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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불멸의 기록 <23>|NBA 최다득점 카림 압둘 자바

3만8387점 쏜 ‘득점 기계’

1960~80년대 후반까지 세기의 슛쟁이 … 1560경기 출전 한 경기 평균 25점 대기록

3만8387점 쏜 ‘득점 기계’

3만8387점 쏜 ‘득점 기계’

2004년 5월5일 자신의 출판기념회에서 저서에 사인하고 있는 카림 압둘 자바.

축구나 농구 같은 구기종목은 골을 많이 넣는 편이 이긴다. 당연히 골을 잘 넣는 선수가 스타다. 전 세계 모든 농구인들이 꿈꾸는 세계 최정상의 미국 남자프로농구(NBA)에서 무려 3만8387점을 넣은 선수가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 20년간 활약한 카림 압둘 자바가 그 주인공. 자바의 원래 이름은 페르디난도 루이스 알신돌이다. 프로복서 케시어스 클레이가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한 것처럼, 자바는 대학 시절 당시 유행하던 이슬람교에 심취해 이름을 이슬람 식으로 바꿨다. 카림은 아랍어로 ‘착하다’는 뜻이고, 압둘은 ‘알라신의 종’, 자바는 ‘강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스카이훅 슛 ·슬램덩크 자유자재

NBA에 요즘은 키가 2m30cm 안팎인 선수가 몇 있지만 자바가 현역으로 활약하던 시절에는 2m20cm를 넘는 선수가 거의 없었다. 자바는 키가 2m19cm나 되면서도 ‘스카이훅 슛’과 ‘슬램 덩크’라는 신무기까지 갖추었다. ‘스카이훅 슛’은 상대 수비수를 등진 상태에서 그대로 몸을 돌리면서 점프해서, 팔을 세운 채 손목 스냅을 이용해 던지는 고공 슛을 말한다. 사실상 막기가 불가능한 슛이다. 또한 자바가 슬램덩크를 하면 상대방 수비수들은 몸을 사리기에 바빴다. 급기야 다른 팀들이 이의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자바가 덩크 슛을 함으로써 득점을 너무 쉽게 하고, 자칫 농구대가 파손될 염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NBA는 이의를 받아들여 덩크 슛을 금지하는 조항을 만들었다. 물론 나중에는 이 조항이 없어졌지만, 만약 덩크 슛을 그대로 놔두고 3점슛 제도까지 있었다면 자바의 통산 득점기록은 4만점을 넘어섰을지도 모른다.

자바 때문에 미국 농구 규정이 바뀐 예가 또 하나 있다. 47년 뉴욕에서 태어난 자바는 파워메모리얼 고등학교 때부터 스타로 떠올랐다. 파워메모리얼 고교는 자바가 재학 중이던 3년 동안 95승6패라는 경이적인 승률을 올렸다. 95승 가운데 71연승의 대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자바가 고교 3년 동안 2000점 이상 득점하자 많은 대학에서 프로팀에 가까운 조건을 내걸며 스카우트 제의를 해왔다. 그러나 자바는 UCLA를 택했다. 존 우든이라는 명성 있는 코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바는 UCLA 1학년 때 전국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대학 1학년생은 전국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던 것. 그 때문에 각 대학 1학년들은 자기들끼리 경기를 벌여야 했다. 자바는 2학년이 되자마자 UCLA 주전으로 활약하면서 30연승을 이끌며 UCLA를 무적의 팀으로 만들었다. 그해 자바의 1년 평균 득점은 29점으로, 당연히 최우수선수(MVP)로 뽑혔다. 그런데 자바가 최우수선수상을 받으며 한 수상 소감이 대학농구의 역사를 바꿔놓는다. 자바는 기자들이 수상 소감을 묻자 “지난 1년은 너무도 지루하고 길었다. 여러분은 하늘을 나는 새가 새장에 갇혀 있을 때의 기분을 아는가”라고 말했다. 이 같은 내용의 인터뷰는 각 신문과 방송 스포츠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이듬해부터 미국 대학농구 리그에 1학년생도 참가할 수 있도록 규정이 바뀐다.



UCLA는 자바가 재학 중이던 2학년 때부터 4학년 졸업할 때까지 3년 동안 미국 정상을 유지했다. 자바는 학업 성적도 좋았다. 4년 내내 평점 B+를 유지했다. 자바는 69년 NBA 전체 드래프트 1순위로 밀워키 벅스에 드래프트되었다. 밀워키 벅스는 자바가 입단한 이듬해인 71년 시즌 우승을 차지했다. 물론 팀 창단 이후 첫 우승이다. 페넌트레이스 성적은 82전66승16패로 승률이 8할5리나 되었다. 자바는 팀 우승과 함께 정규리그 최우수선수상과 챔피언시리즈 최우수선수상 등 3관왕을 차지했다.

그러나 자바는 이후 슬럼프에 빠져들었다. 팀 성적도 하위권으로 곤두박질친다. 자바는 팀 성적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기를 트레이드(팀 사이의 선수 교환이나 이적) 시장에 내놓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밀워키 벅스는 LA 레이커스에 자바와 또 한 명의 선수를 내주고 3명의 선수를 데려오는 트레이드를 감행했다. 이때부터 밀워키 벅스가 NBA판 ‘밤비노의 저주’를 겪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후 밀워키 벅스는 단 한 번도 NBA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반면 자바를 데려간 LA 레이커스는 NBA 정상의 팀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메이저리그의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의 경우와 흡사하다.

물론 LA 레이커스가 자바를 데려오자마자 우승한 것은 아니었다. 79년 시즌까지 자바 개인적으로는 슛 블록 상, 리바운드 상 등을 받으며 특급 센터로서의 체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바를 받쳐주는 선수가 없어서 팀 성적은 그저 그랬다. 그런데 80년 역대 최고의 포인트 가드, 매직 존슨이 미시간대학을 졸업하고 전체 드래프트 1순위로 LA 레이커스에 입단했다. 그동안 고군분투하던 자바는 존슨의 어시스트를 받자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자바와 존슨은 82년, 85년, 87년 그리고 88년 LA 레이커스를 NBA 정상에 올려놓았다. 자바는 밀워키 벅스에서 1차례, LA 레이커스에서 4차례 등 모두 5차례나 우승했고, 정규리그 최우수선수상을 6차례나 차지했다. 그리고 올스타전에도 18회나 출전했다.

자바는 69년부터 75년까지는 밀워키 벅스, 75년부터 89년까지는 LA 레이커스에서 꼭 20년 동안 선수생활을 했다. 20년 동안 1560경기에 출전해 평균 25득점을 기록했고, 총 출전시간은 5만7466분이다. 자바가 활약하던 시절에는 3점슛이 없었기 때문에 2점짜리 필드골만 2만8307개를 시도해서 1만5837개를 성공시켰다. 나머지 6713점은 프리드로 득점이다. 자바는 찰스 바클리, 윌트 체임벌린, 칼 말론과 더불어 통산 2만 득점, 1만 리바운드, 4000어시스트를 돌파한 4명의 선수 가운데 1명이기도 하다. 자바는 42세이던 8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그리고 은퇴 뒤 2차례나 ‘최고의 센터’ 자리를 놓고 이벤트에 나섰다. NBA 팬 서비스의 일환으로 페트릭 유잉과 1대 1 농구 경기를 벌였는데 자바가 40대 9로 이겼다. 이후 에이즈 예방기금 모금운동 명목으로 특급 센터 출신의 줄리어스 어빙과 20분간 벌인 1대 1 농구대결에서도 41대 23으로 이겨 역대 최고 센터임을 입증했다.





주간동아 2005.04.19 481호 (p76~77)

  • 기영노/ 스포츠평론가 younglo54@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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