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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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전 좋아하시는 실향민 영화 재능 제가 못 따라가요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4-09-23 1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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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두전 좋아하시는 실향민 영화 재능 제가 못 따라가요
    영화감독 곽경택씨는 실향민의 아들이다. 아버지 곽인환씨(71)는 1·4후퇴 때 둘째 형과 단둘이 월남했다. 고향 평안남도 진남포에 부모님과 나머지 여섯 형제를 남겨둔 채. 피난 행렬에 떠밀려 부산에 정착했을 때 아버지는 17살, 큰아버지는 22살이었다. 성묘하러 갈 곳이 없는 실향민인 탓에 곽감독에게 추석은 곧 ‘큰집 가는 날’이었다.

    “추석 때마다 아버지는 큰아버지께 시계나 자동차 같은 걸 선물하셨어요. 열일곱 살 때 월남해 큰아버지 뒷바라지로 의대 공부를 마치셨거든요. 아버진 항상 큰아버지께 먼저 해드리고 나서야 자신의 필요를 채우셨죠. 추석 때는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큰아버지께 차곡차곡 보은(報恩)해나가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명절은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아침부터 종일 약주를 드시는 날이기도 했다. 이북에 있는 고향 이야기로 하루를 채우는 날이다. ‘형, 그때 거기 기억나?’ ‘막내 녀석, 이제는 장가갈 나이가 됐겠구나’ 등등.

    아버지는 평안남도 사람답게 녹두전을 좋아하셨다. 추석 상에는 어김없이 녹두전이 올랐다. 지금이야 어머니 연세도 많고 하니 갈아놓은 녹두를 사다 부쳐 먹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녹두를 맷돌에 손수 갈았다. 곽감독은 “녹두 가는 일이 생각보다 엄청 힘든 일”이라며 “어렸을 땐 무슨 맛인지 잘 몰랐는데, 요즘에야 녹두전이 참 맛있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녹두전 좋아하시는 실향민 영화 재능 제가 못 따라가요

    어린 시절의 곽경택 감독과 부모님.

    추석이 끝나면 곧 제삿날이 돌아왔다. 중양절(重陽節)이라 불리는 음력 9월9일은 봄에 온 제비가 다시 강남으로 돌아간다는 날이다. 예부터 추석 때 성묘하지 못한 이들이 이날 성묘를 갔다는데,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이북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 계시는지, 돌아가셨는지도 모른 채 제사를 지내곤 했다.



    이북이 고향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곽감독은 어렸을 때부터 북한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남북의 창’ ‘통일전망대’ 같은 TV 프로그램을 즐겨보곤 했다. 이 프로그램들에 나오는 북한 사람들이 혹시나 자신의 친척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학교에서 반공 교육을 받고 온 날이면 꼭 삼촌이 간첩이 되어 찾아오는 꿈을 꾸곤 했다. 곽감독은 “삼촌을 신고해 상을 받느냐,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숨겨주느냐 하는 문제를 그때는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한번은 남북 선수가 권투경기를 하는데, 저도 모르게 ‘죽여라’를 외치며 남한선수를 응원했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북한선수를 가리키시며 ‘고조, 쟈가 니 사촌형이면 어카간?’ 하시는 거예요. 미안한 마음이 엄청 들더라고요.”

    곽감독 아버지는 영화계에선 유명인사다. 영화 ‘친구’가 전국 관객 800만명을 돌파했을 때 손수 제작한 기념수건을 돌린 일화나 영화 ‘챔피언’에 직접 출연한 일 등 아버지는 곽감독의 ‘골수팬’으로 통한다. ‘챔피언’에서는 김득구가 동양챔피언 벨트를 들고 금의환향했을 때 환영행사에 참석한 강원도 고성군수로 등장했는데, 지금도 유창하게 사용하는 이북 사투리가 강원도 사투리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전격 캐스팅됐다.

    “아버지가 영화감독이나 영화배우를 했다면 저보다 더 잘했을걸요. 이북에 계실 때 마을 아이들 모아놓고 연습시켜서 연극을 벌이곤 했대요. 어릴 때 우리 형제들을 앉혀놓고 들려주시던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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