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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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아버지가 직접 묘 터 잡은 까닭은

  •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dgkim@core.woosuk.ac.kr

    입력2005-11-21 09: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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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건 아버지가 직접 묘 터 잡은 까닭은

    고형곤 박사 무덤 앞에 있는 하세시비(下世詩碑).

    철학과 교수, 대학 총장, 국회의원, 학술원 원로회원 등을 지내고 말년에는 산속 암자에서 10여년을 선 수행과 집필 작업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99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고형곤(高亨坤, 1906~2004) 박사. 고건 전 총리의 아버지로 더 유명한 그는 세상을 하직하면서 시 한 편(下世詩)을 무덤 앞에 남겼다.

    “山疊疊 水重重/ 何處去/ 山鳩一聲/ 飛去夕陽風/ 去不歸/ 江山寂寞/ 莫道/ 其餘事/ 天地玄黃/ 宇宙洪荒. 첩첩산중에 물길은 굽이굽이/ 어디로 가는가/ 산비둘기 한 마리/ 석양 바람에 울며 날아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강산만 적막하네/ 말하지 말게나/ 그 밖의 일들은/ 하늘과 땅, 검고도 누렇고/ 공간과 시간, 넓고도 끝이 없고.”

    후설의 현상학에 하이데거, 그리고 동양의 선 사상을 체화한 그의 하세시 의미가 무엇인지는 각자 해석에 맡겨야 할 것 같다.

    풍수에서 그의 무덤이 관심을 끄는 것은 그 아들이 대권후보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죽기 전에 자신이 직접 이 무덤 자리를 정했을 뿐만 아니라 무덤의 깊이며 좌향까지를 적시해놓았다는 점 때문이다(묘지 조성에 인부로 참여한 이의 전언).

    위치는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송천 마을 뒷산으로 300평 규모다. 이전에 전혀 무덤이 쓰이지 않았던 생자리로 고 박사가 생전에 천광(시체 묻을 구덩이)의 위치와 깊이, 좌향까지 정해놓아 인부들이 그대로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이미 소문이 난 탓인지 풍수 호사가들이 다녀간 발자국들로 인해 무덤 뒤로 이어지는 산등성이가 반들반들하다.



    풍수적으로 어떤 터일까에 대해서 시중의 술사들은 ‘지나치게 바위가 많고 천광 자리에서도 돌이 나와 마땅한 터가 아니다’라는 것이 중론이다. 한마디로 지나치게 기가 세니 좋지 않다는 것이다.

    우연일까?

    필자는 몇 년 전 전북 옥구에 있는 고 박사의 선영에 대해 졸저 ‘권력과 풍수’(2002년)에서 풍수평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역대 대통령이나 다른 대권후보들의 선영에서 받는 느낌이 편벽됨과 자기 독단이 강하게 드러나는 성정의 땅이라면, 이곳(전북 옥구 임피면 상갈마을 선영)은 원만하면서도 완벽한 성정의 땅이라는 점이다. 음모와 술수가 판치는 우리 정치판에서… 과연 그와 같은 인물이 어느 정도 지지를 받을지 의문이다.”(권력과 풍수, 163~164쪽)

    고건 아버지가 직접 묘 터 잡은 까닭은

    고형곤 박사 무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뒤에 조성된 고 박사의 자리는 그와 반대로 지나치게 강해서 좋지 않다는 게 술사들의 평이다.

    그러나 시중 술사들과 전혀 다른 평을 내놓은 이가 있어 흥미롭다. 장남식 풍수역학연구소 소장은 이 터를 극찬한다.

    “힘이 있고 생기가 넘치는 자리지요. 용의 비늘처럼 가지런한 바위들 행렬에 살아 있는 듯 꿈틀꿈틀 생기 넘치는 변화로움이 인상적입니다. 보통사람들은 바위를 관재수에 비유해 두려워하지만, 이는 큰 권력과 재물을 표현합니다. 큰일 속에는 작은 말썽도 있게 마련이고 그 정도 관재수는 유명세라 생각하고 수용할 줄 알아야 큰일을 할 수 있지요. 경쾌하고 기분 좋은 자리입니다.”

    물론 이 자리만 가지고서 풍수적으로 대권 여부를 점칠 수는 없다. 다른 대권후보들의 선영과 생가와의 비교 속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해야 가능하다는 것이 풍수 논리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필자가 자임하는 한반도 풍수사 정리 작업에 참고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임은 분명하다. 근 100년을 살면서 서양과 동양 사상을 체화한 한 사상가의 풍수관이 드러난 곳이기 때문이다.



    실전 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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