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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멀티CEO가 떴다

나? 팔방미인, 나? ‘멀티CEO’

여러 업종 두루 거친 다방면 전문가 각광… ‘의욕·경험·전문지식’ 무기로 맡는 분야마다 ‘척척’

  • < 성기영 기자 > sky3203@donga.com

나? 팔방미인, 나? ‘멀티CEO’

나? 팔방미인, 나? ‘멀티CEO’
서울 강남구 삼성동 나이키코리아 13층 하윤도 사장 사무실은 나이키에서 생산하는 각종 스포츠화와 농구공 축구공 등 스포츠용품들로 가득 차 있다. 한쪽 벽면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액자에는 월드컵 축구 대표선수들이 사인을 한 공식 유니폼도 걸려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스포츠용품 전문업체의 CEO 사무실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런데 진열장 한쪽 구석에 있는 액자 속의 하사장은 갑자기 맘씨 좋은 피자집 아저씨로 변신해 있다. 파란색 모자를 쓰고 앞치마까지 두른 영락없는 피자집 사장의 모습이다.

지금은 스포츠용품 업체의 CEO를 맡고 있는 하사장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스포츠와는 전혀 관계없는 피자헛(Pizza Hut) 영업본부장을 맡았었다. 게다가 하사장의 이력서에 씌어 있는 ‘피자헛 영업본부장’ 위로는 치킨 전문 프랜차이즈 회사인 서울식품 사장, 멕시코 요리 전문체인인 타코벨(Taco Bell) 대표이사 등이 순서대로 적혀 있다. 모두 현재 나이키코리아 사장이라는 직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피자집은 매장관리가 관건입니다. 그런데 나이키는 매장 관리보다는 브랜드 마케팅이 중요하죠. 똑같은 마케팅이라도 접근 방식이 다릅디다. 하지만 피자집 사장이나 신발회사 사장이나 다를 건 하나도 없어요. 아무리 분야가 달라도 CEO가 사업의 본질만 꿰뚫고 있으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최근 들어 하사장처럼 완전히 다른 분야에서 CEO로 승부하는 ‘직업형 CEO’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고 있다. 이른바 ‘멀티CEO’의 출현이다. CEO 충원 구조가 이렇게 바뀌면서 자연스레 ‘CEO 시장’도 열리고 있다. ‘멀티CEO’들이 가진 장점은 어느 분야에 있더라도 마케팅이면 마케팅, 재무회계면 재무회계라는 자신만의 무기를 갖고 해당 업종을 장악해간다는 것이다.

하윤도 사장의 경우만 해도 피자헛 영업본부장 시절 직영 매장 200개에 직원만 5800명을 거느리고 마케팅을 총지휘했던 경험이 나이키로 옮긴 뒤에도 그대로 빛을 발했다. 하사장이 ‘피자체인 경영인’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는 IMF와 함께 왔다. IMF 사태로 인해 전국 매장의 매출액이 일거에 곤두박질치자 매장주들이 들썩거리기 시작한 것. 매장주들이 협의회를 구성해 본사를 압박하면서 머리띠까지 두를 기미를 보이자 하사장은 피자헛 시절의 매장관리 경험을 살려 전국을 돌면서 이들 한명 한명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매장 영업의 본질을 누구보다도 잘 꿰뚫고 있는 ‘영업통’ 하윤도 사장의 노련한 영업 노하우가 효과를 발휘했던 것.



나? 팔방미인, 나? ‘멀티CEO’
‘도브(Dove)’라는 브랜드로 잘 알려진 ㈜유니레버코리아의 이재희 회장은 지난 20년간 아예 ‘프로 CEO’였던 경우. 이회장 역시 지난 70년대 컨설팅 전문회사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 컨설턴트로 출발해 하얏트 리젠시, TNT 익스프레스 등 호텔업이나 물류업 등 전혀 다른 분야를 경험한 뒤 현재는 식품 및 생활용품 업체 CEO로 변신했다. 특히 호주 시드니에 본사를 둔 물류업체 TNT 익스프레스 시절에는 한국 지사장으로 시작해 극동담당 사장, 아시아태평양지역 수석부사장, 북아시아지역 사장 등 근무지를 바꿔가면서 CEO로만 14년을 일해왔다.

지난 99년 이재희 회장을 CEO로 영입한 유니레버는 이미 15년 전인 1985년 일찌감치 한국 시장에 진출했으나 이미 두 차례나 ‘쓴맛’을 본 뒤였다. 국내 진출 초기에는 애경과 합자회사로 화장품 분야 사업을 시작했지만 기업문화의 차이로 인해 실패했고, 93년에는 다시 신동방과 합작해 식품 사업을 펼쳤지만 이마저 비슷한 이유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 무렵 한국시장 철수냐 잔류냐를 고민하던 유니레버 본사에 난데없는 편지가 한 장 날아들었다. 과거 유니레버의 물류 분야를 담당한 적이 있던 TNT 익스프레스의 북아시아 지역 담당 한국인 사장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나에게 한번 맡겨봐주십시오. 경영의 요체는 결국 비슷한 것 아니겠습니까. 리더십이 확실하고 경쟁을 알고 시장을 알면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소비자 심리까지 읽을 수 있다면 CEO로서의 자질은 충분합니다. 내가 유니레버코리아를 살려내지 못하면 아시아에서 이 회사를 살려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편지 한 통으로 이재희 회장은 유니레버 역사상 최초의 현지인 CEO로 발탁됐다. 15년간의 한국 시장 개척 노력이 실패로 끝난 뒤 마지막 수단으로 선택한 방법이 ‘현지인 CEO’였던 만큼 처음에는 주변의 오해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내가 회계사에다 재무전문가인 것을 두고도 직원들이 ‘결국 회사 문 닫으러 들어온 사람 아니냐’는 식으로 수군거리더군요. ‘턱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직원들을 다독거려놓고 신제품 출시도 중단한 상태에서 시장분석부터 새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호텔, 물류 분야에서 성장해온 재무전문가인 이회장은 이렇게 해서 완전히 새로운 분야인 식품과 생활용품 분야 CEO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뒤 3년 연속 60% 이상 성장하는 성과를 이뤄내기도 했다. 이회장은 “기술자의 시각이건 재무전문가의 시각이건 한쪽 앵글에서만 보면 회사 전체를 볼 수 없는 법”이라며“ 전체를 조망하는 위치에서 회사를 관찰하는 것이 ‘멀티CEO’ 제1의 덕목”이라고 강조했다.

나? 팔방미인, 나? ‘멀티CEO’
컨설턴트 출신들이 유독 CEO로 많이 나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MBA를 준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필독서가 되고 있는 ‘MBA로 인생을 바꿔라’의 저자 정병찬씨 역시 AT커니 컨설턴트 출신이다. 그러다가 지금은 MBA 컨설팅 업체인 JCMBA를 차려 아예 CEO로 변신했다. JCMBA는 MBA 응시생들을 상대로 상담도 해주고 GMAT 등을 강의하는 학원도 겸하고 있다. 정씨는 MIT MBA를 지원해 입학 허가를 받아놓고 1년쯤 남은 준비기간 동안 MBA 응시생들을 상대로 ‘학습지 장사’를 시작했다. 시험 준비 과정조차도 비즈니스화해 예비 CEO로서의 준비를 차근차근 해온 셈이다. 컨설턴트→베스트셀러 저자→벤처 캐피탈 사장 등으로 승승장구해온 정씨는“왜 유명 대학 MBA 출신이 학원 원장이나 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한국 최초의 커리어 매니지먼트 회사의 CEO가 되겠다”고 응답하곤 한다.

헤드헌팅 전문업체인 KK컨설팅 김국길 사장은 책상서랍에 손때 묻은 대학노트 두 권을 10년째 보관하고 있다. 90년대 초 김사장이 제너럴일렉트릭(GE)으로부터 ‘헤드헌팅당해’ GE정보통신 CEO로 스카웃된 뒤 새로운 분야의 경영자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 정보통신 분야를 독학하며 정리한 노트다. 김사장의 10년 전 노트에는 ‘MS-DOS’니‘WINDOWS’니 하는 기초용어에서부터 각종 그래프와 수식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헤드헌터로서 수많은 CEO 채용을 중개하면서 CEO로서의 자질과 능력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지만 정작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 새로운 분야의 업무지식은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혼자 익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산업 분야로 진출한 대부분의 ‘멀티CEO’들은 이 분야의 전문지식을 익히기 위해 이직(移職) 초기 밤을 새워가며 ‘보충수업’을 받게 마련이다.

지난 9월2일 생명과학과 첨단소재 분야 기업인 동부한농화학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하면서 ‘깜짝쇼’를 연출한 신영균 전 대우조선 사장도 요즘 난생 처음 접해보는 비료·종자·제초제뿐만 아니라 철강·합금·합성수지 등 이 회사의 다종다양한 생산 라인을 돌아다니면서 보충수업을 받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고 있다. 게다가 일부 공장의 파업까지 겹쳐 신사장은 아직까지도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고 있는 중. 지난 95년부터 대우중공업 조선부문 사장을 맡아 국내 조선업계를 세계 1위로 끌어올린 주인공인 신영균 사장이 완전히 다른 분야에서도 CEO로 성공할 수 있을지에 업계의 모든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금은 야후코리아 CEO로 변신한 이승일 사장은 얼마 전만 해도 브리스톨메이어스퀴브(BMS)라는 미국계 제약회사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지역 사장을 맡았었다. BMS에서 주로 맡았던 업무는 현재의 야후코리아 CEO 역할과는 관계없는, 분유 ‘엔파밀’과 샴푸 ‘클레롤’ 등 세계적 브랜드의 생활용품을 세계시장에 내다 파는 일. CEO 치고는 꽤 젊은 나이인 이 사장은 지금까지 모두 6번이나 직장을 옮겼지만 그 때마다 업종이나 분야가 모두 달랐다. 아예 중학교 시절부터 ‘멀티CEO’를 목표로 자신의 로드맵(경력지도)을 짜놓은 뒤 여기에 맞춰 직장을 옮겼기 때문이다.

이사장이 최고의 CEO를 위해 선택한 제1의 수단은 무엇보다도 최고의 마케팅 능력.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MBA를 마친 후 모두 14군데서 채용 제의를 받았지만 이사장은 연봉이 가장 많은 회사를 제쳐놓고 마케팅 분야에서 세계 최고인 회사를 택했다. 그래서 처음 입사한 곳이 생활용품 전문업체인 프록터스앤갬블(P&G). P&G에서 마케팅 능력을 테스트한 후 한국으로 들어온 뒤에는 시티은행에 들어가 역시 신용카드 마케팅을 담당했다.

나? 팔방미인, 나? ‘멀티CEO’
시티은행에서도 남들이 모두 재무회계에 정통한 ‘뱅커(banker)’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그는 마케팅 전문가의 꿈을 접지 않았다. 그 후 이 사장이 선택한 직장 역시 코카콜라에 맞서 공격적 마케팅을 펼치던 펩시콜라 인터내셔널. 여기서도 마케팅 위주의 경영수업을 계속한 끝에 드디어 중학교 시절부터 꿈꾸던 CEO가 될 기회를 잡았다. 36세 되던 해 BMS의 말레이시아 사장으로 옮겨갈 기회가 찾아왔던 것.

제약회사 CEO로서 전혀 새로운 분야를 경험한 이승일 사장은 3년 뒤 또다시 인터넷업체인 ‘아시아온라인’의 아시아 및 인도지역 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여기서 그동안 B2C(소비자 판매)에만 기울여온 관심을 B2B(기업간 거래) 쪽으로 넓혀 온라인 분야 CEO로서의 준비를 모두 마쳤다.

이렇게 ‘준비된 CEO’였던 탓일까. 이승일 사장은 야후코리아 사장으로 부임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야후 본사의 남아시아 총괄사장에 임명되면서 글로벌 CEO 위치에 오르게 된다. 이사장은 “금융이든 제약이든 식음료든 간에 소비자의 욕구를 파악하기 위한 접근 방법은 비슷하다”면서 모든 CEO들이 마케팅을 중심축에 놓고 생각한다면 히딩크식 ‘멀티플레이어’가 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충고한다.

나? 팔방미인, 나? ‘멀티CEO’
이 밖에도 변호사에서 연예사업가로 화려하게 변신한 박병무 플레너스엔터테인먼트 사장, 다우기술 대표이사와 삼호물산 사장 등을 거쳐 한국후지쯔 사장으로 변신한 안경수 사장, 삼성코닝 부사장과 호텔신라 사장을 거쳐 코엑스 사장으로 재직중인 안재학 사장 등이 최근 ‘멀티CEO’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다.

헤드헌팅 전문업체인 P&E 컨설팅 홍승녀 사장은“최근 들어 CEO를 채용하려는 사람들은 히딩크형의 올라운드플레이어를 원하지만 정작 그런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새로 CEO를 채용하려는 기업은 ‘능력’과 ‘자질’을 원하는데 CEO를 지망하는 구직자들은 ‘경력’만을 내세우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 ‘몇 년 근무했으니까 어떤 자리를 달라’는 식이다. 홍사장은 이를 두고 “CEO들을 둘러싼 채용 환경이 호봉 패러다임에서 연봉 패러다임으로 바뀌는데 40∼50대의 CEO급 구직자들을 인터뷰해보면 아직도 ‘짬밥’만 따지는 경우가 더 많다”고 지적했다.

식음료, 조선, 금융, 스포츠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뛰며 올라운드플레이어를 자처하는 이들 ‘팔방미인형’ CEO의 출현은 이제 우리 사회에도 본격적인‘CEO 시장’이 열리는 조짐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기업이나 주주들의 요구에 따라 CEO들이 자기의 주가를 형성하면서 ‘사자’ 또는 ‘팔자’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20대에 컨설턴트로 출발해 50대에 ‘직업 CEO’가 된 유니레버코리아 이재희 회장의 말은 음미해볼 만하다. 이회장은 오너 눈치나 살피면서 한 분야에만 안주하는 우리 기업의 CEO문화를 과감하게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 군인들이 영관 때까지나 병과(兵科)가 있지, 장군 달고도 병과 따지는 것 봤소? 이런 것 저런 것 다 따지면서 자리나 차지하고 있으려면 CEO라는 소리 입에도 올리지 말라고 하시오!”



주간동아 353호 (p56~59)

< 성기영 기자 > sky320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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