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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의 역사와 사람들ㅣ마전

고려 왕조 위한 사당 ‘숭의전’ 덕에 작은 규모에도 ‘郡’으로 승격

1914년 연천군에 편입된 뒤 쇠락 … 지역 전통음식·동식물도 찾아볼 길 없어

고려 왕조 위한 사당 ‘숭의전’ 덕에 작은 규모에도 ‘郡’으로 승격

고려 왕조 위한 사당 ‘숭의전’ 덕에 작은 규모에도 ‘郡’으로 승격

임진강사적 223호 숭의전 전경. 고려조 8명의 임금과 정몽주 등 충신들의 위패가 봉안돼 있는 사당.

자유로를 따라 가다 문산 적성 나들목을 지나면 임진강변 ‘마전(麻田)’에 도착한다. 오늘날 행정구역으로 경기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인 이곳은 한 시절 전만 해도 마전군(郡)이었다.

이 지역이 고구려 때 마전천현(麻田淺縣)으로 불리다 신라시대 들어 임단(臨湍)으로 이름이 바뀐 뒤 ‘마전’이라는 지명이 붙은 것은 고려 초. 작은 마을이던 마전은 조선 태종 13년 현이 되었고, 문종 2년에 마전군으로 승격됐다. 조선시대 마전이 인접한 연천이나 삭령현보다 더 큰 군으로 승격된 까닭은 이 지역에 있는 사당 ‘숭의전’ 덕분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홍귀달(洪貴達)의 글을 보면 “마전은 본래 작은 현인데, 무엇 때문에 군으로 승격되었느냐, 우리 태조가 하늘 뜻에 순응하여 혁명한 뒤 왕씨(王氏)의 제사가 아주 없어질까 염려하여 여기에다 사당을 짓고 왕씨 시조 이하 몇 대의 제사를 지내게 한 덕이다. 문종조에 와서 왕씨의 후손을 찾아 제사를 주관하게 했고, 사당 이름을 숭의전이라고 했으며, 이로 인해 고을을 군으로 승격했다”고 기록돼 있다.

6·25전쟁 때 집중포화로 피해 커 … 지금은 ‘마전리’로 남아

하지만 군으로 승격됐다고 해서 땅이 더 넓어진 것은 아니어서 마전군의 살림살이는 빠듯했던 모양이다. 명을 받들고 오는 관리들이 먹고 잘 곳도 없고, 이졸(吏卒)이 평상시에도 비바람을 가리지 못했으며, 학사가 허물어져서 스승과 제자가 머물 곳이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군수 아문(衙門)이 사는 곳까지도 초가집에 나무 울타리를 둘러서 관가 같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오죽했으면 지역 사람들이 “이 고을은 없애는 것이 편한데, 그래도 없애지 못하는 이유는 숭의전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이 전해올까?

그 뒤 30여년 동안 ‘마전’은 버려진 듯 있다가 성종 때 군수로 온 정연경이 객사와 향교, 관청을 새로 지으면서 면모를 일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때의 건물이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건물이 있던 곳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도 없어서 저마다 다르게 이야기한다. 6·25전쟁 때 사라진 마전향교 터마저 기억하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으니, 세월이 얼마나 무상한가.

마전군은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연천군에 편입되면서 쇠락하기 시작했고, 6·25전쟁 당시 집중포화까지 맞아 이제 오가는 길손마저 드문 쓸쓸하고 한적한 마을이 돼버렸다.

고려 왕조 위한 사당 ‘숭의전’ 덕에 작은 규모에도 ‘郡’으로 승격

조선시대 독립된 군(郡)이었을 만큼 번성했으나 1914년 연천군의 한 리(里)로 편입되며 쇠락한 마전 풍경(위쪽부터) .

늦가을, 마전리라고 새겨진 표지석 옆에 서서 가만히 바라보니 이곳이 군청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띄엄띄엄 있는 인가들 사이로 자동차들만 쌩쌩 지나간다. 외딴 마을에 있는 비석거리에는 비석들이 많았다는데, 그 역시 6·25전쟁 때 폭격을 맞아 사라지고 없다. 또 북쪽에는 가재가 많아서 ‘가재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지만, 흘러간 세월 속에 과연 가재가 남아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라진 것이 어디 한둘이랴. 전쟁 전까지만 해도 울창한 나무 숲에는 도토리가 많았고 꿩이 지천으로 많아 도토리묵과 꿩만두가 지역 특산물이었다는데, 오늘날 지역 음식점에서 도토리묵이나 꿩만두는 찾아볼 길이 없다.

이제 마전에 남은 유적이라곤 고려시대의 흔적이 담겨 있는 사당 몇 개가 전부다. 우선 찾아볼 만한 곳은 목은 이색의 영정을 모신 ‘목은 영당’. 고려 후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이색은 이성계의 고려 찬탈을 저지하다 탄핵받아 조선 건국 뒤 나라 곳곳을 떠돌며 유배생활을 했다. ‘목은 영당’은 이색의 후손으로 청주목사를 지낸 이명근(李命根)이 그의 위업을 기리고자 이곳에 세웠다.

목은 영당을 지나면 숭의전이다. 미산면 아미리 잠두봉 위 임진강가에 있는 숭의전으로 가는 길은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가 적막을 깰 만큼 조용하기만 하다.

고려시대의 왕들을 모신 이곳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태조가 고려 왕조를 몰아내고 왕씨를 모두 죽인 뒤 고려 종묘의 위패를 거두어 강물에 띄워보냈는데, 이상하게도 위패들이 떠내려가지 않고 강물 위를 맴돌았다는 것이다. 살아남은 한 왕씨가 그것을 몰래 거두어 이곳에 사당을 짓고 위패를 봉안했는데, 고려 태조를 비롯한 8명의 임금과 고려 충신 정몽주 등 15명을 배향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역시 6·25전쟁 때 소실됐지만, 복구해 사적 제223호로 지정돼 있다.

숭의전 6·25전쟁 때 소실됐다 복구 ‘사적 지정’

숭의전은 이렇게나마 남아 있는데, 마전은 겨우 흔적만이 남아 있다니, 나는 울울창창한 활엽수 사이로 소리 없이 흐르는 임진강을 바라보면서 만감에 젖었다. 돌아보면 사라지는 것이 어디 고을뿐일까. 이곳 숭의전 부근에는 아미에서 삼회리로 건너는 아미나루가 있었다지만 그마저 사라지고 없다.

숭의전에서 멀지 않은 백석리에는 임진왜란 때 부산진첨사로 소서행장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정발 장군의 무덤이 있다. 장군이 죽은 뒤 말(馬)이 장군의 투구와 갑옷을 물고 와 이곳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인근 전곡면 신답리에는 영평천과 한탄강이 만나서 물이 아우라(러)진다고 해서 ‘아우라지’라는 이름이 붙은 ‘아우라지나루’가 있고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에는 미수 허목(許穆)이 벼슬을 그만두고 내려와 살았던 은거당(恩居堂)이라는 마을이 있다. 미수가 1678년 판중추부사를 사퇴하고 귀향해 지내고 있던 중에 숙종이 그의 충절과 덕망을 기려 사우(祠宇)를 하사한 데서 붙은 이름이다.

‘성은을 입은 거소’라는 뜻이 담겨 있는 이 마을에는 지금도 미수 허목의 사당과 무덤이 남아 있다.

● 가볼 만한 곳

자유로를 따라 가는 임진강변에는 역사 유물·유적이 많다.

황희 정승이 말년을 보낸 반구정과 이이의 자취가 서린 화석정 및 자운서원이 있고,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능이 장남면에 있다.

철마가 멈춰 있는 임진각도 가볼 만하다.


주간동아 2004.12.09 463호 (p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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