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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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환상 와르르 “이~민 가자”

변하지 않는 교육현실 등 더 큰 절망감 … 지식층 중심 이민 상담 사상 최대

  • < 최영철 기자 > ftdog@donga.com

    입력2004-09-23 18: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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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환상 와르르 “이~민 가자”
    월드컵 기간 동안 대폭 줄어들었던 이민 희망자가 최근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이민 관련업계는 “이민 인원이 최고에 달했던 지난 2000년보다 올 하반기 이민 상담이 오히려 더 늘었다”며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상태. 한국 대표팀이 월드컵 신화를 만들어냈던 지난 6월과 7월 두 달 동안 이민 관련업체들은 이민 희망자가 없어 개점휴업 상태를 면치 못했다.

    “찾는 이는커녕 상담 전화조차 없었습니다. 이주설명회 자체가 불가능했지요. 일부 이주공사는 그 기간 동안 사무실을 비우고 장기 해외출장을 가기도 했습니다.” 온누리이주공사 안영운 대표는 “평소 매달 1100여건에 달했던 이민 상담 신청 건수가 월드컵 기간이었던 6월과 7월에는 600건에도 미치지 못했었다”며 “한국팀의 선전과 함께 달아오른 애국심이 이민을 포기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난 5월까지 매월 1100여건을 상회하다 6월 919건, 7월 829건으로 대폭 줄었던 외교부 해외이주 신고 건수는 8월 들어 930건으로 뚜렷한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다. 일찌감치 이민을 준비해 떠날 일만 남은 이들에 비해 현재 새롭게 이민을 추진중인 이민 희망자 증가세는 더욱 뚜렷하다.

    월드컵 환상 와르르 “이~민 가자”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지난 8월24일과 25일 이틀간 서울 코엑스전시장과 대구전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해외이주 박람회에는 3만5000여명의 인파가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지난 3월에 개최된 박람회에 3만여명이 모인 것과 비교하면 5000여명 가량이 늘어난 것. 박람회를 주최한 한국전람의 한 관계자는 “월드컵 효과 때문에 방문자가 줄어들까 내심 고민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대박’이 터졌다. 월드컵 기간 동안의 이민 감소는 단지 일시적인 현상이었던 것 같다”고 진단했다.

    고려이주개발공사 김동화 이사는 “지난해 9·11 테러 이후 월드컵 기간까지 실제 이민을 떠나는 고객 수와 희망자 수는 이민 인원이 최고에 달했던 2000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7월 중순에 들어서면서 다시 늘기 시작해 2000년 이민자 수(1만5307명)에 도달하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이에 따라 각 이주공사가 개최하는 이주설명회장이 다시 붐비기 시작한 것도 당연한 일. 이주공사에 설명회 장소를 대여해주고 있는 우리은행 강북지점의 한 관계자는 “7월 중순 이후 이민 희망자들이 대거 몰려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월드컵 기간 동안 급감했던 이민 희망자가 다시 폭증하는 이유는 뭘까. “축제는 축제일 뿐이지요. 월드컵이라는 축제가 끝난 후 일상으로 복귀해보니 현실의 벽이 예전보다 더욱 두껍고 단단하게 느껴진 겁니다. 이민을 망설였던 사람들이 월드컵 이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현실에 더욱 절망하고 이민을 결심하는 사례도 많습니다.” 김동화 이사는 이민 희망자의 폭증을 오히려 월드컵 후유증이라고 진단했다. 즉 “무엇이든지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던 승리감이 월드컵 이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교육 현실이나 경제적 상황에 부딪히자 결국 더 큰 좌절로 변했다”는 것이다.

    지난 9월5일 오후 서울 광화문 네거리 인근 이주설명회장을 찾은 김모씨(43)도 “월드컵은 다만 현실을 잠깐 잊게 해줬을 뿐 내게 남은 것은 고단함뿐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경쟁적 교육현실에서 고생하고, 부모는 매월 수백만원에 달하는 사교육비를 감당해야 하는 현실을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이 암담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이민밖에 없는 것 같다. 월드컵 때문에 시간만 낭비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놓았다. 엔지니어 자격으로 캐나다로 취업이민을 가려던 그는 지난 6월28일 캐나다 이민법이 강화되면서 실질적으로 취업이민이 어렵게 되어 월드컵에 도취돼 이민 적기를 놓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월드컵 환상 와르르 “이~민 가자”
    이민 컨설턴트 정순화씨(37)는 “지금까지 캐나다 이민이 어려웠던 의사·변호사·교사 등 전문직종의 경우 이번 이민법 개정으로 이민이 상대적으로 수월해진데다 실질적으로 정치·사회·경제적으로 한국에 절망감을 느낀 지식층의 이민 상담이 폭증하고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그녀는 특히 “지난해 9·11 테러 이후 급격하게 줄어들었던 미국 이민이 월드컵을 지나면서 대폭 증가한데다 지난 6월28일 캐나다 이민법이 강화되면서 취업이민이 까다로워져 이민 인구가 미국 쪽으로 다시 쏠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외교부가 분석한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민자의 54%가 정치·경제적 자괴감이나 사회의 투명성 부족, 계층간의 괴리감, 사회병리학적 현상 때문에 이민을 떠나는 것으로 조사된 것. 교육이민은 37%로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대다수 전문가들은 월드컵 이후 이민 희망자가 다시 급증하는 주요인을 갈수록 불어만 가는 사교육비에서 찾는다. 즉 교육이민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는 것. “외교부 통계는 이미 이민을 떠난 사람들의 통계이기 때문에 IMF관리 체제 당시에 이민을 결심하고 준비해왔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게 이주 관련업체 관계자들의 근거 있는 반박이다. 최근 이주박람회나 이민설명회장을 찾는 이주 희망자의 대부분은 자식 교육이 첫 번째 이유고 그 다음이 삶의 질 향상이라는 것.

    특히 캐나다의 경우 이번 이민법 개정으로 5년 중 2년만 캐나다에 있으면 영주권이 계속 연장되는데다 3년만 계속 거주한 사실이 인정되면 시민권 시험자격이 주어지므로 교육이민을 준비하는 사람들로부터 더욱 각광을 받고 있는 실정. 온누리이주공사 안영운 대표는 “5년 중 2년을 현지에 있어야 한다고 규정돼 있지만 실상 1년에 한 번 정도만 들어가면 되기 때문에 보통 아이들과 엄마만 현지에 있고, 아빠는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거나 사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한다. 가족은 외국에 보내고 혼자 한국에 남아 생활비를 대는 소위 ‘기러기 아빠’들의 증가가 월드컵 이후 이민붐의 새로운 양상이라는 게 안대표의 주장이다.

    월드컵 환상 와르르 “이~민 가자”
    “700만원만 있으면 3년 동안 학비 무료에다 어학연수까지 할 수 있고, 건강도 좋아지는데 누가 안 보내겠습니까. 한국 사교육비의 절반도 안 되는데….” 아내와 아이들을 뉴질랜드에 보내고 혼자 사는 대기업 간부 이모씨(42)는 “아이들이 경쟁 없는 교육환경에서 스트레스 받지 않는 것이 너무 좋고, 외국어까지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좋으냐”고 말한다. 올 초 이런 ‘기러기 아빠’들의 잇따른 과로사가 사회적 문제가 됐었지만 자식을 ‘사교육 공해’에서 탈출시키려는 부모는 날로 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 인터넷에는 기러기 아빠들이 모여 애환을 달래고 정보를 주고받는 사이트(cafe.daum.net/goosedad)도 생겼다.

    월드컵 이후의 이민 희망자 급증에 대해 용인정신병원 신경정신과 하지현 과장(정신과 전문의)은 “월드컵이 가져다준 일체감이나 자신감조차 현실을 바꾸진 못한다는 자괴감이 서서히 확산되고 있다. 또 뛰어오른 집값과 정치에 대한 혐오는 월드컵이 정치에 이용됐다는 배신감으로 작용하며 월드컵의 환상을 현실적 허무로 변모하게 했다. 결국 이민 대기자에겐 월드컵 이후의 절망감이 이민을 결심하게 하는 방아쇠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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