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 ‘성의 심리학’ 강의 모습(오른쪽)과 대학 캠퍼스를 거니는 학생들.
3월28일 성균관대 수원캠퍼스 ‘성의 심리학’ 강의실. 폼페이 유적지에서 출토된 피라퍼스(Piraphus·남성의 성기를 과대 표현한 조형물) 사진이 스크린에 비춰지자 강의실 분위기가 한순간 술렁거렸다. 성문화에 관한 학생들의 발표로 시작된 이날 수업에서는 미국 ‘사탄의 교회’의 난교의식, 일본의 남근축제, 우리나라의 탑돌이(미혼남녀가 탑을 돌며 마음에 드는 이성을 찾는 축제의 일종) 풍습 등 흥미진진한(?) 성 이야기가 펼쳐졌다.
들뜬 강의실 분위기는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의가 시작되자 가라앉았다. “사랑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사랑의 절대적 본질을 밝히는 것보다 내가 사랑하는 상대가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의를 경청하는 80여 명 학생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이 수업을 맡고 있는 이순영 교수(심리학과)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가르친다”고 ‘성의 심리학’을 소개했다. 사랑, 성, 연애, 결혼 등이 이 교양수업의 주요 주제라는 것. 정대용 군(4학년·기계공학부)은 “어딜 가도 배우기 힘든 내용을 가르친다며 친구들이 적극 추천해 듣게 됐다”면서 “인기가 아주 많아 수강 신청에 성공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상아탑이 변했다. 딱딱한 학문 이론을 가르치는 수업 일색인 강의목록에 ‘연애수업’이 하나 둘 추가되기 시작한 것. 현재 서울 시내 48개 대학 가운데 절반 이상에서 사랑, 성, 연애, 결혼과 관련된 강좌가 열리고 있다.
학생들 호응도 뜨겁다. 이번 학기 연세대 ‘청년기의 갈등과 자기이해’는 무려 다섯 강좌가 개설돼 750명이 몰렸고, 성신여대 ‘성행동의 심리학’에는 300명이 등록했다. 정원이 90명으로 제한된 고려대의 ‘섹슈얼리티 연구’의 경우 고학년부터 수강 신청을 할 수 있는 탓에 1학년이 이 수업을 들을 기회는 거의 없다고 한다.
피임·실연 대처법·구애 작전까지 알려줘
연애수업은 노골적이다. 대부분의 성 관련 강좌는 비디오 등을 통해 남녀 성기관을 상세하게 가르친다. 성신여대 ‘성행동의 심리학’의 경우 성감대, 남녀 성관계의 자세, 기교방법 등까지도 강의한다. 포르노그래피를 함께 감상한 뒤 토론하는 시간도 마련돼 있다. 담당교수인 채규만 교수(심리학과)는 “여성들은 성에 관한 지식이 별로 없고 수동적인 태도로 남성이 요구하는 대로 성관계를 갖는 경우가 많다”면서 “주체적으로 성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정상적인 성 체위와 그 장단점까지 강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애수업은 실용적이다. 구애의 준비단계, 구애 작전, 성공적인 데이트 방법, 그리고 실연 대처법 등을 강의한다. 피임, 성병, 성기능 장애 등도 배운다. ‘어떤 남자가 좋은 남자일까’라는 여학생들의 일생일대 고민에 대한 ‘길잡이’도 연애수업에서 배울 수 있다. 채 교수는 매 학기 여학생들에게 ‘꼭 피해야 하는 남자’에 대해 말해준다. 자존심이 낮은 남자, 마마보이, 술을 마셔야 감정을 표현하는 남자, 의심 많은 남자 등이 해당한다. 교수들과의 일대일 연애상담도 강의실 안팎에서 자주 벌어진다. 이순영 교수는 “‘여자친구와 헤어질 뻔했는데 선생님 덕분에 위기를 잘 넘기고 계속 만나고 있다’며 고마워하는 학생들이 더러 있다”고 말했다.
남녀 대학생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영화 ‘청춘만화’
이러한 연애수업의 목적은 ‘연애’ 그 자체가 아니라, ‘연애를 통한 인격적 성숙’이다. 연애수업을 이끄는 교수들은 “연애만큼 자신에 대해 알아가고 인간관계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은 없다”고 입을 모은다. 1990년대 초반 시작된 연세대의 ‘베스트셀러’ 교양과목인 ‘청년기의 갈등과 자기이해’ 개설 배경에 대해 김인경 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대학생들이 가장 중요하게 고민하는 것 두 가지를 꼽으라면 ‘앞으로 어떤 직업을 가질까’와 ‘누구와 함께 살까’, 즉 일과 사랑이다. 이 두 인생의 과제를 다 함께 고민해보자는 취지에서 수업을 개설했다. 일종의 집단상담의 접근방법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또래 친구들 모두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순영 교수가 연애수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 중 하나는 ‘실연’이다. 실연을 평생 극복하지 못할 상처로 여기며 괴로워하는 학생들에게 이 교수는 실연 또한 사랑의 일부이며, 누구나 겪는 인생의 과제임을 깨닫도록 한다. 그는 사람이 죽으면 장례식이라는 의식을 통해 죽은 사람과 이별하듯, 실연한 다음에는 자신만의 사랑의 종결식을 하라고 충고한다.
“‘바닷가에 가서 모래성을 쌓고 허무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찾아와서 ‘선생님이 가르쳐준 대로 한 덕분에 2년 넘게 맘속에 담아둔 여자친구를 정리했다’고 한 남학생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한창 애틋하게 사랑을 싹틔우던 여자친구를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 때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 괴로워하던 친구였거든요.”
‘낯 뜨거운’ 주제도 가볍지만 진지하게 다뤄
경희대 ‘가족생활과 교육론’은 이성친구와 2주 동안 함께 강의 듣는 것을 철칙으로 해 화제를 모으고 있는 수업. 그 2주 동안은 ‘결혼 전 준비과정’에 대한 강의가 집중적으로 이뤄진다. 결혼이 무엇인지, 서로 성격이 잘 맞는지, 갈등을 해결할 능력이 있는지 등을 커플이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것. 이 수업을 담당하는 오윤자 교수는 “수업을 통해 ‘성숙한 인격만이 결혼할 자격이 있다. 성숙한 인격이란 문제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처할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부모 세대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낯 뜨거운’ 주제가 21세기 대학에선 가볍지만 진지하게, 즐거이 다뤄지고 있다. 그러나 대학가 연애수업은 단순한 ‘청춘예찬’이 아니라 좀더 성숙한 사람이 되게 하는 ‘훈련 프로그램’이다. 중앙대 구모 양은 “연애수업을 통해 ‘사랑은 낭만적인 것’이라는 환상을 깬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고 말했다. 이순영 교수는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교실을 찾아온 학생들이 점차 사랑과 연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고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