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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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중 끌려가신 그날 뒷모습 …아버지 가르침은 진행형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입력2004-09-23 17: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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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충영 변호사를 찾습니다.”

    “제가 이충영입니다.”

    “함께 가셨으면 합니다.”

    1950년 8월10일 아침, 11살(중1) 소년 수성은 붉은 완장을 찬 젊은 사람들의 고함소리에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서너 명의 젊은 ‘완장’들은 아버지를 빙 둘러쌌다. 그들을 노려보던 아버지는 이윽고 수성에게 눈길을 돌렸다.

    “못 돌아올지 모르니, 어머니에게 효도하고 큰아버지를 찾아 사람 사는 법을 배우도록 해라.”



    삼베 반바지를 입은 아버지는 그 말을 남기고 젊은이들 손에 끌려나갔다. 수성의 집이 있는 혜화동에서 국립도서관(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위치한 정치보위부로 가는 짧지 않은 길을 수성은 한걸음에 내달렸다. 점심을 거른 수성은 3시가 되고 4시가 될 때까지 맞은편 경선전기 모퉁이에서 쪼그리고 앉아 아버지를 기다렸다. 점심을 굶은 허기보다 힘없이 대문을 나서던 아버지의 뒷모습에 수성의 가슴은 찢어졌다. 그렇게 간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도 수성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소년 수성이 6·25전쟁 당시 헤어진 아버지와 다시 만난 건 설날이다. 그리고 추석날이다. 명절이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지인들을 통해 수성의 집을 찾아온다. 아버지의 오랜 지인들은 명절을 맞아 소년 수성을 앞에 앉혀놓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추억의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이수성 전 총리의 기억이다.

    “일제시대 판사를 한 것이 문제가 돼 납북됐지만 그전까지는 인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전쟁 전까지 아버지의 혜화동 사랑방은 전국에서 찾아오는 손님들로 시끌벅적했습니다. 2000포기의 김장김치가 모자랄 정도였으까요. 그분들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이 많습니다. 많은 얘기를 들었지요.”

    아버지의 무료 변론 덕으로 새 삶을 찾은 사람, 경북중학교 친구와 도쿄대학 동창들, 법조계 지인들 등. 아버지의 교류 폭은 광범위했고 ‘그늘’은 그만큼 컸다. 그들은 약자와 강자에 대한 아버지의 가치관을 수성에게 또렷하게 설명했고, 흑백필름처럼 수성의 기억 속에 가물거리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색깔을 확연하게 입혀주기도 했다. 아버지가 재판정에 한복을 입고 들어갔다가 사직을 해야 했던 비운과, 도쿄대학 후배들의 징병을 독려하라는 일본 헌병의 요청에 “가라고 하니 제군들 앞에 서 있으나 사실 할 말이 없다”는 말을 했다가 상부로부터 곤욕을 치른 것을 안 것도 50년대 어느 날 송편과 막걸리를 먹고 얼큰하게 취한 아버지 지인의 말을 통해서였다.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도 같은 사람이다”는 평등철학과 나눔의 미학은 지금도 이 전 총리의 가슴속에 남아 숨쉬는 아버지의 가르침.

    “아버님은 자상했습니다. 무엇보다 남에 대한 배려가 기억에 남습니다. 아버지가 더는 함께하지 않는데도 주변 사람들은 아버지 얘기를 했습니다”

    수성의 어머니 강금복 여사는 이른바 ‘신식 여자’였다. 경북여고 1회 졸업생으로 일본여자대학 국문과를 졸업했다. 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특출했다. 혜화동 사랑방에 손님이 들끓는 배경에는 어머니의 김치와 된장찌개가 한몫했음이 분명하다. 쇠고기를 얇게 저며 석쇠에 구운 너비아니, 살짝 불에 구워 손으로 찢어 고추장에 찍어 먹는 굴비, 북어포 요리 등. 어머니는 이를 통해 수성과 아버지의 조우를 도왔다. 이 전 총리는 ‘나의 젊은 시절’이라는 글에서 “우리 남매가 모친에게서 배운 것은 몸과 뜻을 쉽게 굽히지 않는 참된 자존심이었다”고 적었다. 이 전 총리는 1970년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환갑잔치를 열었다. 그때까지 어머니는 아버님의 제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이 전 총리는 두 사람을 기억한다. 바로 은사인 기당 이한기 선생과 아버지다. “아버지와 기당 선생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할까.”

    9월 중순, 추석을 앞둔 이 전 총리는 모처럼 만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았다. 이 전 총리는 작금의 상황을 놓고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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