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장화’, 1986,Color photograph,14 3/16×9 1/2 inches,Photo by Marek Rogowiec, courtesy the artist and Hauser & Wirth, Zurich/London
이 작품은 1987년 독일 카셀 도큐멘타를 위해 진행했던 프로젝트입니다. 1989년 그는 자신이 태어난 도시 아펜첼(Appenzell)에서 지금 살고 있는 장크트갈렌(St. Gallen)을 잇는 기차선로에 도화선을 설치한 뒤 여기에 불을 붙여 무려 35일 동안 도화선 불꽃이 과거의 집에서 현재의 집으로 여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역시 ‘조각’이라 부릅니다.
로만 지그너는 30년 동안 기존의 조각 개념에 끊임없이 도전해온 작가로 손꼽힙니다. 기존의 조각 작업이 실내에서 이뤄지던 것과 달리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스위스의 자연을 작업의 일부로 끌어들입니다. 그가 사용하는 재료는 돌이나 금속, 나무 같은 고전적인 재료가 아니라 우산, 탁자, 장화, 모자, 풍선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성 오브제입니다.
작가는 여기에 ‘자연+시간’이라는 새로운 재료를 도입하는데요. 다이너마이트나 소형 폭발장치를 이용해 바람, 물, 흙, 공기 등 자연 요소에 내재된 특성을 순간적으로 끄집어내 자신의 재료가 조각 형태를 띠도록 만듭니다. 단 1~2초에 형성된 조각은 이내 그 형태를 잃게 되죠.
저는 바로 이 부분 때문에 그의 작품을 조각이라기보다는 ‘조각적 순간’이라 부르고 싶은데요.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무엇이 일어날 것 같은, 혹은 일어나고 있는, 결국은 일어나버린’ 시간의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자연에 덫을 놓는 것이다. 자연이 내 작업에 끼어들어 조각을 완성하도록.”
그의 말처럼 작업의 시작은 그가 하지만 작업을 완성하는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닙니다.
또 다른 작품 ‘물장화’(Water Boots, 1986)를 볼까요? 그는 흔해빠진 고무장화 안에 폭발장치를 설치한 뒤 물을 가득 붓습니다. 장화 속 장치가 폭발하는 순간 고요히 담겨 있던 물은 역동적인 에너지와 함께 솟아오르고 그는 바로 이 찰나를 촬영합니다. 한낱 물건이던 검정 고무장화에 생명이 깃드는 순간이 ‘조각’된 것입니다. 물줄기와 물방울이 어디로 어떤 모양으로 튈지, 그리하여 어떤 조각적 순간을 작가에게 부여할지는 오직 사건이 일어난 뒤에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의 조각에는 늘 다음에 일어날 ‘사건’이 잠재돼 있지만, 그 결말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마치 우리의 삶처럼 말입니다. 작품이 시작되기 전 조마조마한 긴장의 순간, 갑작스런 사건,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조각. 그의 조각은 한동안 끊겼던 우리 몸과 감성의 ‘반응’ 회로를 이어줍니다. 그의 작업을 ‘액션 조각’이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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