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3

2005.09.20

‘북한인권법’ 숨 고르는 이유는

국제사회 6자회담 고려 외관상 압력 주춤 … 회담 그 이후 후폭풍 북한 오히려 시간 없어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5-09-13 16: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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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를 고립, 압살하려는 양대 축이다.’북한은 한국의 우익과 미국, 일본이 제기하는 핵 문제와 인권 문제를 이렇게 본다. 북한은 미국의 북한인권 특사 임명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한국 내 일부 진보 세력의 시각도 다르지 않다. 동국대 강정구 교수는 한 기고문에서 “인권이라는 탈을 쓴 미국의 북한인권법은 북한 정권·체제 붕괴 책략 요소를 노골화한 저강도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열린우리당 J 의원은 북한인권법과 관련, 미국 인사들 면전에서 ‘미제(제국주의 미국)’라는 표현을 쓰며 항의하기도 했다.

    정부는 북한 인권과 관련해선 ‘조용한 외교’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북한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전략적 판단에서다. 서울이 북한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며 평양을 자극하면 어렵게 정상화한 남북 관계가 다시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지난해 3차 6자회담에서 고무적인 결과가 일부 나왔음에도 북한이 1년 남짓 6자회담과 남북회담을 거부한 데는 미국의 북한인권법 제정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정회된 4차 6자회담 재개가 미뤄졌던 것도 미국의 북한인권 특사 임명과 무관치 않다.

    인권은 북한의 ‘아킬레스건’이다. 국제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HRW)는 세계 60여개국 인권 유린 상황을 담은 ‘2005 보고서’에서 북한 인권 문제를 “심연 같다”고 표현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탈북자 증언을 통해 본 북한 인권 실태조사’ 용역 보고서엔 탈북자 중 75%가 “공개처형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포함돼 있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진정으로 무서워하는 것은 오히려 인권 문제”라고 말했다.

    인권단체들 불만 목소리 고조

    미국은 북한에 인권을 무기로 여러 차례 ‘잽’을 날렸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인준청문회에서 북한을‘폭정의 전초기지’라고 지목한 게 대표적이다. 올 초 일본 정치권도 일본인 납치 문제가 불거지자 북한인권법을 만들겠다고 나선 바 있다. 한국의 우익단체들도 덩달아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의 우익, 미국, 일본은 인권으로 북한을 옥죄는 3대 축이다. 그러나 한국의 우익은 힘이 없고, 미국의 부시 2기 행정부는 한결 부드러워진 모습이다. 일본의 집권 자민당은 북한인권법 초안을 마련해놓고 스스로 칼을 거둬들였다.



    올 초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급물살을 타는 듯했던 국제사회의 북한 인권 논의가 외관상 주춤해진 모양새다. 8월19일 부시 미 대통령은 미뤄왔던 북한인권 특사를 ‘조용하게’ 임명했다. 제이 레프코위츠 북한인권 특사는 9월6일 국무부에 첫 출근해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인사를 하고 업무를 시작했다. 레프코위츠 특사가 인도주의 문제를 다루는 민주·인권·노동국에 소속된 것은(북한 문제는 동아시아태평양국 소관이다) 6자회담을 고려한 것으로도 보인다.

    이렇다 보니 북한 붕괴를 주장해온 미국 인권단체들은 불만이 많다. 미국의 인권단체인 북한자유연합의 한 관계자는 “북한인권 특사는 한가한 자리가 아니다. 그를 만나 우리의 뜻을 전하겠다”고 말했다. 레프코위츠 특사가 뉴욕의 로펌 업무와 병행해 특사 일을 보는 것으로 알려진 데 대한 반발이다.



    레프코위츠 특사는 국무부에 상근하지도 않는 데다, 북한인권법에 명시된 ‘실탄’도 가지고 있지 않다. 레프코위츠 특사는 지난해 10월 발효된 북한인권법에 따라 총 2400만 달러의 예산을 북한 인권 증진과 탈북난민 지원을 위해 쓸 수 있으나 의회가 예산을 확보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인권법에 따르면 레프코위츠 특사는 2005년부터 2008년까지 해마다 △인권 민주주의 육성 프로그램에 200만 달러 △정보자유 촉진 조치(라디오 방송 지원 등)에 200만 달러 △북한 외부에서 제공되는 원조(난민 등에 대한 인도적 원조와 법률 지원 등)에 2000만 달러 등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예산은 붕 떠 있다. 상·하원의 세입·세출위원회에서 정부가 짠 북한 민주화 관련 예산안을 심의한 뒤 승인해줘야 한다(미국의 2006 회계연도는 10월1일 시작된다). 현재 하원에는 관련 예산이 빠져 있고 상원엔 들어가 있는데, 상원의 경우도 난민기금이라는 항목에 얼버무려져 있을 뿐이다.

    북한인권법의 또 다른 축은 언급했듯 일본이다. 올 초 납치자 사건과 가짜 유골 문제가 불거지면서 일본 의회는 인권을 무기로 북한 제재에 나서겠다고 천명했다. 대북 강경파로 분류되는 아베 신조 자민당 간사장 대리가 북한인권법을 발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아베 간사장 대리는 납치 문제가 불거진 뒤 북한에 대해 강경발언을 쏟아내면서 인기가 급상승해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북한인권법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다. 일본 제1 야당인 민주당은 2월25일 의원 입법으로 ‘북한인권침해구제에관한법률안’를 발의했으나 자민당이 북한인권법 초안까지 마련해놓고도 발의하지 않는 등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잽’ 잦으면 곧이어 스트레이트

    자민당의 북한인권법 초안은 “북한 인권 상황의 개선을 위해 활동하는 비정부기구(NGO)에 재정 지원 및 그밖에 필요한 지원을 행하고 이들 NGO와 밀접히 연계한다”고 규정해놓았다.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활동하는 NGO의 상당수는 북한의 체제 붕괴를 목표로 하고 있다. 북한 붕괴를 주장하는 단체에 돈을 주겠다는 것이다.

    미국의 북한인권법과 마찬가지로 일본판 북한인권법도 북한으로선 ‘정권 교체’ 혹은 ‘정권 변환’의 압력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강경파와 달리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북한과의 수교 협상을 재개하고 싶어한다. 연립 여당인 공명당도 “북한에 경제 제제를 가할 수 있다는 뜻이 충분히 북측에 전달됐다”면서 신중한 태도다.

    또 다른 축인 한국의 우익은 힘이 없다. 김문수 의원(한나라당)은 8월11일 북한인권 대사 설치 및 북한인권개선위 신설 등을 골자로 한 ‘북한인권법 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제사회에서 북한인권 개선 등의 활동에 협력하고 이에 대한 정부 정책을 효과적으로 집행하기 위해 외교통상부에 북한 인권대사를 설치하고, 북한인권 개선 등을 위한 중요사항을 심의·의결할 기구로 통일부에 북한인권개선위원회를 두자는 것이다.

    그러나 법안에 서명한 의원은 29명에 불과하다. 한나라당에서도 비판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북한인권법이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북한은 인권의 뭇매를 피해갈 수 있을까. 외관상 국제사회의 북한 인권 논의가 후퇴한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오히려 북한에 주어진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네오콘인 딕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여전히 미국의 대북 컨트럴 타워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도 네오콘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옛 소련의 전체주의를 연구하고 소련 붕괴를 디자인한 덕에 국무장관에까지 오른 라이스 장관에게 북한은 ‘폭정의 잔존 기지’나 다름없다. 한 외교 소식통은 “네오콘들은 4차 6자회담의 실패 이후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북한 인권 문제를 도외시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6자회담 실패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일본의 북한인권법마저도 퍼 올릴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북한 인권 문제를 적극 확산시키면서 북한 정권 교체를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은 국내에서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빌리면 ‘고립 압살의 축’이 숨 고르기를 끝내고 곧 북한을 다시 겨냥할 수 있는 것이다.

    ‘잽’이 잦으면 ‘스트레이트’가 날아오는 법. 4차 6자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돼야 하는 이유다. 한 대북 소식통은 “시간이 별로 없는 북한이 오히려 느긋해 보이기까지 하다”면서 “한국 정부가 직접적으로 북한 인권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미국과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북한 인권을 다루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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