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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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사람냄새를 추억함

통근열차 타고 임진각 평화여행

  • 채지형 여행작가 www.traveldesigner.co.kr

    입력2009-06-17 11: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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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져가는 사람냄새를 추억함

    통근열차를 타고 도착한 임진강역. 이경림 작가의 ‘솟대집’. 바람개비 언덕에 있는 카페 ‘안녕’. 임진각에서 볼 수 있는 평화의 메시지(좌측부터).

    사라져가는 모든 것은 아릿하다. 서울역과 문산을 거쳐 북녘 바로 아래인 도라산역까지 오가던 통근열차가 이달 말이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뉴스에서는 친절하게 7월1일부터 복선전철로 대체되면서 배차 간격도 당겨지고 운행시간도 1시간10분에서 50분으로 단축된다고 전한다.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추억이 가득 담긴, 사람냄새 풀풀 풍기던 통근열차가 사라진다니. 아쉬움에 가방을 챙겨 들고 신촌역으로 향한다. 역이 아닌 기념물이 돼버린 신촌역을 보는 시선도 편치 않다. 그렇게 이별하는 마음으로, 애틋한 가슴으로 임진각행 통근열차에 몸을 실었다.

    우울할 때는 임진각 여행

    통근열차에는 역시나 사람이 많았다.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여기가 장터인지 열차인지 헷갈리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모습도 이젠 보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니,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열차 안에서 아프리카 여행 중 만난 리지와 이안 부부가 생각났다. 호주 아가씨 리지와 캐나다 청년 이안은 제주도에서 함께 영어선생님을 하며 사랑을 싹틔웠다. 우연히 아프리카에서 이 커플을 만나 친해졌고,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뒤 홍대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날 리지 이안 커플과 처음으로 임진각 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임진각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다. 임진각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DMZ와 남북관계에 대해 한참 떠들었다. 그러나 막상 임진각에 도착하니 심각한 이야기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리지와 이안이 팽이치기, 제기차기 같은 전통놀이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이안은 너무나 좋아했다. 결국 용 모양의 연을 하나 사 들고 마치 아무도 모르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신나했다.

    친구들과의 추억을 더듬다 보니, 신촌에서 탄 기차는 어느새 임진강역 도착을 알린다. 처음부터 끝까지 세봤자 다섯 량 정도 되는 꼬마열차. 멋진 모자를 쓴 철도원은 행선지를 ‘임진강 → 서울’로 바꾸고 다시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임진강역을 찬찬히 둘러본다. 임진강역에 붙어 있는 수많은 쪽지 가운데 ‘우울할 때는 임진각’이라는 쪽지가 눈에 들어온다. 참신하다.



    정말 우울할 때면 임진각에 오게 될까. 하기야, 이제 더 이상 임진각은 눈물의 임진각이 아니지. 눈물과 우울을 멀리 날려버리고 평화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는 곳이지. 임진강역에서 나오니 한가롭게 낚시를 하는 강태공이 보인다. 마정교 낚시터다. 자연산 붕어와 잉어를 풀어놓는 낚시터라고 하는데, 강태공들은 물고기가 아니라 세월을 낚는 이들처럼 부동자세로 앉아 있다.

    따가운 햇살과 함께 몇 분쯤 걸었을까. 임진각 입구가 나타난다. 먼저 평화누리에 가기로 했다. 바람의 언덕에 있는 색색의 바람개비가 오랫동안 그리웠으니까. 빨갛고 파랗고 하얀 바람개비 3000여 개가 나름의 색을 뽐내고 있다. 초록과 노란색으로만 꾸며진 한반도의 바람개비.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과 함께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김언경 작가의 작품 ‘바람의 언덕’은 한없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마음을 그리고 있다.

    6월이라 그런지 바람보다는 화려한 해님이 더 가깝다. 오랜만에 쉬고 있는 바람개비들. 화려한 바람개비 중에서도 은빛 옷을 입은 바람개비가 더욱 반짝거린다. 자, 오늘은 어느 바람개비에 마음을 실어 날려볼까.

    평화누리에는 언제나 평화가 가득

    사라져가는 사람냄새를 추억함

    임진각 평화누리 ‘바람의 언덕’에 있는 형형색색의 바람개비가 뭉게구름과 함께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오랜만에 왔더니 바람개비 옆에는 새로운 식구가 생겼다. 대나무와 철근으로 만들어진 최평곤 작가의 ‘통일 부르기’라는 작품이다. 북녘을 바라보는 듯한 형상 4개로 이뤄진 설치미술인데, 이스터 섬의 모아이를 생각나게 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염없이 바라보는 애절함. 이 작품을 통해 통일을 향한 걸음 앞에 하나의 노둣돌이 되고 싶다던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발걸음은 푸르디푸른 초록으로 향한다.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잔디를 밟으며 ‘희망’의 다른 이름, 솟대를 만나러 간다. 사람들이 마을 어귀에 솟대를 세우고 하늘에 우리 마음을 전했던 것처럼, 이경림 작가는 솟대를 세우며 평화와 통일을 기원했다고 한다.

    바람에 멀리 휘날릴 것 같은 ‘솟대 소리’, 철근으로 만든 ‘솟대 둥지’, 빛을 그려내는 ‘솟대집’까지 솟대를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이 평화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단순하고 소박한 솟대만의 아름다움. 하늘을 향해 서 있는 솟대를 보며 눈을 들어 저 먼 곳을 바라다본다.

    이제는 잠시 쉬어 갈 차례. 바람개비 언덕에 있는 카페 ‘안녕’에 자리를 잡는다. 카페는 여유로운 복층 구조로 편안하다. 여기에 잔잔하게 깔리는 클래식 음악은 산책을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어준다. 2층에는 그다지 많진 않지만 그야말로 ‘평화스러운’ 책들이 손길을 기다린다.

    카페 안녕과 “안녕!”을 하고 난 뒤에는 파주장단콩전시관에 들른다. 콩과 관련된 테마 박물관이라고나 할까. 콩 종류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 수많은 콩의 이름부터 성장 과정, 콩에 대한 세계 여러 나라의 풍속까지 알콩달콩한 이야기들이 보기 쉽게 펼쳐져 있다. 파주의 장단콩은 청정 자연환경에서 만들어져 더욱 맛있다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생각만 해도 구수해진다.

    임진각의 세련된 변신

    장단콩전시관 옆에 있는 평화의 종을 지나면 망배단이 나온다. 망배단은 실향민들이 명절 때 북에 있는 식구들을 그리워하며 배례하는 곳. 다시 한 번 우리의 현실이 폐부를 찌른다. 철교의 기둥만 남은 임진철교, 1953년 포로 교환을 위해 가설된 자유의 다리, 자유의 다리 가는 길에 걸려 있는 애타는 사연들. 임진각은 일상을 핑계로 밀쳐뒀던 우리의 아픔을 돌아보게 만든다. 한반도 모양의 통일연못까지 돌아보고 난 뒤에는 임진각에 오른다.

    평화누리의 작품도 새 얼굴이 많았지만, 임진각은 완전히 새 옷을 입었다. 입구에는 ‘아이엠 임진각’이라고 적힌 노란색 글자가 서 있다. 옛날의 풋풋함은 없지만, 훨씬 산뜻하고 말끔해졌다. 민간인 통제구역 마을인 해마루촌과 DMZ를 볼 수 있는 ‘하늘마루’ 외에 늦은 시간에도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워크 인 더 클라우드’, 임진각을 바라보며 식사할 수 있는 ‘한정식 임진각’ 등 다양한 시설이 깔끔해지거나 새로 문을 열었다.

    임진각 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철도중단점. 임진각에서 임진강역으로 나서면, 운행이 중단된 경의선 철도를 상징하는 철길과 1930년대 모습으로 복원한 기차카페가 세월의 시름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이좋게 놓여 있다. 섬나라가 아니면서도 섬나라처럼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현실. 이 철도가 이어져, 평양과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까지 가는 날이 언제쯤일까 그려보면서 다시 통근열차에 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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