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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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낙서, 문화인가 환경파괴인가

올림픽 앞두고 시 당국 청소 계획에 시민들 찬반 팽팽…장난 뛰어넘은 수준작도 상당수

  • 입력2006-01-31 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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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의 낙서, 문화인가 환경파괴인가
    오는 9월 15일에 개막되는 시드니 올림픽의 키워드는 뭐니뭐니해도 ‘환경‘이라는 단어가 될 것이다. 시드니 올림픽이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시도되는 ‘그린 올림픽‘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는 시드니 올림픽 조직위(SOCOG)는 이번 올림픽에서 환경문제가 지나치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호주인들의 주요 관심사이면서 ‘21세기 화두‘인 환경문제가 올림픽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논의되기를 바랄 뿐이다.

    지난 2월초, 올림픽 준비상황을 최종 점검하기 위해 사마란치 IOC위원장과 많은 IOC 위원들이 시드니를 방문했다. 점검받는 입장이 된 시드니 시 당국은 올림픽 개최 도시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시드니 거리의 낙서를 지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을 전헤ㅐ들은 일부 시민들이 ”낙서도 한 도시의 문화인데 왜 쓸데없는 일을 하느냐”며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무슨 소리냐. 낙서는 쾌적한 관광도시인 시드니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환경파괴행위(Vandalism)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올림픽 개최 도시에서 난데없는 ‘낙서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지난 2월 중순경, 시드니 올림픽 주관 방송사인 채널7에서 보도한 시드니 낙서회 소속의 한 맴버를 아주 어렵게 만나 그들이 말하는 ‘작전‘을 참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시드니 서북부에 위치한 E역에서 펼쳐진 낙서회 M팀의 ‘낙서작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것.



    20대 초반의 청년 3명이 베낭을 메고 역 구내에 들어와 일반 승객처럼 벤치에 앉아서 작전을 최종 점검했다. 주변에 역무원이 있는지 확인한 다음 한 명은 망을 보기 시작했고 나머지 두 명은 ‘오늘의 캔버스‘가 될 자선단체의 의류수집 박스에 접근했다.

    그 중 한 명이 오늘의 아티스트. 나머지 한 명은 순서에 따라 여러가지 색깔의 페인트가 담긴 스프레이를 챙겨주고 스케치 북도 들어주었다. 그들의 치밀한 준비과정과는 달리 본격적인 ‘작전‘은 아주 짧은 시간 진행됐다.

    약 5분만에 그려진 그날의 작품명은 ‘눈물‘이었다. ‘스미스 패밀리‘라는 자선단체의 눈물겨운 노력에 비해 시민들의 참여도가 극히 낮은 것을 풍자한 것. M팀의 주된 메뉴는 자꾸만 야박해지는 호주인들의 인심을 꼬집는 것이다.

    대부분의 ‘작전‘에 동원되는 인원은 2인 1조다. 특별한 대작이거나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의 ‘작전‘일 경우 여러 명이 동원되기도 하나 그런 일은 되도록 피한다.

    시드니 낙서회는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극히 꺼리는 비밀조직이다. 그러나 보니 회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경우는 거의 없고 모임장소도 수시로 바뀐다. 한때는 회원수가 100명을 넘은 경우도 있었지만 지금은 30명 정도에 머물고 있다.

    회원들의 성향은 ‘자유 의지‘가 아주 강하고 어떤 규칙에 얽매이는 것을 극히 싫어한다. 그러나 그들 나름대로의 조직관리와 품격유지를 위해 최소한의 강령을 정해 지키고 있다.

    강령의 첫째 조항은 인종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호주가 다민족-다문화 사회인데다 인종적 편견을 가진 사람은 아티스트(?)가 될 수 없다는 것. 그들의 강령은 강제규정이 아닌 자율에 맡기는 권고문 같은 것이지만 첫째 조항만은 강제규정이어서 어길 경우 회원자격을 박탈당한다.

    실제로 아시안의 호주이민을 반대한다는 뜻의 ‘아시안 아웃‘(Asian Out)로고나 나치 마크 등을 사용한 몇몇 회원들이 영구 제명됐다.

    그 외에 눈에 띄는 조항들은 종교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는 것과 예술적인 효과를 위한 경우를 제회하고는 단색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것 등이다.

    또하나 재미있는 조항은 ‘낙서에 성역은 없다‘라는 거창한 조항이다. 처음엔 조금 의아스럽게 느껴지지만 시드니 낙서회가 자랑하는 몇 게의 ‘전설‘을 들어보면 그 조항을 수긍하게 된다. 그들이 경찰서 담벼락에 목매 자살한 원주민의 그림을 그리고, 교도소 담에 새 한 마리를 그리는 등 예상을 뛰어넘는 대담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담성이 지나쳤던 것일까. 1999년 4월초, 시드니의 성역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드 파크 전쟁추모담에 낙서하는 일탈행위를 저질러 시드니 시민들의 집중포화를 받았다. 그것도 섹스와 관련된 낙서였으니 아무리 성역을 거부하는 낙서인들이라고 하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착을 둔 셈이었다.

    ”낙서의 자유는 민주시민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다”라는 낙서인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낙서행위가 실정법을 위반하는 엄연한 범법행위이기 때문에 항상 위험부담이 따른다. 낙서를 하다가 붙잡히면 대부분 벌금형 정도의 가벼운 처벌을 받지만 누범자의 경우는 실형을 선고받는 경우도 있다.

    폭력세계에서 전과를 무슨 훈장처럼 자랑하는 경우와는 다르지만 낙서인들의 세계에서도 자랑삼아 떠들어대는 아슬아슬한 무용담을 자주 듣게 된다. 또한 ”낙서를 법으로 인정한다면 절대로 낙서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는 낙서인들의 고백을 들어보면 그들의 행위가 철옹성을 쌓고 있는 제도권에 대한 도전이며 마땅한 탈출구를 찾지 못한 열패자들(Under Dogs)의 ‘장난질‘성격이 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장난질‘도 지나치면 목숨까지 빼앗기는 화를 불러오기도 한다. 전동차에 매달려서 정신없이 낙서하던 소년이 마주오는 전동차를 피하지 못해 목숨을 잃은 사건이 발생한 것. 그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추억 만들기 날(Muck Up Day)의 예행연습 중이었다고 한다

    지난 60년대 초부터 시작됐다는 ‘추억 만들기 날‘은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이 모교에서 졸업 만찬을 가진 다음 야음을 틈타 학교 곳곳에다 낙서 등을 해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날로 대부분의 호주 학생들이 참여하는 집단일탈행위다.

    평생을 교직에 몸담았다가 지금은 은퇴한 프레드 도빈씨(74)는 ”미국의 싸구려 문화가 영화나 TV 등의 대중매체를 통해서 유입된 결과다. 별다른 악의 없이 재미로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나의 재미를 위해서 남에게 불쾌감을 주고 재산상의 피해를 보게 하는 행위는 민주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자신들이 공부했던 학교에 마구 페인트를 해놓고 기물을 파괴한 것을 목격하고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다음 해부터는 졸업만찬이 끝난 다음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밤샘 보초를 서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드니 낙서회의 브라이언 콤머포드 회장(34)의 의견은 다르다. ”추억 만들기 날이 어차피 존재하는 전통이라면 하나의 문화로 인정하고 보다 건전한 방식으로 치를 수 있도록 교사와 학부모가 도와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지난 3월 15일 100만명에 육박하는 호주인들이 참여한 호주대청소의 날에 마구 휘갈겨 쓴 낙서가 아니라 낙서인들이 공들여 그린 거리의 예술작품들까지 대부분 지워졌다”고 불평했다..

    이어서 그는 ‘시드니 시 당국이 낙서를 지우는데 연간 수백만달러를 사용한다‘면서 ”낙서인들을 ‘환경파괴자들‘이라고 폄훼하는 그들이야말로 ”예술품 파괴자 들이다”고 반력을 가했다. 한편 호주 청소년 사이에서 인터넷 선풍이 불기 시작한 수년 전부터 시드니 낙서회에 가입하는 신입회원의 숫자가 손에 꼽을 정도로 감소했다. 그들은 ”거리에 낙서를 해서 욕구불만들 해소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낙서가 아니라고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다.”고 말한다.

    촌철살인의 경구로 복잡다난한 세태를 패러디하면서, 늘 생존의 굴레에 얽매여 사는 현대인들의 ‘정신적 해방구‘ 역할을 했던 길거리의 낙서도 ‘사이버 거리‘로 주소이전을 하지 못하면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만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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