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게임은 월드컵이나 올림픽에 비해 규모가 작아 기업들의 관심이 크지 않았지만 북한 선수단이 참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것으로 보여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이미 삼성전자, KT, 우리은행, SK 등이 공식후원사로 선정됐음에도 불구하고 업계는 비공식적인 마케팅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월드컵 기간중 붉은악마를 후원해 월드컵 공식후원사 못지않은 홍보효과를 거둔 SK텔레콤의 효과를 노리는 것.

아시안게임 공식후원사로 선정된 것과는 별도로 KT와 우리은행은 직원들 일부를 서포터스로 참여하게 했다. 대한항공도 부산의 항공기 제조 및 정비공장 직원 500명 정도가 자발적으로 구성한 응원단에 대해, 회사 차원에서 입장권과 티셔츠를 지원할 예정이다. KTF는 코리아팀파이팅(Korea Team Fighting)팀의 응원을 통해 브랜드를 노출시킬 계획이다.

월드컵을 통해 스포츠마케팅의 엄청난 위력을 맛본 SK텔레콤 역시 공격적인 전략을 진행하고 있다. 경쟁업체가 참가국의 서포터스로 참여하는 데 반해 SK텔레콤은 43개 전 참가국의 서포터스를 후원하기 위해 부산시와 협의중인 것. 4만명 이상의 서포터스를 지원하며 붉은악마 효과를 재현할 계획으로 보인다.

유니폼·응원도구 지원에 수억씩 쏟아붓기

한편 당초 1만1000명의 서포터스에게 유니폼과 응원도구 등 3억~4억원 상당의 물품을 후원할 것으로 알려졌던 삼성전자는 이미 계획을 포기한 것으로 확인됐다. 삼성전자 스포츠마케팅팀 김정현 차장은 “‘Power of Asia’란 주제로 ‘아시아를 응원하자’는 내부방침이 부산시의 서포터스 계획과 맞을 것 같아 유니폼과 응원도구 등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으나 부산시에서 회신이 없어 포기한 상태”라며 “개별적으로 부산외대 학생들과 아시아 10여 개 국가의 공식응원단을 초청하는 등의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진행중인 협의 내용에 따르면 SK텔레콤은 부산시에 6억원 상당의 응원물품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SK텔레콤 마케팅본부 신창언 차장은 “지난 월드컵에서 붉은악마를 후원함으로써 새로운 응원문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며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는 외국 선수단까지 응원해 손님을 대접하는 우리네 정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월드컵에서처럼 큰 성공을 거둘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상업성만 지나치게 앞세운 나머지 눈총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SK텔레콤의 후원에 대해 서포터스로 참여하는 단체들이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는 것. 이번 아시안게임을 2년 전부터 준비하고, 북한선수단 서포터스로도 참여하게 된 시민단체 ‘부산아시아드지원협의회’ 관계자는 “아무리 기업홍보가 중요하다지만 43개 전 참가국 서포터스가 똑같은 기업 로고가 새겨진 옷을 입고 참가국을 응원해야겠습니까”라며 SK텔레콤측이 서포터스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데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개별 국가의 특성을 살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색상과 디자인, 거기에 특정 기업의 로고까지 새기는 것은 서포터스 본래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것.

현재 서포터스로 참여하는 수십개 단체에는 KT, 우리은행 외에도 경동, 코오롱 등의 기업과 종교단체가 여럿 포함돼 있다. 관련 국가를 응원함으로써 대회에 이바지하고 한편으로는 자사의 이미지를 높이겠다는 목적으로 나선 이들 기업과 단체들이 특정 기업의 상표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는 데 찬성할지도 의문이다.

중국과 북한 서포터스로 참여하는 KT 부산본부 김동엽 홍보팀장은 SK텔레콤 요구대로 해야 할 경우 서포터스 활동을 재검토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그에 따르면 다른 단체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8월 말 서포터스 단장 회의에서 SK텔레콤의 공식후원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당시 부산시 황일준 자치행정과장이 SK텔레콤의 후원으로 응원복과 응원도구를 통일하기로 했다며 협조를 요청하자 김도원 삼광사 주지스님 등 각 단체 대표자들이 반발했다.”

그는 “서포터스란 자발적으로 모여 활동해야 하는 것인데 모두 똑같은 옷을 입고 기업홍보를 할 수는 없다”며 “SK텔레콤의 후원과 상관없이 같은 국가를 응원하는 다른 단체들과 모여 자율적으로 유니폼에 관해 논의하기로 약속돼 있다”고 말했다. 북한 서포터스로 참여하는 우리은행 관계자는 “기업홍보를 하겠다는 생각에서 서포터스에 나선 것은 아니지만 다른 기업을 부각시키는 옷을 입고 선수들을 응원할 수는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SKT 똑같은 응원복 추진하다 빈축

이런 상황에서 부산시는 서포터스로 참여하는 단체들에게 SK텔레콤을 공식후원사로 선정하는 데 대한 동의서를 보낸 상태다. 동의서에 따르면 SK텔레콤은 6억원 상당의 응원물품을 제공하고, 이 내용을 SK텔레콤 광고에 사용할 수 있으며 브랜드를 노출시키고 후원사를 고지하며, 유니폼의 디자인과 도안은 SK텔레콤이 맡기로 돼 있다.

서포터스를 총괄하는 부산시 황일준 자치행정과장은 “기업이 후원하면서 상표 노출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SK의 후원에 따라 경비를 절감할 수 있는 이점을 강조했다. 각 단체들이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데 대해서는 “경비를 절감할 수 있는데 그럴 리가 없다”며 “원치 않으면 유니폼을 입지 않으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시아드 지원협의회 관계자의 말은 다르다. 부산시에서 보내온 동의서에 따르면 부산시 서포터스 4만여 명은 SK텔레콤의 유니폼을 입기로 되어 있고, 서포터스가 유니폼을 입지 않으면 계약위반에 해당된다는 것.

이에 대해 SK텔레콤 관계자는 “바다를 연상케 하는 푸른색으로 서포터스의 이미지를 통일시키고, 개별 국가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대형 플래카드에 해당 국가의 국기를 표시하기로 했다”며 “4만 서포터스들의 유니폼 착용 문제는 부산시에서 관리하기로 했지만 4만여 벌이 제대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아시아드 지원협의회 관계자는 SK텔레콤에 불만을 가지면서도 다른 단체들을 설득하고 있다. 일단 오랫동안 준비해온 아시안게임만은 잡음 없이 치르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동안 후원과 관련한 협의 과정에도 문제가 있었다며 아시안게임이 끝나는 대로 전국 3500여 시민단체와 협의해 SK텔레콤 불매운동까지 고려하고 있다며 강경한 입장을 나타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정부가 월드컵 때와 달리 아시안게임 서포터스를 지원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2002 월드컵의 경우 국가당 3300만원의 지원금이 배정됐고, 이것으로 모자라 각국의 서포터스 임원들이 기부한 지원금을 더해 국가당 6000만원 정도가 쓰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의 지원 없이 서포터스 활동을 계획하려니 대기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한편 부산시 내에서는 “북한 선수단이 참가한다는 것만 결정됐을 뿐 언제 입국하는지, 어느 선까지 환영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기업들의 후원 문제가 얽혀 혼란스럽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아시아인의 화합의 장이 되어야 할 아시안게임이 시작하기도 전에 기업들의 홍보 욕심으로 불협화음이 생기는 데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