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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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안 돼… 안 돼… 돼” 미국 눈치 보는 유럽

겉으론 이라크전 반대 속으론 손익계산 …각국 국방장관들 은밀하게 전쟁 지원 약속

  • 박제균/ 동아일보 파리 특파원 phark@donga.com

    입력2002-11-08 12: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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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안 돼… 안 돼… 돼”  미국 눈치 보는 유럽

    9월26일 영국 런던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벌어진 이라크전 반대 시위 광경. 탱크 모형 위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얼굴 그림이 붙어 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프랑스의 자존심을 세웠다.”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르몽드는 10월20일 미국이 시라크가 주장해온 대(對) 이라크 ‘2단계 결의안’을 수용하자 이렇게 썼다. 평소 우파인 시라크에 대해 비판적인 좌파 신문 르몽드로서는 의외의 찬사였다. 미국은 대 이라크 ‘군사행동 불사’가 명시된 유엔 안보리 결의안 채택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시라크는 먼저 이라크에 대한 무기 사찰을 결의한 뒤, 이라크가 이에 불응할 경우 다시 군사행동을 결의하자는 2단계 방안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시라크의 외교적 승리는 프랑스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올 4월 치러진 대통령선거 1차 투표에서 19%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데 그쳤던 시라크의 지지율이 50%를 넘어섰다. ‘슈퍼 시라크’라는 평가까지 나왔다.

    하지만 시라크의 성공은 이웃 나라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거둔 승리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슈뢰더 총리는 9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반미(反美)’를 내세워 재선에 성공했다. 사민당의 슈뢰더는 총선 두 달 전까지만 해도 패색이 역력했었다. 그러나 제2차 대전 이후 미국 콤플렉스에 시달려온 독일인들은 슈뢰더가 ‘미국의 대 이라크전 반대’ 카드를 꺼내들자 주저 없이 그를 지지했다. 슈뢰더 총리는 10월29일 의회에서 한 연설에서도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할 경우 독일은 아무 역할도 수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슈뢰더의 공언 이후 독일은 유럽의 이라크전 반대의 메카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10월26일에도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등 독일 주요 도시에서는 각각 수천명이 참가한 반전 시위가 열렸다. 같은 날 스톡홀름, 코펜하겐 등 유럽 다른 도시에서도 반전 시위가 벌어졌다. 하지만 유럽 최대의 이라크전 반대 시위는 아이로니컬하게도 미국의 최대 맹방인 영국에서 열렸다. 9월28일 런던 시위에는 무려 40만명(경찰 추산 15만명)의 시민들이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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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유럽은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텍사스 야생마처럼 달리는 미국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인가? 9월24, 25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 19개 회원국이 참석한 가운데 나토 국방장관 회의가 열렸다. 냉전시대 나토의 상대였던 바르샤바조약기구가 있던 곳에서 처음 열린, 특별한 의미의 회의였다. 그러나 회의는 미국의 대 이라크전을 둘러싼 이견 때문에 초반부터 진통을 겪었다.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이라크전 반대’를 공언한 독일을 겨냥해 “미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구덩이에 빠졌을 때는 더 깊게 파지 말라’”고 말했다. 이에 격분한 페터 슈트루크 독일 국방장관은 이라크의 테러단체 연계 혐의에 대한 미 중앙정보국(CIA)의 브리핑에 불참해버렸다. 오죽하면 조지 로버트슨 나토 사무총장이 “적들이 지켜보고 있다”며 옐로카드를 던졌을까.

    그런데 재미있는 대목은 이 와중에도 각국 국방장관들이 ‘은밀하게(behind the scene)’ 럼스펠드에게 다가가 다양한 형태의 이라크 전쟁 지원을 약속했다는 점이다. 럼스펠드 장관은 회의를 끝내며 ‘개별 회원국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내 대답은 ‘예스’다. 이번 회의에 대한 만족도는 10점 만점으로 할 때 9점은 된다”고 흡족해했다.

    겉으로는 미국에 첨예한 날을 세우면서도 속으로는 미국 눈치를 보는 유럽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삽화다. 이런 유럽의 이중적 태도는 각국의 대미 이해관계와 맞물리면서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먼저 미국이 하는 일이라면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영국부터 들여다보자. 최대 규모의 반전 시위에서 드러나듯 여론조사를 해보면 이라크전 반대가 찬성보다 단연 높다. 그럼에도 윈스턴 처칠이 “영국의 국익은 유럽보다 대서양(미국)에 있다”고 선언한 이후 친미정책은 영국의 정치 전통이 됐다. 토니 블레어 총리가 ‘부시의 푸들’이라는 오명을 무릅쓰면서도 부시 대통령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고보는 것은 이런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리고 이 전통은 서유럽 국가 중 대미 경제 의존도가 가장 높은 영국의 현실에 뿌리박고 있다.

    독일은 모처럼 화력 좋게 이라크전 반대를 밀어붙이고 있다. 하지만 국제 역학 관계에서 갖는 의미는 작은 편이다. 1, 2차 세계대전의 업보를 안고 있는 독일은 세계 3위의 경제대국에 걸맞은 정치적 파워가 없다. 무엇보다 유엔 안보리 거부권이 없다. 선거공약이었던‘이라크전 반대’를 거둬들일 수야 없지만 미국과 계속 엇나가봤자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슈뢰더측이 절감하고 있다. 요시카 피셔 외무장관이 10월30일 워싱턴을 찾아가 콜린 파월 국무장관을 ‘내 친구 파월’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유럽 빅3’ 가운데 가장 미국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라가 프랑스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시라크의 도전은 프랑스의 대 이라크 경제관계, 국내 이민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아랍계를 의식한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란 게 프랑스 언론의 분석이다. 그나마 안보리 거부권이 없었다면 실패가 분명했을 도박이었다고 파리 소식통들은 말한다. 분명한 것은 프랑스도 이라크에 대한 전쟁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점. 다만 단계적 절차를 통해 국제 정치적 명분도 축적하고 더불어 프랑스의 자존심도 세우자는 것이다.

    ‘유럽 빅3’의 속내부터 이렇게 복잡한데 유럽연합(EU)이 미국에 일관된 목소리를 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유럽연합 정상회담 때마다 유럽이 미국에 대해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그때뿐이다. 국제형사재판소(ICC)에 대한 미군의 기소면제 특권 부여에 반발해왔던 유럽연합은 8월30일 미군에만 예외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후퇴했다. 같은 날 미국의 철강 세이프 가드에 대한 보복조치도 유예했다. 이라크 문제에 대해서는 회원국의 이해가 엇갈려 공통의 가이드라인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유럽이 중구난방일 수밖에 없는 밑바닥에는 뿌리 깊은 미국 콤플렉스가 자리하고 있다. 유럽연합 15개국 인구 3억7000만명은 미국 인구보다 많지만 국내총생산(GDP) 합계는 아직도 미국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확연한 군사력 차이가 유럽을 주눅 들게 한다. 유럽연합 15개국의 연간 국방비 합계는 1300억 달러(약 156조원). 한 해 3000억 달러(약 360조원)를 쏟아붓는 미국과 상대가 되지 않는다. 소수 정예로 ‘장거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유럽 군사력의 주축인 나토는 사실상 배제됐다.

    미국의 일방적인 군사적 지위에 변화가 없는 한 이라크를 전장(戰場)화하려는 미국의 일방주의를 비난하는 게 공허하다는 자성론이 유럽에서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유럽 각국의 대미 이해타산과 유럽연합 내의 파워게임이 맞물리면서 ‘미국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유럽’을 연출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유럽은 ‘대단한 곳(super place)’이기는 하지만 ‘초강대국(superpower)’은 아니다”며 다시금 유럽의 아픈 데를 건드렸다.

    유럽통합의 주춧돌을 세웠다는 헬무트 슈미트 전 서독 총리는 한 인터뷰에서 ‘얼마나 걸려야 유럽연합이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빨라야 한 30년?”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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