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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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인사로 장난치지 마라!

정권 바뀔 때마다 대대적 물갈이 반복 … 정보기관 위상과 개혁 체계적 논의 필요

  • 송문홍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songmh@donga.com

    입력2008-03-24 18: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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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원, 인사로 장난치지 마라!

    국가정보원 전경.

    “이번에도 개혁다운 개혁은 물 건너간 것 같다. 정권 초기마다 반복돼온 일이니 이젠 화낼 기력도 없고….”

    국가정보원 중견간부 A씨는 요즘 가까운 지인과 만날 때마다 푸념부터 내뱉는다. 그는 지난해 말 인사(人事) 때 진급하지 못했다. 당시 인사는 국정원 내 일각에서 ‘김만복 체제하의 수뇌부가 마지막으로 자기 사람들을 챙겨준 인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를 위해 인사 시기도 조금 앞당겨 대선 전에 해치웠다는 것이다.

    A씨처럼 ‘물먹은’ 사람들은 국정원 안에 차고 넘친다. 계급정년은 다가오는데 자기 자리는 만날 그 자리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줄’을 잡아 잘도 올라가는데, 자신은 밀리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판이다.

    사정이 이러니 중간간부만 돼도 벌써 ‘줄 대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학연, 지연, 하다못해 조그만 인연이라도 내부 고위직이나 정치권 유력자와 연결지을 게 없는지 주변을 살피게 된다. 개중에는 대통령선거 등 민감한 시기에 내부 정보를 들고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사람들도 있다. 정권교체 때마다 그런 식으로 ‘입신양명’한 선배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또 다른 중견간부 B씨의 말이다.

    “공무원 조직 중 정치바람을 가장 많이 타는 곳이 국정원이다. 정권교체기가 되면 제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을 정도다. 꼭대기에서부터 하급 직원에 이르기까지 권력 향배만 쳐다본다. 몇 단계 인사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거취와도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정원, 인사로 장난치지 마라!

    3월 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김성호 국정원장 내정자가 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국정원의 ‘새 피’가 과연 ‘헌 피’를 극복할 수 있을까?

    3월19일 1급 이상 60% 교체 인사 단행

    김영삼(YS) 정부 이래 정권교체 때마다 빼놓지 않고 나온 화두(話頭)가 정보기관 개혁이다. 정권 초기 임명된 정보기관장들은 저마다 ‘탈(脫)정치화를 통해 정보기관 본연의 역할과 기능에 충실하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문민화 이후 정권이 세 차례 바뀌도록 그 같은 약속이 현실화한 예는 매우 제한적이다. 과연 이번에는 ‘개혁’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성과가 있을 것인가.

    이명박 대통령은 2월29일 김성호 전 법무부 장관을 차기 국정원장에 내정했다. 이례적이라고 할 정도로 늦은 인선이었다. 그만큼 적임자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는 얘기다. 김 내정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김용철 변호사 증인출석 문제로 파행을 거듭하던 3월10일에는 차관급인 1, 2, 3차장 및 기조실장 인사가 있었고, 19일엔 1급 이상 고위간부 30여 명 중 60% 이상을 물갈이했다.

    역대 정권은 정보기관 개혁을 인적 쇄신으로부터 시작했다. 김대중(DJ) 정부 초기에 간부직원 500여 명을 무더기로 해직하면서 호남 인맥을 구축한 게 대표적인 예다. 당시 해직자들의 모임인 ‘국가정보원 강제퇴직 진상규명촉구위원회’ 송영인 상임대표의 말이다.

    “1998년 구조조정을 명목으로 중간간부급만 126명을 직위해제했는데, 이는 해당 직급의 80%를 자른 것이다. 문제는 그 빈자리의 상당 부분을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들로 채움으로써 정보기능 면에서 현저한 장애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거기에 더해 정권 차원의 이념 색깔까지 압력으로 작용해, 대북정보 관련 업무의 경우 회복에 상당한 시일이 필요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국정원 지역색은 이제 고질병”

    정권교체 때마다 지역색에 따른 대대적인 물갈이가 시행돼왔다는 점은 더욱 심각한 문제다. 호남정권 때에는 호남 인맥이, 영남정권 때에는 영남 인맥이 득세하는 식이다. 고위간부 출신인 C씨는 “국정원의 지역색은 이제 고질병이 됐다”고 한탄한다.

    “정권과 운명을 함께하는 1급 이상 간부는 논외로 치고, 그 이하 직급에서도 출세의 관건은 어느 지역 출신에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가 좌우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력이나 전문성은 둘째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조직개편을 어떻게 했든 기대했던 효과가 나올 리 없었다. 제대로 된 개혁을 하려면 내부에서부터 인정받는 인사원칙이 지켜지는 게 첫째다.”

    현재 이명박 정부하에서 진행 중인 국정원 인사에 대해서는 평가를 내리기가 이른 감이 있다. 내부에서는 긍정적인 평가와 비판적인 평가가 엇갈린다. 예컨대 세종문화회관 사장 출신인 김주성 씨를 기획조정실장에 임명한 것에 대해 “본격적인 구조조정의 신호탄”이라고 반기는 분위기가 있는가 하면, “YS 정부 시절 대통령 차남인 현철 씨의 수족이 되어 움직였던 김기섭 기조실장이 연상된다”는 의구심도 있다.

    수혈된 새 피가 국정원을 환골탈태시킬지, 아니면 헌 피와 뒤섞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지는 조금만 지나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정보학’은?

    정보기관 내부 ‘본래의 적들’ 심층연구


    국정원, 인사로 장난치지 마라!
    미국에는 국가정보체계 전반을 다루는 ‘정보학’이 하나의 학문분야로 정립돼 있다. 해마다 관련 전문서적이 쏟아져나오고, 많은 대학에서 강의과목으로 채택한다. 9·11테러 이후에는 정보체계의 문제점과 개혁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끊이지 않았다.

    지난해 출간된 리처드 베츠(Richard Betts)의 ‘정보의 적’(Enemies of Intelligence : Knowledge and Power in American National Security, 컬럼비아대학 출판부)도 그중 하나다. 국제정치 격월간지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 2008년 3/4월호 서평란에 소개된 이 책의 내용을 일부 소개한다. 정치적·사회적 배경이 다름에도 이 책이 지적하는 바가 한국의 정보기관 개혁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여론은 9·11테러 때 경보가 울리지 않은 것과 같은 ‘정보 실패(intelligence failure)’를 질타하지만, 이는 사실 정보기관의 속성상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정보 실패는 인간적 요인, 조직적 요인, 상황적 요인 등 어떤 것도 원인이 되어 발생할 수 있다. 흔히 정보기관 구성원들의 부주의와 부적절한 조직체계, 불완전한 정보 흐름 등이 대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실제로 밖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다.

    더 큰 장애물은 정보기관에 내재된 ‘본래적인 적들(inherent enemies)’이다. ‘본래적인 적들’이란 예컨대 (정보기관에 부여된) 상호 충돌하는 당위론, 정신력의 한계, 딜레마, 정보기관 내 부서들의 이율배반적인 상호작용, 설정된 목표들 간의 부적절한 거래 등의 총합이다.

    정보학 연구에서 이 부분은 그동안 거의 주목받지 못해왔다. 그러나 이런 요인들 때문에 예산상 제약이나 인원 부족 같은 단순한 문제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제한된 자원을 특정 목표에만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기곤 했던 것이다.

    한편 정보기관의 ‘본래적인 적들’은 예컨대 임박한 위험을 언제 어떻게 정책결정자에게 알릴 것인지에 대한, 좀더 복잡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는 단순히 정보기관은 경고 나팔을 불고, 정책결정자는 이에 즉각 반응하는 식의 사안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보고를 올렸을 경우의 위험과 보고를 아예 올리지 않았을 경우의 위험을 비교하고, 행동을 할 경우의 비용과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경우의 비용을 비교해보는, 좀더 복잡한 과정이 필요한 일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개혁이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정보기관 개혁은 가능하며,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정보기관 개혁을 추진하는 정책결정자들은 다음의 두 가지 불편한 진실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첫째, 정보기관에 관한 한 어떠한 개선이든 그것은 국지적인 것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 점. 둘째, 시민과 정치가들이 정보기관에 바라는 비현실적인 기대에 정보기관은 결코 만족스러울 정도로 부응하지 못하리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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