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9

..

휴대폰에 밀리고,경쟁에 박 터지고

국내 도입 100년 ‘유선전화’ 최대 위기 … 제 살 깎기 지적 속 가입자 뺏기 한창

  • 구미화 기자 mhkoo@donga.com

    입력2002-11-08 10:3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휴대폰에 밀리고,경쟁에  박 터지고
    1902년 한성과 인천을 연결하는 전화가 설치된 것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에 민간전화가 도입된 지 올해로 100년. 한때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전화를 설치하려면 공개추첨에 당첨되고, 웃돈을 얹어주어야 했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유선전화 가입자 수가 2300만명을 넘어선 지금 그 시절 유선전화의 위상은 역사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최근 유선통신 시장이 치열한 마케팅 경쟁으로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도 예전 같지 않은 유선전화의 위상을 반영하는 것. 국내 대표적인 유선통신 사업자인 KT와 하나로통신이 제각기 정액요금제를 내놓고 대대적인 광고 공세를 펴는가 하면, 초고속 인터넷 분야에서는 앞다퉈 파격적인 조건을 내밀며 경쟁사의 기존 가입자를 유혹하고 있다.

    경쟁의 발단은 민영화를 완료한 KT가 9월부터 실시하고 있는 ‘맞춤형 정액요금제’. KT 가입자들 중 정액요금제를 선택한 사람들은 지난 6개월 동안 이용한 요금의 평균 액수에 따라 1000원에서 5000원 정도만 더 내면 시내·외 전화를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다.

    KT에 따르면 9월10일 정액요금제 시행에 들어간 뒤 보름 만에 가입자가 250만명을 가볍게 넘어섰고 10월 중순에는 500만명 정도가 됐다. KT는 정액요금제 신청 기간이 만료되는 12월9일까지는 전체 유선전화 가입자의 절반 정도인 1000만명 가량이 가입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당초 정액제 가입 건수를 400만~600만건 수준으로 예상했던 것에 비하면 폭발적인 반응이다.

    이에 대해 KT측은 “이동전화에 밀려 사용량이 급격히 줄고 있는 유선사업자에게 일정한 수익을 보장해주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유선전화 이용에 대한 부담을 없애 서로에게 득이 되는 ‘윈윈 전략’이 성공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KT는 정액요금제 가입자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직원 할당제, 무단 가입 등 무리수를 둬 문제가 되고 있다.



    위기의식을 느낀 유선통신 제2사업자 하나로통신도 한 달 뒤인 10월15일, 월 5200원(초고속 인터넷 하나포스 이용자)에서 월 7700원을 내면 시내전화를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는 파격적인 ‘완전정액제’를 내놓았다.

    기존에 하나로통신 시내전화 기본료가 1000원(하나포스 가입자) 또는 3500원이었고, 가입자의 월 평균 통화요금이 3300~3600원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경쟁사의 주장대로 무리는 아니다. 기본요금이 추가되고, 통화량에 따라 달라지는 KT와 달리 완전정액제인 하나로통신의 정액요금제가 나오자 경쟁업체들은 ‘원가에도 못 미치는 요금’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문제는 KT의 경우 정액제 가입자의 통화량이 늘어난다고 해도 추가로 부담해야 할 비용이 거의 없는 반면, 하나로통신은 가입자가 KT 고객과 통화할 때 발생하는 접속료를 KT에 부담해야 한다는 것. KT측은 “하나로통신 정액제 가입자의 통화량이 늘어날 경우 접속료를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는 구조가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유선통신 시장의 소용돌이는 초고속 인터넷 분야에까지 미치고 있다.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가 1000만명을 넘어서면서 업체들이 신규 가입자보다 타사의 기존 가입자를 전환시키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 수개월의 무료 사용 기간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해지 위약금까지 대납하면서 고객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 KT는 8월부터 기존의 초고속 인터넷 ADSL보다 전송속도가 2~5배 이상 빠른 VDSL을 경쟁사의 ADSL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하면서 8개월간의 무료서비스와 위약금 대납까지 약속하고 있다. 이에 하나로통신도 가격을 낮추고 무료 사용 기간을 늘리는 등 공격적으로 맞서고 있어 ‘출혈 경쟁’이라는 지적까지 받고 있다.

    휴대폰에 밀리고,경쟁에  박 터지고

    10월부터 본격화된 하나로통신(왼쪽)과 KT의 정액요금제 광고.

    통신위원회는 이미 초고속 인터넷 시장의 불공정 행위에 대한 조사를 진행중이다. 통신위 관계자는 “초고속 인터넷 시장이 포화상태로 접어들면서 제로섬 게임으로 치닫고 있다”며 “타사 전환 가입자를 유치하면서 해지 위약금을 대신 내준다거나 수개월간 무료 혜택을 주는 것은 위법”이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유선통신업체간의 과당경쟁을 보는 시장의 반응은 냉담하다. KGI증권 조사분석팀 권재욱 차장은 “설비투자를 해놓고 가입자를 끌어들이지 못하면 수익을 낼 수 없는 상황이라 정부의 규제 및 감시가 심해지면 잠시 잠잠해지겠지만 곧 재개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문제는 외국에 비해 인터넷 요금이 절대적으로 싼 상황에서 요금을 계속해서 내리고 있어 수익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한번 내린 요금은 다시 올리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할 때 수익성 하락은 곧 도태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 지금의 과당경쟁이 업계에 치명적인 타격을 미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처럼 유선통신 사업자들이 무리수를 둬가며 대대적인 마케팅전에 돌입한 것은 이동전화에 밀려 유선전화 총 통화량이 96년 이후 매년 평균 10.8%씩 감소하고 있고, 이미 99년에 매출액 부분에서 무선통신이 유선통신을 앞지르기 시작한 절박한 상황에서 비롯된다(그래프 참조). 초고속 인터넷마저 포화상태에 이르러 유선통신사업자로서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

    휴대폰에 밀리고,경쟁에  박 터지고
    민영화를 마친 KT 이용경 사장은 “통신 시장은 유선에서 무선, 음성에서 데이터로 급속히 옮겨가고 있어 KT도 매출 감소와 성장 둔화 등 위기에 처해 있다”며 “초고속 인터넷과 음성전화의 경쟁력 강화를 통해 미래사업에 투자, 성장 엔진을 확보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결국 유선전화 정액요금제 경쟁, 초고속 인터넷 분야 출혈 경쟁과 같은 물러설 수 없는 기싸움의 내막은 쇠락해가는 유선전화의 수익성을 만회해보려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해 8월 말, KT는 ‘유선전화 퇴출’ 관련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KT 경영연구소 박대수 경제분석팀장은 “97년 1193억분이던 총 통화량이 지난해 847억분으로 줄어드는 등 계속되는 유선전화 발신량 감소 추세를 감안하면 올 연말에서 내년 초에 이르면 이동전화를 통한 발신량이 유선전화 발신량을 추월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이미 이동전화 발신량(MM, ML)이 유선전화 발신량(LM, LL)을 90% 수준까지 추격하고 있는 상황.

    특히 올 들어 유선사업자의 주 수입원이었던 유선에서 무선으로 거는 LM통화량마저 감소세로 돌아섰다는 보고서의 내용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한국 외국어대 최용제 교수(경제학)는 “99년 말 조사에 따르면 이동전화 가입자 한 명이 늘어날 때마다 무선이 유선을 대체하는 효과보다 유선에서 무선으로 거는 LM통화 창출 효과가 컸다”며 “2000년 후반기에 LM통화가 유선간 통화를 앞질렀는데 이는 새로운 수익원인 LM통화가 유선간 통화 감소분을 보완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동전화 보급으로 유선전화간 통화량이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만큼 유무선 통화가 창출되었다는 것.

    그러나 그는 “KT 보고서대로 올해부터 LM통화량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면 이는 장기적이지만 유선이 무선으로 대체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KT 경영연구소 박대수 팀장에 따르면 이러한 유선전화의 위기 상황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박팀장은 “미국의 통신규제위원회는 이미 미국의 통신사업이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다고 선언한 바 있고, 영국 통신회사인 브리티시 텔레콤(BT)을 포함한 외국의 유수 유선사업자들이 포럼을 만들어 정보를 교류하고,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처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연락해오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정보통신부 통신경쟁정책과 관계자는 “현재 상황이 유선통신 사업자에게 위기라는 것은 인정하나 부정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다”고 지적한다. “음성전화 시장은 장기적으로 무선으로 넘어간다 해도 유선은 데이터 부분에서 충분히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것. 그는 “예를 들어 인터넷 속도가 초당 20메가비트에 이르면 모든 가정에서 PC를 통해 HDTV를 볼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며 “그렇게 되면 통신과 TV가 융합해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현재 KT가 공급하는 VDSL의 속도가 초당 13메가비트임을 감안할 때 2005년이면 이 정도 기술은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런 속도는 세계적으로도 앞서나가는 수준. 유선통신 시장의 위기의식이 역설적으로 국내 IT(정보통신)산업의 수준을 끌어올렸다는 분석이다.

    그런 점에서 “끈이 없네”라는 광고문구를 유행시키며 ‘NESPOT’을 선보인 KT가 무선인터넷 사업에 뛰어든 것은 주목할 만하다. KT 관계자는 “본격적인 무선인터넷 사업으로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고, 평생번호나 콜렉트 콜 등 지능망 사업으로 유선전화 사용을 늘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KT는 홈미디어 홈디지털서비스 등 신규 수익원을 찾고 있다. 또한 KT가 금융 분야 진출을 검토하고 있다고 알려진 것도 기울어가는 유선전화 시장과 무관하지 않다.

    유선전화의 위상이 추락하고는 있지만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내다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아직까지 유선전화의 통화 품질을 이동전화가 따라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 하지만 무선통신이 각종 첨단 기능을 추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통신 시장을 어떻게 공유해야 할지 유선전화의 고민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