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옥 감독의 1990년작 영화 ‘마유미’의 KAL 858기 폭파 장면.
진실위에 따르면, KAL 858기 사건을 둘러싼 의혹은 300여 가지. 하지만 무엇 하나 속시원히 풀린 게 없다. 특히 KAL기를 폭파하는 데 쓰였다는 폭발물의 실체조차 제대로 규명되지 않아 여태껏 핵심 의혹으로 남아 있다. 이는 ‘KAL 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가 제기한 무수한 의혹에도 포함돼 있다.
이와 관련, 진실위 오충일(66) 위원장은 3월16일 ‘주간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범인으로 지목된 김현희(44) 씨가 사용했다는 폭발물로 과연 KAL기가 폭파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혹이 존재하고, 그 해답을 얻기 위해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싶지만 비용 및 시간의 제약 때문에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주간동아’ 528호 ‘김현희는 경주에 있다’ 기사 참조).
이 기사를 접한 미국의 한 폭발물 관련 전문가가 진실규명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며 ‘주간동아’에 의견을 밝혀왔다. 주인공은 최형진(40) 씨. 고려대에서 박사 학위(구조공학)를 받고,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 방호기술연구소 선임연구원과 같은 대학 토목환경공학과 연구교수를 거친 그는 현재 미 국방부(펜타곤)의 계약 연구조직인 K&C(Karagozian & Case)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있다. 캘리포니아주 버뱅크에 자리한 K&C는 폭발과 그에 따른 구조물의 손상에 관한 연구개발을 수행한다. 형식상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된 기술의 민간 적용’을 설립취지로 하고 있으나, 사실상 대부분의 정보가 기밀로 분류돼 있다.
지상에서 터졌다면 작은 파괴만 있었을 것
KAL기 사건 직후 안기부(국정원의 전신)는 김현희 씨가 사건 당일 폭발물을 비닐 쇼핑백에 넣어 기내 선반에 놓고 내렸다고 발표했다. 1988년 1월 수사 발표에서는 김 씨가 사용한 폭발물이 컴포지션4(C-4) 350g과 PLX 액체폭탄 700cc라고 밝혔다. 아울러 정상 고도를 비행하던 KAL기는 폭발과 동시에 산산조각이 나서 긴급 구조신호를 보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고 덧붙였다.
만일 이런 정황들을 사실로 가정한다면, 그와 같은 소량의 폭발물로 덩치가 큰 여객기를 공중분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KAL기 사건 피해자 가족들은 1983년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에 의해 사할린 상공에서 격추돼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KAL 007기의 경우 10여분간 활공하며 구조신호를 보내기도 한 만큼, 그에 훨씬 못 미치는 두부만한 크기의 폭발물에 의해 KAL 858기가 구조신호 한 번 보내지 못한 채 흔적도 찾지 못할 정도로 박살나는 일이 가능하느냐는 의문을 품고 있다.
최형진 씨에 따르면, 안기부가 밝힌 ‘컴포지션4 350g과 PLX 액체폭탄 700cc’의 폭발에너지는 대략 TNT 1300g에 해당한다. 컴포지션4는 테러 등에 흔히 사용되는 폭약. PLX 또한 유사한 폭발력을 지녔다. 최 씨는 폭발에너지의 범위는 폭발물의 질에 따라 다르지만,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TNT와 비교할 때 최대 1.3배는 넘지 않을 것으로 분석된다고 한다.
안기부가 KAL 858기의 잔해라고 밝힌 기체 조각. 이 잔해는 1990년 3월 미얀마의 안다만 해역에서 수거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 씨가 드는 ‘조건’은 비행고도. 만일 비행기가 지상에 있다면 기체 내·외부의 압력이 같으므로 폭압은 폭발물이 설치된 부근에서 흡수되어 직접적인 파괴를 당하지 않는 부분에서는 작은 변형만 발생한다. 하지만 정상 고도 이상을 날고 있을 경우엔 기체 내부 압력이 외부 압력에 비해 매우 커져 마치 압력용기와 같은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는 탄성이론에서 말하는, 부풀어진 고무풍선과 비슷한 상태다.
바람이 빠진, 즉 내·외부 기압차가 전혀 없는 풍선을 바늘로 찌르면 그 구멍만큼만 손상되지만, 바람이 가득 찬(내·외부 기압차가 매우 큰) 경우엔 바늘구멍만큼의 손상도 전체적인 파괴를 순간적으로 불러오는 것과 같은 원리다. 최 씨는 “실제로 미국의 여러 실험자료들은 450g 이하의 컴포지션4에 의해서도 기체가 완전히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최 씨는 이 같은 견해가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미국 현지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폭발물 관련 전문가 7명의 의견을 취합한 것이라고 밝힌다. ‘주간동아’ 기사를 접한 뒤 일일이 자문을 구해본 결과, 안기부가 밝힌 폭발물의 종류와 양으로도 기체의 순간적 파괴가 가능하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는 것. 특히 폭발물이 설치된 위치가 비행기의 동력집중구간이나 연료저장구간과 매우 근접한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최 씨가 익명을 요구한 7명의 전문가 중에는 미 국방부 인사도 포함돼 있다.
KAL 858기 폭파 시뮬레이션 이뤄질까
그렇다면 1983년 사할린에서 격추된 KAL 007기는 미사일을 맞은 후에도 어떻게 구조신호를 보낼 수 있었을까. 최 씨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내부의 공격과 외부의 공격에 따른 결과는 명확히 다르다. 기체 내부에서는 1파운드 이내의 적은 양의 폭발물이 터진다 해도 발생응력(기체에 저장된 탄성에너지)의 집중으로 순간적 파괴를 일으킬 수 있다. 반면 미사일에 의한 기체의 겉면 손상(날개 혹은 관통되지 않은 기관의 손상)으로는 순간적 파괴가 일어날 확률이 상대적으로 낮다. 같은 기체라 하더라도 내부의 탄성에너지가 일시적으로 소산(疏散)되지 않는 일부 손상이라면 비행기가 공중분해되지 않으며, 연료에 불이 붙거나 추락하는 등 다른 이유로 파괴될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을 갖게 된다.”
다른 의문 하나. KAL 858기 폭파에 관한 시뮬레이션은 기술적으로 가능할까. 최 씨에 따르면, 직접적인 실험은 비행기를 파괴해야 하고 기체 내·외부의 압력차를 인위적으로 조성해야 하므로 엄청난 예산이 소요된다. 비행기를 직접 공중에 띄운 뒤 실험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수학적 모델을 이용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고려할 수 있는데, 그 신뢰도는 최소 ±2%의 오차범위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고 한다.
“시뮬레이션은 폭발의 하중에 대한 시뮬레이션과 생성된 하중에 의한 기체 파괴 시뮬레이션으로 나눠 수행하거나, 혹은 그 상호작용을 고려해 수행할 수 있다. 후자를 CSD/ CFD(Computational Structural Dynamics and Computational Fluid Dynamics) 해석법이라고 부른다. 미국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막 상용화되기 시작한 새로운 개념의 해석법이다.”
미 국방부는 수많은 실험과 계산을 토대로 폭발의 하중을 빠르게 산정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있지만, 아직도 폭발물의 근접 부착에 대해서는 위와 같은 시뮬레이션 이외엔 방법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 최 씨의 설명이다. 또한 여객기 내부의 폭발물에 의한 폭파 시뮬레이션이 이뤄진 적도 없다고 한다. KAL 858기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이뤄진다면 최초 사례가 되는 셈이다.
앞서 언급했듯, 최 씨의 견해는 안기부가 밝힌 폭발물의 종류와 양이 사실이라는 가정에 입각한 것이다. 그러나 안기부는 조사내용 대부분을 김현희 씨의 진술과 자체 추정에 의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본질적 의혹을 풀 열쇠를 쥔 사람은 여전히 김 씨뿐이다. 진실위와 김 씨의 면담이 반드시 성사돼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