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5

2005.10.11

오막살이 돌밭에서 차 마시며 살리라

  • 입력2005-10-05 15: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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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막살이 돌밭에서 차 마시며 살리라

    율곡 이이가 태어난 집. 오죽헌.

    이른 아침에 율곡 이이가 태어난 오죽헌(烏竹軒)으로 가본다. 보물 제165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는, 우리나라 민가 중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이라고 한다. 검고 가는 오죽들이 학 다리처럼 늘씬하다. 바로 저 반듯한 집에서 율곡이 태어난 것이다.

    조선의 유생들은 율곡을 ‘해동의 공자’라고 불렀다. 그만큼 율곡에 이르러 조선의 성리학이 심화되고 주체적으로 수용됐던 것이다. 인조(1595~1649)가 전국 향교에 비치하라고 명한 ‘격몽요결’의 부록 ‘제의초(祭儀抄)’에서 제례와 차례 때 차를 올리라고 말한 그의 풍모는 참으로 다양하다. 병조판서 때 경연에서 선조(1552~1608)에게 십만양병설을 건의했고, 과거시험을 아홉 차례나 보았는데 모두 장원급제했다. 또 퇴계와 달리 이(理·본질)와 기(氣·현상)를 분리할 수 없다는 이기지묘(理氣之妙)를 주장했으며, 금강산에서 잠시 불교를 공부했던 독특한 경력 등이다.

    ‘해동의 공자’ 금강산에서 차 경험

    율곡은 금강산에서 처음으로 차를 경험했다. 어머니(신사임당)를 16세 때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19세 때 상심한 채 금강산으로 입산했던 것이다. 율곡의 말 상대는 주로 스님들이었다. 율곡은 옹달샘에서 찻물을 기르던 산승 일학(一學)을 놀라게도 한다.

    “대개 좋은 물이란 무거운 물입니다. 궂은 물은 흐리터분하니 무겁게 보이지만 사실은 좋은 물보다 가벼운 물입니다.”



    찻물로 좋은 중수(重水)와 그렇지 못한 경수(輕水)를 말했던 것이리라. 율곡은 또 다른 산승과 이런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주로 젊은 율곡이 묻고 노승이 답했다.

    “공자와 석가모니 중 어느 분이 성인입니까?”

    “그대는 이 늙은이를 놀리지 마시오.”

    “불교는 유교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 유교를 버리고 불법을 구하는 것입니까?”

    “유교에도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이 있소?”

    “색도 아니요 공도 아니라는 것은 무슨 경계입니까?”

    “눈앞에 있는 경계지요.”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르고 고기가 못 속에 뛰노는 것이 색입니까, 공입니까?”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오. 진리의 본체 그것이니 어찌 그런 시 구절에 비겨서 말할 수 있겠소?”

    “이름 지어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현상 경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본체라 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고 하면 유교의 오묘한 진리는 말로써 전할 수 없는 것이고, 불교의 이치는 글자 밖에 있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율곡이 노승과 깊은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금강산 입산 전에 봉은사에서 이미 이런저런 불경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율곡은 금강산에 머물면서 ‘산중(山中)’이란 다시(茶詩)를 남긴다.

    약초 캐다 홀연히 길을 잃었네/ 봉우리마다 단풍 곱게 물들고/ 산승이 찻물 길어 돌아간 뒤/ 숲 너머 차 달이는 연기 피어오르네(採藥忽迷路 千峰秋葉裏 山僧汲水歸 林末茶烟起).

    율곡은 산중 생활에서 익힌 차 살림을 저잣거리에서도 잇는다. 석천(石川)에게 준 다시 ‘차솥(茶鼎)에 불기운은 남아 있으나/ 찻물 끓는 소리(솔바람 같은 소리)는 조용하고…’ 등이나 이사평(李司評)을 만나 ‘차를 마시니 그나마 일도 없고/ 시를 이야기하다 선열(禪悅)에 드네’라고 읊조렸던 것을 보면 그의 차 살림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훗날 관직에서 물러나 ‘나는 오막살이 돌밭 다시 가꾸어 차 마시며/ 한평생 가난 속에 자족하며 살리라’ 하고 귀향하는 마음을 노래한 그야말로 차와 벗할 만했던 무욕(無慾)의 다인이 아니었나 싶다.

    ☞ 가는 길

    오죽헌은 강릉 시내에서 양양 방향으로 약 4km 떨어진 곳에 있다. 청량리역에서 강릉역까지는 기차를 타고, 오죽헌까지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율곡 이이가 태어난 집, 오죽헌.



    茶人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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