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에 영화를 통해 우리가 잘 모르는 나라들에 대해 좀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보는 것은 어떨까. 미지의 문화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하는 보물 같은 영화들이 많이 있다. 이들 명작 가운데 오랫동안 잊혀져온 것도 있지만, 최근 DVD로 다시 출시되어 비디오가게에서 빌려볼 수도 있고 온라인을 통해 구입할 수도 있는 작품도 있다. 화질과 음향이 우수하고, 원래의 영화를 존중해 비디오테이프처럼 내용의 일부가 잘려나가지 않아 영화를 온전하게 즐기고 그 의미를 느낄 수 있다.
컵(The Cup)
감독 키엔체 노르부
티베트는 중국에 점령당해 주권을 잃은 나라다. 망명 독립운동을 하는 지도자 달라이 라마처럼, 망명한 티베트 라마승들이 실제로 연기를 해 시종일관 웃음과 행복을 선사하는 영화다. 티베트를 탈출한 두 소년이 인도의 사원에 도착, 출가한다. 사원은 엄숙하기는커녕, 어린 수도승들이 늙은 스님들 몰래 장난치고 다투고 하느라 늘 소란스럽다. 어린 수도승들이 가장 몰두하는 것은 수행이 아니라 월드컵이다. 프랑스와 브라질의 결승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어린 수도승들은 사원에서 금지된 계책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지만 결국 들키고 만다. 영화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놓고 불행을 만들지 않는 불교의 지혜를 재미있게 보여준다. 무기가 아닌 공을 갖고 싸우고, 싸움에서 이기는 나라는 땅이 아니라 컵을 차지하는 전쟁놀이인 월드컵에 빗대어, 티베트의 현실에 공감하게 된다. 사랑스럽고 감동적이며 포복절도할 이 코미디는 역시 라마승인 감독 키엔체 노르부가 부탄에서 만든 99년도 데뷔작이다. 훌륭한 가족영화다.
흑수선(Black Narcissus)감독 마이클 포웰, 에릭 프레스버거
영국의 마이클 포웰과 에릭 프레스버거 감독이 1947년에 만든 오래된 영화지만, 화질이 우수하고 테크니컬러로 촬영되어 색채가 화려하고 환상적이다. 영국인 수녀들이 히말라야 산맥 해발 2400m에 있는 산간 오지마을로 선교활동을 떠난다. 옛날 인도 후궁들의 궁전이었던 ‘여자들의 집’은 ‘마리아의 종’ 수녀원으로 바뀌고, 학교와 병원이 세워진다. 원주민에게 동화되어 살고 있는 딘이란 백인남자는 야성적이고 적대적이면서도 그녀들을 돕는 인물이다. 문명과 동떨어져 있지만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원주민들에게 수녀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딘은 수시로 젊고 아름다운 수녀 클로다(데버러 커 주연)에게 환기한다. 대자연의 신비롭고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넘치는 산 위에서 수녀들은 채소밭 대신 꽃밭을 가꾸고 기도와 수련 대신 수녀가 되기 전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행복한 기분에 젖지만, 결국 수녀원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신비한 자연과 문명의 대결이 낭만적이면서도 성적 함의가 짙은 묘한 매력의 영화다.
데르수 우잘라(Dersu Uzala)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환경 문제에 관한 최고의 영화로 꼽을 만하다. 러시아의 문호 아르세니예프가 극동지방의 탐험에 나섰던 자전적 이야기를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옛 소련과 합작해 감독 특유의 휴머니즘 물씬 풍기는 걸작으로 만들어냈다. 1902년 젊은 러시아 장교가 사냥꾼인 몽고 원주민 데르수 우잘라를 가이드로 앞장세우고 시베리아 탐험에 나선다. 자연은 인간을 돕는 존재이면서 경외심을 품어야 할 위험한 존재이고, 인간은 그 자연의 일부다. 광활한 시베리아에서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데르수의 삶과 여정이 시적이면서도 웅장한 스케일로 그려진다. 서구 문명 중심주의에 가득 차 있던 장교가 데르수의 지혜에 차츰 설득되어 화해와 우정의 관계로 들어서는 이야기는 문명과 자연의 대결로 표현된다. 이 대자연의 감동적인 서사시는 원본 필름이 훼손돼 화질이 좀 떨어지지만, 와이드 스크린 DVD를 볼 기회만 잡아도 행운으로 여길 만하다.
늑대와 함께 춤을(Dances with Wolves)
감독 케빈 코스트너
실제로 인디언의 피가 흐르는 배우 케빈 코스트너의 감독 데뷔작이다. 남북전쟁에서 업적을 세운 장교 던버(케빈 코스트너)는 인디언과의 전투가 많은 황무지에 부임해 막사에서 고독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 그가 인디언과 차츰 우정을 쌓고 사랑을 나누는 과정이 웅장한 스케일로, 또 인디언을 구함으로써 백인들의 반역자가 되어 사형당하게 된 그의 상황이 액션과 스릴로 펼쳐난다. 가슴 뭉클한 마지막 장면이 오랫동안 심금을 울린다. 영웅적인 백인들이 인디언을 무찌르는 대부분의 서부영화 가운데 인디언을 인간으로서 깊이 이해한 영화는 매우 드물다. ‘리틀 빅 맨’이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들’에서처럼 이 영화도 인디언이 존엄성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영화는 백인 장교가 인디언 문화에 동화돼가는 이야기를 통해 미국영화로는 드물게 인디언의 역사적 비극을 느끼게 하는 새로운 서부영화가 되었다.
옹박(ONG-BAK)
감독 프린차야 핀카엡
‘무에타이의 후예’라는 부제가 붙은 이 영화는 명작의 범주에는 들지 못하지만 무술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작품이다. 태국 영화라 주변적이고 시시할 거라는 선입관을 바꾸게 해주는 색다른 액션이 007영화 못지않은 스펙터클과 함께 펼쳐진다. 이국적인 자동차 경주와 태국 전통무술인 무에타이 액션이 얇은 줄거리를 덮어버릴 정도로 신선하다. 이소룡이나 이연걸을 뛰어넘는 액션연기를 보여주는 배우 토니 자에게서 새로운 몸의 등장, 새 무협스타의 탄생을 확신케 한 영화다. 그가 보여주는 모든 격투와 액션은 흔한 와이어 액션도, 스턴트맨도 쓰지 않고 직접 연기한 진짜 액션이기에 온 영화계와 관객을 압도했다. 마을의 수호신인 ‘옹박’이란 불상이 문화재 도굴꾼들에게 도난당하자 무에타이로 수련한 주인공 팅이 도시에 나가 살인과 폭력을 일삼는 조폭을 물리치고 옹박을 찾아온다는 내용. 프란차야 핀카엡 감독 작품. 지나치게 폭력적인 장면들이 많아 어린이들에게는 부적합한 영화.
왕과 나(The King and I)
감독 월터 랭
1956년에 만들어진 오래된 영화지만, 화려함과 예술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 영국 미망인 안나는 19세기 말 지금의 태국인 샴 왕국 왕실의 가정교사로 초빙된다. 그녀는 무례하고 고지식한 왕과 사사건건 부딪치지만 문화적 갈등을 극복하고 서로의 지혜와 장점을 인정해가며 서서히 가까워진다. 안나의 슬기로 샴 왕국의 위기를 해결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사랑의 감정이 싹튼다. 코미디이자 로맨스 멜로, 뮤지컬인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율 브리너와 데버러 커의 ‘Shall We Dance’ 노래와 춤은 잊을 수 없고, 선물로 왕에게 바쳐진 노예 처녀가 공연하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은 태국적 예술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극중극이다. 백인 우월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예로 들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 문화가 이토록 아름답게 형상화된 미국영화는 드물다.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이 음악을 맡고, 월터 랭이 연출한 57년 아카데미상 4개 부문 수상작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Spirited Away)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가장 일본적인 문화적 상상력으로 넘치는 멋진 애니메이션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온 세계에 선사했다. 10살 난 소녀 치히로와 그 부모는 이사 가다 길을 잃는다. 숲길 작은 터널을 지나자 인기척도 없고 불길한 느낌이 드는 온천장 거리가 나타난다. 아무도 없는 음식점에 들어간 치히로의 부모는 그곳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먹어치우고 돼지로 변한다. 정체불명의 소년 하쿠가 나타나 도망가라고 하지만, 치히로는 부모를 구하기 위해 무서운 마귀할멈 유바바가 경영하는 온천장에 종업원으로 고용돼 혹독한 노동을 하게 된다. 모든 귀신들이 목욕하러 오는 이곳에서 인간은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다. 돼지로 변한 부모를 어떻게 살려내 사방이 온통 바다인 마을을 빠져나갈 것인가. 치히로의 모험과 하쿠의 사랑이 시작된다. 일본 고유의 신화적 토속신앙이 잘 녹아 있고, 화려하고 전형적인 일본 그림다운 배경이 볼거리다. 여기에 한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펼쳐지는 잘 짜인 이야기는 코믹하고도 감동적이다.
아빠는 출장중(Otac na Sluzbenom putu)
감독 에밀 쿠스투리차
1948년 유고슬라비아가 시대적 배경이지만, 티토의 독재 아래 있던 유고슬라비아의 사회상을 반영한 영화다. 두 아들을 둔 평범한 중년남자 메사는 정부를 두고 있다. 정부는 결혼을 요구하지만, 메사는 가정을 버리지 못한다. 신문 연재만화를 보고 무심코 던진 ‘세상이 감옥’이라는 말을 정부는 정보국 직원인 처남에게 흘린다. 처남은 비행사와 내연관계를 맺으며 그를 노동수용소로 보내버린다. 재봉 일을 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아내와 자식들의 험난한 삶이 6살 난 아들 말릭의 시선으로 펼쳐진다. 유머, 코미디, 부조리, 풍자, 공산주의의 정치적 폭력에 대한 역사의식이 골고루 섞이면서 자유의 상징성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음악이 뛰어나고, 환상적이면서도 치열한 리얼리즘으로 동구 사회주의의 분위기를 잘 그려낸 에밀 쿠스투리차 감독의 걸작이다. 198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연소자 관람불가.
그린 파파야 향기(The Smell of the Green paparya)
감독 트란 안 홍
감각적인 영상미의 걸작이다. 1950년대 베트남, 어린 시골소녀 무이가 아들 셋이 있는 사이공의 부잣집에 하녀로 들어간다. 음악에만 탐닉하며 가산을 탕진하는 주인과 포목점으로 집안살림을 책임지고 무이를 죽은 딸처럼 귀여워하는 주인 마님, 늙은 할머니, 무이를 골탕먹이는 둘째 아들, 무이에게 살림을 가르치는 늙은 하녀의 가족생활사가 펼쳐지는 가운데, 무이는 가끔 집에 오는 큰아들의 친구 쿠엔에게 호감을 느끼며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해간다. 10년이 지나 가세가 기울고, 큰아들의 아내는 무이를 쿠엔의 하녀로 보낸다. 피아니스트가 된 쿠엔은 부자 약혼녀 대신 소박하고 순수한 그녀에게 끌린다. 아름다운 제목이 암시하듯, 시각과 후각 청각이 결합하는 공감각적 미학의 힘을 발휘해 영화는 베트남의 향수 어린 기억을 재현한다. 섬세한 관찰, 시적인 영상과 음향으로 다듬어진 베트남은 정말 아름답다.
중경삼림(Chungking Express)
감독 왕가위
신세대 감각의 이 영화는 홍콩의 두 형사 이야기다. 실연당한 형사 223은 폐기 처분되는 통조림의 심정이 되어, 유통기한이 하루 남은 통조림을 다 먹어치운 다음 술집에서 만난 금발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 페이는 매일 들러 음식을 사는 형사 663에게 마음이 끌린다. 663의 애인이 페이에게 집 열쇠와 편지를 맡기며 663 곁을 떠난다. ‘캘리포니아 드림’을 듣는 페이는 형사의 집에 몰래 드나들며 집안을 정리하여 그 여자의 기억을 지워주려 하고, 자신만의 사랑놀이를 한다. 결국 페이의 관심을 알아챈 663이 그녀에게 프로포즈하지만 페이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진짜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페이는 1년 뒤 스튜어디스가 되어, 패스트푸드점을 인수해 경영하고 있는 663 앞에 나타난다. 요즘 유행을 강타하는 최초의 엽기영화라 할 수 있으며, 왕가위 스타일의 시적 상상력이 사랑스럽다. 새로운 문화를 예고하는 음악의 힘과 실험적 영상도 돋보인다.
천국의 아이들(The Children of Heaven)
감독 마지드 마지디
소박한 영화 한 편의 힘이 이토록 셀 수 있을까.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가치를 모두 되찾는 듯한 느낌이다. 마지드 마지디 감독의 이 이란 영화는 형제애와 경제적 어려움과 행복에 관해 기억하게 하며, 진실하고 따뜻한 감동이 오래도록 남는 영화다. 어린 소년 알리는 엄마의 심부름을 하다 수선한 지 얼마 안 되는 누이동생 자라의 신발을 잃어버린다. 엄마는 아파서 누워 있고 집세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기 때문에, 한 켤레뿐인 누이동생의 신발을 잃어버렸다고 부모님에게 말할 수 없는 알리는 누이동생과 해결책을 찾아낸다. 오전반인 자라가 학교를 파하면 오후반인 오빠에게 운동화를 넘겨주는 것이다. 자라는 오빠 때문에 시험도 오래 치를 수 없고 도랑에 신발이 빠지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오빠에게 신발을 넘겨주기 위해 달려가지만, 동생을 기다리는 알리는 번번이 지각하여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는다. 어느 날 어린이 마라톤에서 3등을 하면 상품으로 운동화를 받는다는 포스터를 보고, 알리는 마라톤에 도전해 1등이 아니라 3등을 바라고 열심히 달린다.
시간도둑들(Time Bandits)
감독 테리 길리엄
문화는 역사 속에도 존재하며 상상이나 꿈속에도 존재한다. 1981년 영국의 테리 길리엄 감독의 공상모험 패러디 영화다. 물질욕에 가득 찬 부모를 둔 영국 소년 케빈은 잠자리에 들자마자 옷장에서 백마와 난쟁이 일당이 달려나오는 걸 목격하고 그들을 따라간다. 타임 홀이란 탈출구를 통해 시간여행을 하는 난쟁이 일당은 역사의 유산을 훔치는 도둑들이다. 그들은 창조주에게서 훔친 시간의 지도에 따라 여행하던 중, 80년대 영국에 도착하여 캐빈을 만난 것이다. 캐빈은 그들과 함께 나폴레옹도 만나고 중세의 로빈 후드도 만나고 고대 그리스 시대로 가서 아가멤논을 만나기도 한다. 그들은 시간의 지도를 손에 넣으려는 악마 앞으로 끌려오는데, 테크놀로지에 집착하고 열광하는 악마를 그들은 과연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 영화가 진행될수록 테리 길리엄의 독창적인 상상력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문명에 대한 코믹한 패러디도 재미있지만, 감독 특유의 스펙터클한 무대장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관객을 매료시킨다.
컵(The Cup)
감독 키엔체 노르부
티베트는 중국에 점령당해 주권을 잃은 나라다. 망명 독립운동을 하는 지도자 달라이 라마처럼, 망명한 티베트 라마승들이 실제로 연기를 해 시종일관 웃음과 행복을 선사하는 영화다. 티베트를 탈출한 두 소년이 인도의 사원에 도착, 출가한다. 사원은 엄숙하기는커녕, 어린 수도승들이 늙은 스님들 몰래 장난치고 다투고 하느라 늘 소란스럽다. 어린 수도승들이 가장 몰두하는 것은 수행이 아니라 월드컵이다. 프랑스와 브라질의 결승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어린 수도승들은 사원에서 금지된 계책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지만 결국 들키고 만다. 영화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놓고 불행을 만들지 않는 불교의 지혜를 재미있게 보여준다. 무기가 아닌 공을 갖고 싸우고, 싸움에서 이기는 나라는 땅이 아니라 컵을 차지하는 전쟁놀이인 월드컵에 빗대어, 티베트의 현실에 공감하게 된다. 사랑스럽고 감동적이며 포복절도할 이 코미디는 역시 라마승인 감독 키엔체 노르부가 부탄에서 만든 99년도 데뷔작이다. 훌륭한 가족영화다.
흑수선(Black Narcissus)감독 마이클 포웰, 에릭 프레스버거
영국의 마이클 포웰과 에릭 프레스버거 감독이 1947년에 만든 오래된 영화지만, 화질이 우수하고 테크니컬러로 촬영되어 색채가 화려하고 환상적이다. 영국인 수녀들이 히말라야 산맥 해발 2400m에 있는 산간 오지마을로 선교활동을 떠난다. 옛날 인도 후궁들의 궁전이었던 ‘여자들의 집’은 ‘마리아의 종’ 수녀원으로 바뀌고, 학교와 병원이 세워진다. 원주민에게 동화되어 살고 있는 딘이란 백인남자는 야성적이고 적대적이면서도 그녀들을 돕는 인물이다. 문명과 동떨어져 있지만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원주민들에게 수녀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딘은 수시로 젊고 아름다운 수녀 클로다(데버러 커 주연)에게 환기한다. 대자연의 신비롭고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넘치는 산 위에서 수녀들은 채소밭 대신 꽃밭을 가꾸고 기도와 수련 대신 수녀가 되기 전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행복한 기분에 젖지만, 결국 수녀원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신비한 자연과 문명의 대결이 낭만적이면서도 성적 함의가 짙은 묘한 매력의 영화다.
데르수 우잘라(Dersu Uzala)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환경 문제에 관한 최고의 영화로 꼽을 만하다. 러시아의 문호 아르세니예프가 극동지방의 탐험에 나섰던 자전적 이야기를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옛 소련과 합작해 감독 특유의 휴머니즘 물씬 풍기는 걸작으로 만들어냈다. 1902년 젊은 러시아 장교가 사냥꾼인 몽고 원주민 데르수 우잘라를 가이드로 앞장세우고 시베리아 탐험에 나선다. 자연은 인간을 돕는 존재이면서 경외심을 품어야 할 위험한 존재이고, 인간은 그 자연의 일부다. 광활한 시베리아에서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데르수의 삶과 여정이 시적이면서도 웅장한 스케일로 그려진다. 서구 문명 중심주의에 가득 차 있던 장교가 데르수의 지혜에 차츰 설득되어 화해와 우정의 관계로 들어서는 이야기는 문명과 자연의 대결로 표현된다. 이 대자연의 감동적인 서사시는 원본 필름이 훼손돼 화질이 좀 떨어지지만, 와이드 스크린 DVD를 볼 기회만 잡아도 행운으로 여길 만하다.
늑대와 함께 춤을(Dances with Wolves)
감독 케빈 코스트너
실제로 인디언의 피가 흐르는 배우 케빈 코스트너의 감독 데뷔작이다. 남북전쟁에서 업적을 세운 장교 던버(케빈 코스트너)는 인디언과의 전투가 많은 황무지에 부임해 막사에서 고독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 그가 인디언과 차츰 우정을 쌓고 사랑을 나누는 과정이 웅장한 스케일로, 또 인디언을 구함으로써 백인들의 반역자가 되어 사형당하게 된 그의 상황이 액션과 스릴로 펼쳐난다. 가슴 뭉클한 마지막 장면이 오랫동안 심금을 울린다. 영웅적인 백인들이 인디언을 무찌르는 대부분의 서부영화 가운데 인디언을 인간으로서 깊이 이해한 영화는 매우 드물다. ‘리틀 빅 맨’이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들’에서처럼 이 영화도 인디언이 존엄성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영화는 백인 장교가 인디언 문화에 동화돼가는 이야기를 통해 미국영화로는 드물게 인디언의 역사적 비극을 느끼게 하는 새로운 서부영화가 되었다.
옹박(ONG-BAK)
감독 프린차야 핀카엡
‘무에타이의 후예’라는 부제가 붙은 이 영화는 명작의 범주에는 들지 못하지만 무술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작품이다. 태국 영화라 주변적이고 시시할 거라는 선입관을 바꾸게 해주는 색다른 액션이 007영화 못지않은 스펙터클과 함께 펼쳐진다. 이국적인 자동차 경주와 태국 전통무술인 무에타이 액션이 얇은 줄거리를 덮어버릴 정도로 신선하다. 이소룡이나 이연걸을 뛰어넘는 액션연기를 보여주는 배우 토니 자에게서 새로운 몸의 등장, 새 무협스타의 탄생을 확신케 한 영화다. 그가 보여주는 모든 격투와 액션은 흔한 와이어 액션도, 스턴트맨도 쓰지 않고 직접 연기한 진짜 액션이기에 온 영화계와 관객을 압도했다. 마을의 수호신인 ‘옹박’이란 불상이 문화재 도굴꾼들에게 도난당하자 무에타이로 수련한 주인공 팅이 도시에 나가 살인과 폭력을 일삼는 조폭을 물리치고 옹박을 찾아온다는 내용. 프란차야 핀카엡 감독 작품. 지나치게 폭력적인 장면들이 많아 어린이들에게는 부적합한 영화.
왕과 나(The King and I)
감독 월터 랭
1956년에 만들어진 오래된 영화지만, 화려함과 예술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 영국 미망인 안나는 19세기 말 지금의 태국인 샴 왕국 왕실의 가정교사로 초빙된다. 그녀는 무례하고 고지식한 왕과 사사건건 부딪치지만 문화적 갈등을 극복하고 서로의 지혜와 장점을 인정해가며 서서히 가까워진다. 안나의 슬기로 샴 왕국의 위기를 해결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사랑의 감정이 싹튼다. 코미디이자 로맨스 멜로, 뮤지컬인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율 브리너와 데버러 커의 ‘Shall We Dance’ 노래와 춤은 잊을 수 없고, 선물로 왕에게 바쳐진 노예 처녀가 공연하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은 태국적 예술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극중극이다. 백인 우월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예로 들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 문화가 이토록 아름답게 형상화된 미국영화는 드물다.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이 음악을 맡고, 월터 랭이 연출한 57년 아카데미상 4개 부문 수상작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Spirited Away)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가장 일본적인 문화적 상상력으로 넘치는 멋진 애니메이션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온 세계에 선사했다. 10살 난 소녀 치히로와 그 부모는 이사 가다 길을 잃는다. 숲길 작은 터널을 지나자 인기척도 없고 불길한 느낌이 드는 온천장 거리가 나타난다. 아무도 없는 음식점에 들어간 치히로의 부모는 그곳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먹어치우고 돼지로 변한다. 정체불명의 소년 하쿠가 나타나 도망가라고 하지만, 치히로는 부모를 구하기 위해 무서운 마귀할멈 유바바가 경영하는 온천장에 종업원으로 고용돼 혹독한 노동을 하게 된다. 모든 귀신들이 목욕하러 오는 이곳에서 인간은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다. 돼지로 변한 부모를 어떻게 살려내 사방이 온통 바다인 마을을 빠져나갈 것인가. 치히로의 모험과 하쿠의 사랑이 시작된다. 일본 고유의 신화적 토속신앙이 잘 녹아 있고, 화려하고 전형적인 일본 그림다운 배경이 볼거리다. 여기에 한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펼쳐지는 잘 짜인 이야기는 코믹하고도 감동적이다.
아빠는 출장중(Otac na Sluzbenom putu)
감독 에밀 쿠스투리차
1948년 유고슬라비아가 시대적 배경이지만, 티토의 독재 아래 있던 유고슬라비아의 사회상을 반영한 영화다. 두 아들을 둔 평범한 중년남자 메사는 정부를 두고 있다. 정부는 결혼을 요구하지만, 메사는 가정을 버리지 못한다. 신문 연재만화를 보고 무심코 던진 ‘세상이 감옥’이라는 말을 정부는 정보국 직원인 처남에게 흘린다. 처남은 비행사와 내연관계를 맺으며 그를 노동수용소로 보내버린다. 재봉 일을 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아내와 자식들의 험난한 삶이 6살 난 아들 말릭의 시선으로 펼쳐진다. 유머, 코미디, 부조리, 풍자, 공산주의의 정치적 폭력에 대한 역사의식이 골고루 섞이면서 자유의 상징성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음악이 뛰어나고, 환상적이면서도 치열한 리얼리즘으로 동구 사회주의의 분위기를 잘 그려낸 에밀 쿠스투리차 감독의 걸작이다. 198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연소자 관람불가.
그린 파파야 향기(The Smell of the Green paparya)
감독 트란 안 홍
감각적인 영상미의 걸작이다. 1950년대 베트남, 어린 시골소녀 무이가 아들 셋이 있는 사이공의 부잣집에 하녀로 들어간다. 음악에만 탐닉하며 가산을 탕진하는 주인과 포목점으로 집안살림을 책임지고 무이를 죽은 딸처럼 귀여워하는 주인 마님, 늙은 할머니, 무이를 골탕먹이는 둘째 아들, 무이에게 살림을 가르치는 늙은 하녀의 가족생활사가 펼쳐지는 가운데, 무이는 가끔 집에 오는 큰아들의 친구 쿠엔에게 호감을 느끼며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해간다. 10년이 지나 가세가 기울고, 큰아들의 아내는 무이를 쿠엔의 하녀로 보낸다. 피아니스트가 된 쿠엔은 부자 약혼녀 대신 소박하고 순수한 그녀에게 끌린다. 아름다운 제목이 암시하듯, 시각과 후각 청각이 결합하는 공감각적 미학의 힘을 발휘해 영화는 베트남의 향수 어린 기억을 재현한다. 섬세한 관찰, 시적인 영상과 음향으로 다듬어진 베트남은 정말 아름답다.
중경삼림(Chungking Express)
감독 왕가위
신세대 감각의 이 영화는 홍콩의 두 형사 이야기다. 실연당한 형사 223은 폐기 처분되는 통조림의 심정이 되어, 유통기한이 하루 남은 통조림을 다 먹어치운 다음 술집에서 만난 금발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 페이는 매일 들러 음식을 사는 형사 663에게 마음이 끌린다. 663의 애인이 페이에게 집 열쇠와 편지를 맡기며 663 곁을 떠난다. ‘캘리포니아 드림’을 듣는 페이는 형사의 집에 몰래 드나들며 집안을 정리하여 그 여자의 기억을 지워주려 하고, 자신만의 사랑놀이를 한다. 결국 페이의 관심을 알아챈 663이 그녀에게 프로포즈하지만 페이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진짜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페이는 1년 뒤 스튜어디스가 되어, 패스트푸드점을 인수해 경영하고 있는 663 앞에 나타난다. 요즘 유행을 강타하는 최초의 엽기영화라 할 수 있으며, 왕가위 스타일의 시적 상상력이 사랑스럽다. 새로운 문화를 예고하는 음악의 힘과 실험적 영상도 돋보인다.
천국의 아이들(The Children of Heaven)
감독 마지드 마지디
소박한 영화 한 편의 힘이 이토록 셀 수 있을까.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가치를 모두 되찾는 듯한 느낌이다. 마지드 마지디 감독의 이 이란 영화는 형제애와 경제적 어려움과 행복에 관해 기억하게 하며, 진실하고 따뜻한 감동이 오래도록 남는 영화다. 어린 소년 알리는 엄마의 심부름을 하다 수선한 지 얼마 안 되는 누이동생 자라의 신발을 잃어버린다. 엄마는 아파서 누워 있고 집세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기 때문에, 한 켤레뿐인 누이동생의 신발을 잃어버렸다고 부모님에게 말할 수 없는 알리는 누이동생과 해결책을 찾아낸다. 오전반인 자라가 학교를 파하면 오후반인 오빠에게 운동화를 넘겨주는 것이다. 자라는 오빠 때문에 시험도 오래 치를 수 없고 도랑에 신발이 빠지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오빠에게 신발을 넘겨주기 위해 달려가지만, 동생을 기다리는 알리는 번번이 지각하여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는다. 어느 날 어린이 마라톤에서 3등을 하면 상품으로 운동화를 받는다는 포스터를 보고, 알리는 마라톤에 도전해 1등이 아니라 3등을 바라고 열심히 달린다.
시간도둑들(Time Bandits)
감독 테리 길리엄
문화는 역사 속에도 존재하며 상상이나 꿈속에도 존재한다. 1981년 영국의 테리 길리엄 감독의 공상모험 패러디 영화다. 물질욕에 가득 찬 부모를 둔 영국 소년 케빈은 잠자리에 들자마자 옷장에서 백마와 난쟁이 일당이 달려나오는 걸 목격하고 그들을 따라간다. 타임 홀이란 탈출구를 통해 시간여행을 하는 난쟁이 일당은 역사의 유산을 훔치는 도둑들이다. 그들은 창조주에게서 훔친 시간의 지도에 따라 여행하던 중, 80년대 영국에 도착하여 캐빈을 만난 것이다. 캐빈은 그들과 함께 나폴레옹도 만나고 중세의 로빈 후드도 만나고 고대 그리스 시대로 가서 아가멤논을 만나기도 한다. 그들은 시간의 지도를 손에 넣으려는 악마 앞으로 끌려오는데, 테크놀로지에 집착하고 열광하는 악마를 그들은 과연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 영화가 진행될수록 테리 길리엄의 독창적인 상상력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문명에 대한 코믹한 패러디도 재미있지만, 감독 특유의 스펙터클한 무대장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관객을 매료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