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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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햇볕 온정과 냉정 사이

北, 유화책에 남북교류 기지개 … “비핵화가 우선” 미국은 여전히 냉담

  • 신석호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입력2009-11-04 14: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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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 햇볕 온정과 냉정 사이

    10월28일 금강산호텔에서 열린 작별상봉을 마친 남측 이산가족들이 버스에 올라 북측 가족과 이별하고 있다.

    10월28일 수요일 오전 9시40분경. 광케이블과 통신관로 등을 실은 한국 트럭 34대가 경의선과 동해선 육로를 통해 북한으로 향했다.

    남북의 육로통행 관리에 사용되는 군 통신선을 현대화하기 위해 남측이 북측에 자재와 장비(총액 8억5000만원 상당) 1차분을 제공한 것이다. 남북은 향후 각자의 구간에서 필요한 공사를 진행해 연말까지 군 통신선을 현재의 구리케이블에서 광케이블로 교체하게 된다.

    이번 공사는 향후 남북 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지난 7월 이후 달라진 남북관계의 상징적 결과이기도 하다. 남북 군 통신선 현대화 작업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7년 말 합의됐지만, 지난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이행이 미뤄져왔다. 북한이 7월 이후 대남 유화정책을 펴고 남북관계가 개선되면서 거의 2년 만에 실행되는 남북 간의 정치적 이벤트인 것이다.

    군 통신선 현대화, 2년 만의 이벤트

    자재와 장비 제공 나흘 전인 10월24일 북한 외무성 이근 미국국장이 뉴욕에서 미 국무부 성 김 북핵담당 특사를 만났다. 이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취임 이후 첫 북-미 당국자 간 접촉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두 사람은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방북 문제와 북-미 양자대화의 재개 시점 및 논의 내용, 그리고 북한의 6자회담 복귀 등을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1시간 동안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 역시 북한이 올해 7월 이후 실행해온 대미 유화정책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2009년 7월부터 이전의 대외 공세정책을 대외 유화정책으로 전환했다. 핵과 미사일을 앞세워 국제사회를 위협하던 자세에서 돌변해 접촉과 대화를 요구하며 미국과 한국 등에 ‘러브콜’을 보냈다. 이런 정책도 하나의 대외정책 결정이라고 볼 수 있는 만큼 그 내용(contents)과 성과(performance)를 따져볼 수 있다. 7월 이후 약 4개월간의 궤적을 추적해보면 미국과 한국에 대한 북한의 유화정책 내용 및 성과에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정상회담을 위한 남북 비밀접촉설에서 나타난 것처럼 북한은 대남관계를 풀어가는 방법론으로 ‘톱다운(top-down)’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북한이 이명박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담판’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속셈으로 풀이된다. 북한의 목표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의 ‘햇볕정책’으로 되돌리는 것. 10월22일 ‘노동신문’은 “북남 사이에 여러 갈래의 대화 움직임이 나타나고, 6·15공동선언과 10·4선언 이행을 위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노동당 통일전선부가 최고지도자인 김 위원장의 ‘지시’를 차례차례 이행해가는 모양새 역시 톱다운 방식이다. 김 위원장은 8월16일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을 만나 남북교류 5개 항에 합의했다. 이후 당과 내각 등의 하부 기관들이 이를 실천해가는 형국이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먼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선처’하는 형식을 갖췄다. 북한은 9월6일 임진강 황강댐 강물을 무단 방류하고, 10월14일 서해 북방한계선(NLL) 무력화를 시도하는 등 간간이 한국을 압박했지만, 지난 6월 이전과 같은 지속적인 군사 위협은 삼가고 있다.

    북한의 대남 유화정책은 그럭저럭 성과를 내고 있다는 평가다. 먼저 남북 정상회담을 국내 정치에 활용하고자 하는 한국 지도부의 이해관계를 자극해 유력 인사를 10월 중순 싱가포르에 불러내는 데 성공했다. 북-미 대화 진전에 남북관계 진전의 보폭을 맞추려는 한국 정부가 화답하면서 적십자회담, 임진강 수해 방지를 위한 실무회담 등 대화 채널을 마련했다. 비록 옥수수 1만t에 그쳤지만 한국 정부 차원의 대북 인도적 지원 제의도 이끌어냈다.

    뉴욕 채널로 물밑 진행하지만 고전

    이에 비해 북한의 대미 유화정책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뉴욕 채널 등을 통해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정책은 상대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북한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방북(8월4~5일)하기 전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방북을 미국 측에 제의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10월 말 현재 성사되지 않고 있다. 한국 정부가 북한의 대화 요구에 발 빠르게 응한 것에 비해 미국은

    9월11일에야 공식 반응을 나타냈다. 미 국무부 필립 크롤리 공보담당 차관보는 이날 “우리는 북한과 만날 준비가 돼 있다”고 발언해 대북 무시정책에 변화가 있을 것임을 예고했다. 이근과 성 김의 만남은 그로부터 한 달 열흘이 더 흐른 뒤에 성사된 것이다. 대미 유화정책의 성과가 대남 유화정책보다 더딘 이유는 먼저 미국의 이해관계가 한국과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북한을 대화 테이블에 끌어 앉히는 일에 관심 있는 것과 달리, 미국 정부는 북한의 분명한 비핵화 의지가 확인되지 않는 한 대화에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10월21일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미국평화연구소(USIP) 창립 25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검증 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북한의 조치가 취해질 때까지 현재의 대북제재는 완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 뒤 “핵을 가진 북한과는 결코 관계 정상화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클린턴 장관의 발언은 북-미 대화를 통해 핵보유국의 지위를 인정받고 미국과 관계 정상화 문제를 논의한다는 북한의 목적에 전면 배치되는 것이어서 향후 북한의 대미 유화정책은 순조롭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또 북한은 한국에 대해서는 다양한 유화정책 수단을 갖고 있지만, 미국에 대해서는 8월5일 2명의 여기자 석방 외에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없다. 이에 따라 북한은 외무성 성명 등을 통해 미국을 비난하는 동시에 10월12일 동해안으로 단거리 미사일 5발을 발사한 것처럼 제한적 무력시위를 감행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북한의 대남 유화정책 주요 일지
    날짜 내용
    8월 4일이종혁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 방북 제의
    13일억류 근로자인 현대아산 유성진 씨 석방
    16일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현 회장 남북교류 5개 항 합의
    21일남북 육로통행 제한·차단 ‘12·1조치’ 해제
    21~23일고(故) 김대중 대통령 북측 조문단 방한, 이명박 대통령 접견
    29일억류 연안호와 선원 4명 석방
    9월 10일개성공단 땅값 인상 등 요구 철회
    26~10월1일추석 계기 이산가족 상봉
    10월14일임진강 황강댐 무단 방류에 대해 유감 표시
    15~20일김양건 노동당 통전부장 등 싱가포르에서 남측 인사 접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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