바지에 20억원을 뜻하는 두어장을 마련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를 내지 못해 탈락했다”고 주장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물론 이번 공천에서는 심사위원들의 면면으로 볼 때 이같은 ‘금품거래설’이 나올 가능성이 매우 작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번 민주당 조직책 심사위원들의 권한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이들의 활동이 과거처럼 ‘통과의례’에 불과하다는 시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실질적인 공천은 김대통령과 한화갑국민회의사무총장이 다 한다는 얘기도 많다. 그러나 한 심사위원은 “두고 봐야 알겠지만 한총장이 심사위 활동에 일체의 간섭을 하지 않기로 이미 약속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심사위원도 “정리 작업이 너무 복잡해서 정책적으로 배려해야 할 곳이 아니라면 대부분은 심사위에서 결정된다고 보면 된다”고 강조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김대통령이 보는 눈이 제일 정확하더라”고 말하는 심사위원도 있다. 이 심사위원은 지난 15대 총선의 경험담을 다음처럼 말했다. “선거전에 돌입해서 당시 김총재가 지역구에 한 번 다녀갔는데 한 번으론 모자란 것 같아서 다시 다녀가십사 하고 요청하자 김총재는 ‘당신은 한 번으로 충분해. 당선을 장담할테니 두고보라고. 당신보다는 오히려 조세형 한광옥 정대철이 불안해. 괜찮다고 그러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말야’라고 말했다. 당시 나는 상대 후보보다 지지율이 더 낮은 상태였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자 나는 당선되고, 김총재가 걱정했던 세 양반은 모두 떨어졌다. 역시 선거를 오래 치러 본 양반이라 그런지 동물적인 감각이 있는 듯하다.”
이 말은 이번공천 심사 역시 김대통령의 ‘낙점’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렇다고 해도 과거 어느 때보다 공천심사위의 권한이 커졌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공천희망자들은 권노갑고문이나 한화갑총장 최재승기획위원장 등 조직책심사위원이 아니지만 영향력 있는 실세들에게 점수를 따려 안감힘을 쓰고 있다. 이 때문에 권고문은 평창동 자택을 나와 공천이 끝날 때까지는 호텔로 거처를 옮겨다녀야 할 실정이다. 권노갑고문은 밤낮없이 끈질기게 추적해오는 공천 신청자들과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다. 한총장은 최근 본인이 사용하는 휴대전화번호를 바꿨다. 수행비서와 운전사의 휴대전화도 수시로 바꾸고 있다. 최재승기획위원장은 최근 이사했으나 보좌진은 “우리도 집주소를 모른다. 의원님이 먼저 연락해야 연결이 된다”며 최단장의 소재 자체를 극비에 부치고 있다.
한나라당은 민주당보다 공천 싸움이 훨씬 복잡하게 돌아간다. 한나라당은 1월10일 조직책 신청을 마감하고 그 이후 공천 심사위를 구성한다는 계획이지만, 심사위 구성의 시작부터가 쉽지 않다. 이회창총재는 지난해 12월31일 종무식에서 “당내에서 더 이상 계파나 파벌을 인정하지 않겠다”며 “내년부터는 계파 색채를 강조하거나 특정 계파와 연관을 강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이총재는 또 “16대 총선 후보자 공천 과정에서 계파 얘기가 나오거나 그런 의혹이 생기면 명단을 공개해서라도 이를 근절시키겠다”고 덧붙였다.
이총재가 이렇듯 단호하게 ‘계파 불인정’을 강조한 것은 자신이 당내 공천권을 장악하겠다는 의지를 과시하고, 공천 잡음을 최소화하겠다는 뜻이지만 과연 그 말대로 될지 미지수다. 지난 97년 대선을 앞두고 30% 합당 지분을 약속받은 이기택전총재권한대행과 김덕룡부총재 등의 반발이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김부총재의 한 측근 인사는 “만약 이총재가 계보를 인정하지 않겠다면서 자신 측근 인사만으로 공천 심사위를 구성한다면 역으로 본인이 계파를 조장하는 것 아니겠느냐”면서 “이총재 말은 원론적인 수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같은 사정 때문에 한나라당은 각 계파를 대표하는 부총재급의 중진들과 시-도지부장들로 심사위를 구성할 것으로 보는 전망이 많다. 공천의 공정성을 위해 신망있는 외부 인사를 심사위에 포함시키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지만,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외부 인사들로서는 선거의 그 복잡 미묘한 부분을 조정하기에 역부족이라는 것. 지난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과 합당하기 이전의 민주당이 당내 인사 이외에 교수와 변호사 등 3명의 외부 인사를 심사위에 포함시켰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한나라당 내부의 복잡한 사정 탓으로 정작 골치를 앓는 것은 공천 희망자들. 이총재, 이기택고문, 김덕룡부총재, 조순명예총재, 김윤환의원, 이부영총무 등의 각종 계보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어느 한쪽에 잘못 보이는 날에는 그쪽에서 죽어라 하고 발목을 붙잡는 경우가 왕왕 생기기 때문. 당료 출신으로 서울 공천을 원하는 C씨는 “이기택고문으로부터 오해를 산 일이 있어 내 공천에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다가 최근 이고문을 찾아가 진사한 끝에야 비로소 견제가 풀렸다”면서 “나같은 경우가 하나 둘이 아니니, 그 복잡한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지역-계파 보스의 대리인으로 구성된 ‘비밀 내천(內薦)팀’을 중간 단계에서 가동중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 팀이 선거구별로 2, 3명의 후보를 비밀리에 공천심사위에 추천하면, 심사위가 이를 이총재와 조율해 심사 작업을 벌일 예정이라는 것. 아무튼 여당의 공천심사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 사실이다.
자민련은 최근 김학원의원을 총선기획단장으로 내정한데 이어, 김종필총리의 당 복귀 시점인 1월11일 이후 외부 인사 영입 및 공천심사 작업을 벌일 계획이다. 자민련은 김총리의 당 복귀, 박태준총재의 총리직 ‘전출’, 이한동의원의 입당 등으로 지도부 자체가 어수선한 상태라 아직 공천심사위와 관련한 특별한 움직임이나 대강의 틀도 잡지 못한 상태다. 하지만 당 지도부가 정리되고 나면 공천심사위 구성 등 선거체제로 급속히 전환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광경은 지난해 12월20일 일찌감치 조직책 선정위원회를 구성한 새천년민주당(이하 민주당)의 경우가 특히 심하다. 민주당의 경우는 창당에 따른 조직책 선정이 곧 공천이기 때문에 조직책 선정위가 공천 심사위나 마찬가지.
서울 강북지역의 민주당 공천을 희망하는 교수 출신의 A씨. “신정을 맞아 아침 일찍부터 조직책 선정위원의 집은 다 찾아 다녔다. 그러나 정작 힘깨나 쓸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 얼굴은 구경도 할 수 없었다. 애써 전화번호를 구했지만 핸드폰도 꺼져 있었고, 일부 인사는 핸드폰 번호를 아예 바꾸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다녀갔다는 성의나마 남기기 위해 빈집의 대문에 대고 절하고 왔다.”
민주당의 조직책 심사위원은 정균환위원장을 비롯해 김중권 유재건 신낙균 장을병 이준 부위원장, 이재정 총무위원장, 이성호의원, 강병중 창당준비위원(부산상공회의소소장) 등 모두 9명. 여기에 윤철상의원이 조직책 선정의 실무 간사를 맡고 있다. 유재건부위원장은 서울, 김중권부위원장은 대구-경북(TK), 강병중위원은 부산-경남(PK), 신낙균부위원장은 여성계 등등 각기 분야가 나뉘어 있지만 “실질 심사는 지역이나 직능별로 나누어 제각기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해서 모두 함께한다”는 설명이다.
이들의 의원회관사무실이나 개인사무실, 집 등에는 공천 희망자들이 자신의 이력-경력 사항과 당선을 자신하는 이유들을 구체적으로 기술한 ‘참고 자료’가 수백권씩 ‘배달’돼 있다. 유망한 상대후보의 비위사실을 적은 것들도 많다.
민주당 조직책선정위는 법정 지구당 창당 작업을 위해 이미 3차에 걸쳐 59개 지구당의 조직책을 선정했으며 다른 지역구의 선정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모이는 장소는 아무도 모른다. 흔히 ‘시내 모처’라고 표현될 뿐이다. 회합 시간과 집결 장소는 각자의 휴대폰으로 통보된다. 만나는 장소는 한적한 외곽 호텔이나 콘도 등이 주로 사용되지만, 절대로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공천 희망자나 보도진들이 이를 애써 추적해 헐레벌떡 쫓아갈 즈음이면 이미 회의는 끝났거나, 다른 장소로 옮겨간 다음이다. 지난 15대 총선 때도 국민회의 심사위원들은 리베라호텔, 워커힐호텔 빌라, 기흥의 콘도 등으로 극비 보안 속에 옮겨다녔다.
이 때문에 ‘밀실 공천’이란 비난도 받지만 현실 정치 여건에서는 부득이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렇지 않고서는 쏟아져 들어오는 각종 로비로 인해 도저히 공천 작업이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도권 공천을 노리는 국민회의 당료 B씨. “심사위원들이 같은 당에 있던 사람들이니만큼 아무래도 만나거나 부탁하는 일이 쉽지 않겠나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한 심사위원에게 ‘알현’을 요청했더니 ‘장관급 인사들이 만나자고 해도 일체 만나주지 않았다’면서 냉정하게 거절하더라. 소위 실세들에게 미리 부탁을 해놓았지만, 내 말이 얼마나 전달될지 회의적이다.”
여권에서는 이번 민주당의 공천이 과거에 비해 훨씬 잡음이 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우선 심사위원들부터 유재건 신낙균부위원장이나 이재정총무위원장처럼 구정치인 냄새가 덜한 사람들이다. 윤철상의원을 제외하면 ‘동교동 색채’도 배제됐다. 심사위원들의 면면에는 이번 총선 공천에 대한 김대중대통령이나 여권 핵심의 속내가 깃들여 있다. ‘공천과 관련해 일체의 사연(私緣)을 배제하고 오로지 한 석이라도 더 늘릴 수 있는 당선 가능성에만 집중한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당초 정치권에서는 정균환전사무총장이 조직위원장을 맡은 것부터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공천 스타일을 아는 사람들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15대 총선 공천 때에도 김대통령은 이종찬 권노갑 정대철 등 당내 중진들을 공천심사위에 포함시켰지만, 위원장으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조순형사무총장을 발탁했다. 조의원은 지난 87년 대선 당시 김총재에게 반기를 들고 후보 단일화 운동을 펼쳤던 인물. 평민당 창당 때에도 따라가지 않았다. 그런 조의원을 공천심사위원장으로 임명한 데 대해서는 “만일 조총장이 부정한 돈 100원이라도 받았다는 증거를 내게 가져오면 큰 상을 주겠다”는 김대통령의 농담 한마디가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공천심사위원장은 어느 누구보다도 객관성과 공정성을 담보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평소 그같은 ‘실천’을 보여주지 못한 사람들은 그 자리를 맡을 수 없다는 것이 김대통령의 지론인 셈. 그렇지 않다면 극심한 의견 충돌을 감당해 낼 수 없기도 하다. 정균환위원장 역시 총장 시절부터 사욕이 없으며, 맡은 일은 성실하게 해낸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한 조직책 심사위원은 “정위원장이 격무에 시달려 입술이 다 터졌다”면서 “김대통령은 정위원장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조직책 심사위에서 한 가지 더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최재승기획위원장이 빠진 사실. 이는 최위원장이 강력히 고사했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바로 ‘호남권 물갈이’에 있다. 역으로 보면 최위원장의 조직책 심사위원 고사는 그만큼 호남권 현역 의원들의 물갈이 폭이 클 것임을 예고한다. 호남권 의원 전원과 이러 저러한 인연이 얽힌 최위원장으로서는 공천 발표 후의 후유증과 잡음을 감당하기 어려워 미리 손들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15대의 경우, 호남권 Y전의원은 공천에서 탈락하자 “공천을 줄 것처럼 얘기해 당사 마련 특별 당비 1억원과 후원금 1억원을 냈다”면서 “공천 심사 막바지에 20억원을 뜻하는 두어장을 마련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를 내지 못해 탈락했다”고 주장해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물론 이번 공천에서는 심사위원들의 면면으로 볼 때 이같은 ‘금품거래설’이 나올 가능성이 매우 작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번 민주당 조직책 심사위원들의 권한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이들의 활동이 과거처럼 ‘통과의례’에 불과하다는 시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실질적인 공천은 김대통령과 한화갑국민회의사무총장이 다 한다는 얘기도 많다. 그러나 한 심사위원은 “두고 봐야 알겠지만 한총장이 심사위 활동에 일체의 간섭을 하지 않기로 이미 약속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심사위원도 “정리 작업이 너무 복잡해서 정책적으로 배려해야 할 곳이 아니라면 대부분은 심사위에서 결정된다고 보면 된다”고 강조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시 김대통령이 보는 눈이 제일 정확하더라”고 말하는 심사위원도 있다. 이 심사위원은 지난 15대 총선의 경험담을 다음처럼 말했다. “선거전에 돌입해서 당시 김총재가 지역구에 한 번 다녀갔는데 한 번으론 모자란 것 같아서 다시 다녀가십사 하고 요청하자 김총재는 ‘당신은 한 번으로 충분해. 당선을 장담할테니 두고보라고. 당신보다는 오히려 조세형 한광옥 정대철이 불안해. 괜찮다고 그러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말야’라고 말했다. 당시 나는 상대 후보보다 지지율이 더 낮은 상태였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자 나는 당선되고, 김총재가 걱정했던 세 양반은 모두 떨어졌다. 역시 선거를 오래 치러 본 양반이라 그런지 동물적인 감각이 있는 듯하다.”
이 말은 이번공천 심사 역시 김대통령의 ‘낙점’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렇다고 해도 과거 어느 때보다 공천심사위의 권한이 커졌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공천희망자들은 권노갑고문이나 한화갑총장 최재승기획위원장 등 조직책심사위원이 아니지만 영향력 있는 실세들에게 점수를 따려 안감힘을 쓰고 있다. 이 때문에 권고문은 평창동 자택을 나와 공천이 끝날 때까지는 호텔로 거처를 옮겨다녀야 할 실정이다. 권노갑고문은 밤낮없이 끈질기게 추적해오는 공천 신청자들과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다. 한총장은 최근 본인이 사용하는 휴대전화번호를 바꿨다. 수행비서와 운전사의 휴대전화도 수시로 바꾸고 있다. 최재승기획위원장은 최근 이사했으나 보좌진은 “우리도 집주소를 모른다. 의원님이 먼저 연락해야 연결이 된다”며 최단장의 소재 자체를 극비에 부치고 있다.
한나라당은 민주당보다 공천 싸움이 훨씬 복잡하게 돌아간다. 한나라당은 1월10일 조직책 신청을 마감하고 그 이후 공천 심사위를 구성한다는 계획이지만, 심사위 구성의 시작부터가 쉽지 않다. 이회창총재는 지난해 12월31일 종무식에서 “당내에서 더 이상 계파나 파벌을 인정하지 않겠다”며 “내년부터는 계파 색채를 강조하거나 특정 계파와 연관을 강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이총재는 또 “16대 총선 후보자 공천 과정에서 계파 얘기가 나오거나 그런 의혹이 생기면 명단을 공개해서라도 이를 근절시키겠다”고 덧붙였다.
이총재가 이렇듯 단호하게 ‘계파 불인정’을 강조한 것은 자신이 당내 공천권을 장악하겠다는 의지를 과시하고, 공천 잡음을 최소화하겠다는 뜻이지만 과연 그 말대로 될지 미지수다. 지난 97년 대선을 앞두고 30% 합당 지분을 약속받은 이기택전총재권한대행과 김덕룡부총재 등의 반발이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김부총재의 한 측근 인사는 “만약 이총재가 계보를 인정하지 않겠다면서 자신 측근 인사만으로 공천 심사위를 구성한다면 역으로 본인이 계파를 조장하는 것 아니겠느냐”면서 “이총재 말은 원론적인 수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같은 사정 때문에 한나라당은 각 계파를 대표하는 부총재급의 중진들과 시-도지부장들로 심사위를 구성할 것으로 보는 전망이 많다. 공천의 공정성을 위해 신망있는 외부 인사를 심사위에 포함시키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지만,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외부 인사들로서는 선거의 그 복잡 미묘한 부분을 조정하기에 역부족이라는 것. 지난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과 합당하기 이전의 민주당이 당내 인사 이외에 교수와 변호사 등 3명의 외부 인사를 심사위에 포함시켰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한나라당 내부의 복잡한 사정 탓으로 정작 골치를 앓는 것은 공천 희망자들. 이총재, 이기택고문, 김덕룡부총재, 조순명예총재, 김윤환의원, 이부영총무 등의 각종 계보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어느 한쪽에 잘못 보이는 날에는 그쪽에서 죽어라 하고 발목을 붙잡는 경우가 왕왕 생기기 때문. 당료 출신으로 서울 공천을 원하는 C씨는 “이기택고문으로부터 오해를 산 일이 있어 내 공천에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다가 최근 이고문을 찾아가 진사한 끝에야 비로소 견제가 풀렸다”면서 “나같은 경우가 하나 둘이 아니니, 그 복잡한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지역-계파 보스의 대리인으로 구성된 ‘비밀 내천(內薦)팀’을 중간 단계에서 가동중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 팀이 선거구별로 2, 3명의 후보를 비밀리에 공천심사위에 추천하면, 심사위가 이를 이총재와 조율해 심사 작업을 벌일 예정이라는 것. 아무튼 여당의 공천심사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 사실이다.
자민련은 최근 김학원의원을 총선기획단장으로 내정한데 이어, 김종필총리의 당 복귀 시점인 1월11일 이후 외부 인사 영입 및 공천심사 작업을 벌일 계획이다. 자민련은 김총리의 당 복귀, 박태준총재의 총리직 ‘전출’, 이한동의원의 입당 등으로 지도부 자체가 어수선한 상태라 아직 공천심사위와 관련한 특별한 움직임이나 대강의 틀도 잡지 못한 상태다. 하지만 당 지도부가 정리되고 나면 공천심사위 구성 등 선거체제로 급속히 전환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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