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동아’는 4월말, 지난 96년 일가족 16명을 이끌고 홍콩을 통해 귀순한 김경호씨의 맏딸 일가족이 북한을 탈출한 지 8개월이 다 되도록 동남아 제3국 국경지대의 산간 오지에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현지 취재를 감행했다. 그러나 이들 일가족의 신변 안전이 아직 확보되지 않은 점과 남북정상회담 일정(6월13~15일)을 감안해 취재를 모두 마친 뒤에도 기사화하는 것을 유보해 왔다. 명희씨 일가족은 ‘주간동아’ 현지 취재 이후 비로소 급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관계당국의 안내에 따라 6월7일 서울에 안착했다. 편집자
오랜 탈출기간… 건강은 비교적 양호
이들 일가족 4명은 현재 관계기관에 의해 서울시내 모처에서 귀순 동기와 탈출 경로 등에 대해 조사받고 있으며 조사 기간 중인 6월13일 어머니 최현실씨 등 서울의 가족과 극적으로 재회했다. 정부 관계자는 “현재 이들은 오랜 탈출 과정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건강한 상태”라고 전했다.
김경호씨의 맏딸인 명희씨는 70년대 중반 2년 반 동안 인민군 여군 하사로 복무한 경험을 갖고 있어 여군 출신으로는 드물게 귀순한 사례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또 명희씨의 맏아들, 즉 김경호씨의 외손자인 신 철군은 중국으로 탈출한 뒤에도 세 차례나 체포되어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는 구사일생 끝에 서울행에 성공한 것으로 드러났다.
기자가 이들과 최초 접촉에 성공한 것은 지난 4월 중순이었다. 지난해 8월 북한을 탈출해 동남아의 제3국에 은신중인 명희씨 일가족이 서울의 어머니 최현실씨에게 한달에 2, 3회씩 불규칙적으로 전화를 걸어온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최씨와 함께 제3국 현지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일단 기다려보기로 한 것이다.
4월17일. 김경호씨의 부인 최현실씨와 함께 오전 내내 기다린 끝에 드디어 명희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오마니!”
“응, 명희네. 몸은 괜찮나?”
“응, 괜찮아요. 왜 오신다더니 안 오는 거야요?”
현지 산악지대에서 오토바이로 이동하다가 떨어져 머리를 다쳤다는 지난번 통화 내용이 영 마음에 걸린 최씨의 걱정에 딸 명희씨는 애타게 구출해달라고 호소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딸 명희씨의 목소리에는 북한을 탈출한 지 6개월이 넘도록 가족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있는 데 따른 절망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열살배기 막내 철룡이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옆에서 보채고 있을 것은 보거나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어머니 최씨는 이때부터 기자와 함께 제3국으로 날아갈 것을 결심하고 출국에 따르는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출국 날짜는 4월24일. 동남아의 국경 오지에 고립되어 오도가도 못하는 꿈에 그리던 딸의 목소리를 전화선을 통해 듣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잠을 못 이루겠다는 최씨였다. 그러나 당국이 최씨의 출국을 막았다. 최씨는 “당국이 신변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며 출국을 만류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결국 출국 날짜가 늦춰졌고 최씨는 예약해 놓았던 비행기표마저 취소하고 서울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또 다른 곳에서도 발생했다. 비슷한 시기에 제3국 현지의 명희씨로부터 다급한 SOS 신호가 날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들 가족을 보호해 주던 현지인들이 체류 기간이 장기화하자 거액의 돈을 요구하면서 신변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상황은 다급해져가고 있었다. 최현실씨는 기자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4월26일. 현지와 연락도 닿지 않은 채 기자는 일단 방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들이 4개월째 숨어지내고 있는 제3국은 서울에서 직항노선이 개설되지 않은 지역. 방콕에서 1박한 뒤 제3국 수도를 경유해 거기서부터 현지까지 접근할 수 있는 교통수단을 찾아내야 할 판이었다.
4월28일. 제3국 수도에 도착했다. 기자가 묵고 있는 제3국 수도와 서울, 그리고 서울과 제3국 국경지대의 딸 명희씨를 오가는 삼각 통화 끝에 비로소 명희씨와 만나는 약속을 정할 수 있었다. 물론 명희씨는 전화통화를 위해서도 은신처에서 차량으로 30분 이상 이동하는 마을로 나와야만 했다. 먼저 시간 약속을 하고 그 시간에 맞춰 전화통화를 하는 줄타기식 접선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기자는 일단 이들이 신변 위협을 받고 있는 점을 고려해, 이들을 보호하던 현지인에게 이들과 동행해 약속장소에 나와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답변은 ‘불가능하다’는 것. 직감적으로 이들이 인질 상태로 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약속장소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기를 한 시간. 피부색이 까만 현지 원주민 한 명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가왔다. 그가 기자 앞에서 펴 보인 누런 종이에는 한글로 기자의 이름이 ‘송기영’이라고 잘못 적혀 있었다. 기자의 이름을 잘못 알아들은 명희씨가 원주민을 통해 들려 보낸 ‘접선 암호’였던 셈이다. 일단 ‘명희씨 가족을 만날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기서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길도 없는 산속을 달리기 한 시간. 대낮인데도 컴컴한 오두막 한 귀퉁이에서 명희씨가 얼굴을 내밀었다.
“제가 김명희에요….”
한눈에 보기에도 멀리서 찾아온 사람을 생각해 애써 웃음지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자신만 남겨두고 한국으로 탈출한 가족을 찾아 두만강을 넘은 지 9개월만에 어머니의 소식을 들고 찾아온 한국인이었다.
서울에서 비행기만 세 번을 갈아타는 2박3일의 여정 끝에 도착한 은신처에서 극비리에 만난 명희씨의 네 가족은 당시만 해도 주변 사람들과 언어도 통하지 않는 상태에서 극도의 공포감에 떨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에서 이곳까지 일가족을 안내해 준 조선족 일행이 자신들을 현지에 버려놓고 떠나버린 뒤 줄곧 손짓 발짓으로 현지인들과 의사소통하며 은신처에 숨어지내왔다.
명희씨의 은신처는 해발 900m나 되는 고산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매일같이 섭씨 30도가 넘는 고온이었지만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것은 물론 식수 사정도 여의치 않았다. 게다가 이곳은 94년까지만 해도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었던 위험 지역 중 하나였다. 이들 가족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마을로 내려오지도 못한 채 거의 24시간을 산간 오지에 갇혀 지내왔다. 이들이 그동안 할 수 있었던 일은 남들의 눈을 피해 산골 오두막에서 닭을 키우거나 바나나를 수확하는 일 정도가 고작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북한 출신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 곧장 수용소에 수감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하루하루를 숨죽이며 살아왔던 것이다.
명희씨 가족이 북한을 탈출해 중국에 은신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7월부터였다. 정부당국도 이들의 탈출 직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구출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사실상 위험 지역에 방치해왔다. 정부당국은 한국의 김경호씨 가족에게 제3국까지만 데려다 놓으면 정부가 이들의 귀순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김씨 가족은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강력하게 반발했었다.
김명희씨와 세남매 등 일가족이 동남아 산간지대에 당도한 것은 지난 1월경. 북한 탈출 후 5개월간 중국내 도시에서 은신하다 제3국을 목표로 기약할 수 없는 탈출의 길을 떠난 지 보름만의 일이었다. 현지 안내인을 포함한 이들 일행은 중국 내에서는 3박4일간 기차여행으로 강행군했고 제3국과의 국경지대에서는 관광객으로 위장한 채 탈출 행로를 이어나가기도 했다.
국경을 무사히 넘은 뒤에는 안내인을 앞세워 아이들과 함께 나흘 밤낮을 내리 걸은 끝에 은신처에 도착했다. 여성과 아이들만으로 이뤄진 이들 일가족은 탈출 과정에서 현지 안내인을 구하지 못해 산악지대에서 밥먹듯이 노숙을 하기도 했으며 먹을 것이 떨어져 나무뿌리를 씹으면서 며칠씩 버텨오기도 했다.
그러나 은신처에 도착한 뒤부터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부터 이들을 안내하던 중개인들이 발을 빼고 줄행랑을 놓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실낱 같은 희망이 사라지더라구요.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생각에 ‘죽었구나’ 하는 생각뿐이었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아들 신 철군이 기억하는 당시 상황은 한 마디로 ‘절망’ 그 자체였다. 국내의 정부 관계자들과 현지 공관은 이들의 고립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국내의 움직임은 이들 일가족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김명희씨가 함경북도 회령에 살던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김경호씨 일가족 17명이 탈출을 감행하기 4개월여 전인 지난 96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뒤, 함경남도 원산에 따로 살던 명희씨 가족은 회령의 김경호씨 일가와는 왕래가 뜸해 자신만 남겨둔 채 일가족 모두가 탈출을 감행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유일하게 의지할 대상이었던 남편마저 범죄에 연루되어 감옥에서 세상을 등져버렸다. 김경호씨 부부와 2남4녀, 그리고 손자 손녀들까지 포함한 20여명의 대가족 중 맏딸 명희씨와 세 자녀만이 북한에 달랑 남은 것이다.
명희씨가 자신을 제외한 전 가족이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탈출로부터도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회령을 찾아갔던 외손자 신 철군이 외할아버지댁에 낯선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이 사실을 어머니 명희씨에게 알려왔다. 당황한 명희씨는 이때부터 사회안전부 국가보위부 등을 찾아다니면서 가족의 소재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김경호씨 가족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주변에 알리지 말라’는 것뿐이었다. 주변의 지인들도 모두 김경호씨 일가족의 행방에 대해 ‘쉬쉬’하는 것으로 남은 가족 4명에 대한 마지막 연민을 대신했다. 그러나 이런 주변의 반응을 통해 자신을 제외한 모든 가족이 중국으로 탈출했다는 것을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온가족이 모두 남조선에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요. 온통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고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명희씨는 자기만 남아 세 남매를 데리고 살아갈 걱정에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이때부터 명희씨는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뿐 아니라 자녀들과도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나이가 어린 딸 윤미와 막내아들 철룡이를 구호기관에 맡겨놓은 채 명희씨와 맏아들 신 철군은 생계전선에 발벗고 나선 것이다. 때로는 음식 장사나 식모살이를 하기도 했고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끼니를 이어가기도 했다. 어느 하늘 아래 있는지도 모르는 부모형제들의 빈자리는 더욱 커보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구호기관에 맡겨놓은 아이들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 명희씨는 “구호기관이라고 해보았자 시설이 형편없기 때문에 일부 병약한 사람들은 오히려 구호기관에 수용되었다가 시체로 변해 나가기도 한다”고 증언했다.
명희씨가 탈출을 결심한 것은 대략 이 무렵이었다. 함경북도 무산에 거주하면서 감자 이삭을 주워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던 시절이었다. ‘중국에 가지 않겠느냐’는 한 조선족 여인의 권유에 명희씨는 귀가 솔깃해졌다. 물론 탈출 가능성보다는 위험이 앞섰다. 중국 공안이나 북한 보위부 요원들에 의해 체포될 가능성이 높은데다 부녀자들을 인신매매하는 폭력조직이 활개친다는 소식에 몸서리가 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감도 한국에 살고 있는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는 못했다. 결심이 선 명희씨는 큰아들에게 편지를 써놓고 단신으로 두만강을 넘었다.
‘할머니의 소식을 알아오마. 너는 절대로 집을 떠나지 말고 내가 연락할 때까지 이곳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이미 열일곱살인 철이도 어머니의 고통을 앞에 두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명희씨의 당부와는 달리 철이는 어머니가 조-중 국경을 넘은 지 불과 5일만에 중국행을 선택했고 옌지(延吉)에서 또래 소년들과 어울려 장기간 체류했었다. 이때부터 한국으로 탈출해버린 가족의 소식을 찾아 어머니와 아들이 한 도시에서 따로따로 헤매는 비극이 연출된 것이다.
그 뒤 명희씨가 한국의 어머니와 3년만에 처음 연락이 닿을 수 있었던 것은 김씨 일가가 96년 귀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김씨의 장인 최영도씨와 그의 동생 최전도씨 덕분이었다. 재미교포인 최영도씨는 당시 북한을 여러 차례 드나들면서 탈출 계획을 수립했고 뉴욕에 거주하면서도 실질적으로 탈출 과정을 총지휘한 인물이다. 여기에다 서울에서 병원을 경영했던 최씨의 동생 최전도씨의 역할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명희씨는 중국 은신 도중 바로 이 최전도씨가 운영하던 베델의원의 이름을 순간적으로 기억해낸 것이다. 가족이 명희씨 일가족만 놓아두고 북한을 탈출하기 전 미국의 외할아버지 최영도씨가 어머니 최현실씨에게 보내왔던 사진에서 언뜻 보았던 이 병원 이름은 명희씨와 어머니 사이에서 끊어졌던 소식을 잇는 실낱 같은 단서가 됐다. 중국에 있는 조선족 중개인에게 이 병원 이름을 대고 서울로 어머니의 소재를 확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놀랍게도 서울의 병원 이름을 대준 뒤 한시간반 만에 연락이 왔어요. 3년 만에 서울에서 들려오는 어머니 목소리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명희씨 가족은 서울의 어머니를 축으로 해서 부챗살 모양으로 중국을 횡단하는 대탈출 작전을 시작했다. 서울의 어머니는 안내인을 고용해 딸 일가족이 머물고 있던 S시로 급파했고 명희씨 가족은 이때부터 어머니를 대신한 이 안내인과 함께 목숨을 건 탈출 행로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모녀 상봉에 대한 기대도 잠깐, 탈출 작전은 보름 만에 동남아 제3국에서 장벽에 부닥쳤고 이들 일가족은 이때부터 5개월간 공포에 질린 채 고립 상태에 놓여 있다가 6월초에야 인접국 공관의 도움으로 북한 탈출 10개월 만에 꿈에 그리던 가족의 품에 안기게 된 것이다. 귀순 당시 이미 앓고 있던 중풍 후유증으로 인해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물론 심한 언어장애에 시달리고 있는 김경호씨는 딸의 귀순 소식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어머니 최현실씨는 “도저히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다”며 10개월간 조바심 치던 가슴을 비로소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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