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7일 예술의 전당 안 서울예술단 연습실. 서울예술단이 10월에 공연하는 뮤지컬 ‘이’의 배역 오디션이 진행되고 있었다. 오디션으로 선발할 배역은 장생, 공길, 연산, 녹수 등 주요 배역과 ‘우인’으로 불리는 남녀 광대들. 총 응시자 352명 중 1차 오디션으로 선발된 67명이 이날 오디션에 나섰다. 응시자들은 노래와 연기 외에도 테크노 댄스부터 고성오광대춤까지 온갖 장기를 펼쳐 보였다. 연산 역에 응시한 한 유명 배우는 막 연기를 시작하는 순간, 대사를 잊어버려 당황하기도 했다. 온몸을 던져 무대에 도전하는 배우들이 뿜어내는 열기와 긴장으로 연습실 안은 터져나갈 듯했다.

가히 뮤지컬 열풍이다. 현재 공연 중인 뮤지컬 수만 해도 ‘아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벽을 뚫는 남자’ ‘찬스’ 등 두 손이 모자란다. 올해 국내 무대에 올려지는 공연의 절반 이상이 뮤지컬이라는 통계도 있다.

2001년 제작비 100억원을 들인 라이선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들어올 때만 해도 관계자들은 반신반의했다. 웬만한 블록버스터급 영화도 제작비 100억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오페라의 유령’은 7개월 공연에 객석 점유율 92%를 기록했고, 20억원의 순이익을 남겼다.

조승우·류정한 등 오빠부대 거느려

뮤지컬 열풍의 시작은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이 열풍은 ‘레 미제라블’ ‘지킬 앤 하이드’ 등 후속작들이 연이어 성공하며 ‘쓰나미급’으로 커져갔다. 2005년 서울에서 공연된 뮤지컬 수만 110편, 관객은 300만명을 넘어섰다. 매출 규모도 1100억원에 달하니 이만하면 공연계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지킬 앤 하이드’의 ‘조지킬’ 조승우를 비롯해 영화계로 진출한 박건형, 서울대 성악과 출신의 류정한 등 오빠부대를 거느린 스타들도 탄생했다.



뮤지컬 열풍의 이유는 무엇인가. 정재왈 서울예술단 이사장은 “뮤지컬은 기본적으로 우리 공연예술에 내재된 ‘놀이’와 맞닿아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춤추고 노래하는 스타일의 예술을 근본적으로 좋아합니다. 그리고 드라마와 음악이 합쳐지는 순간, 감동이 극대화되는 뮤지컬 특유의 장점 때문이기도 하죠.”

공연 횟수에서도 뮤지컬은 여타 장르를 압도한다. 연주회나 오페라, 연극 등이 1~2회, 길어야 한 달 정도 공연하고 막을 내리는 데 비해 많은 뮤지컬은 ‘오픈 런(폐막일을 정하지 않고 관객이 들어오는 한 공연을 계속하는 방법)’ 형태로 무대에 오른다. 그러니 1회 공연물과 장기 공연물의 시장 점유율 수는 현격하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짧은 시간 안에 시장이 급격하게 커지다 보니 그에 따른 부작용도 없지 않다. 불과 5년 만에 ‘오페라의 유령’‘캐츠’ ‘미스 사이공’ ‘미녀와 야수’ ‘아이다’ ‘레 미제라블’ 등 영국 웨스트엔드와 미국 브로드웨이 양대 시장의 히트작들이 대부분 라이선스 뮤지컬의 형태로 수입됐다. 올해 6월 ‘미스 사이공’의 공연이 결정되면서 공연가에서는 “이제 ‘라이온 킹’ 하나 남았다”는 말도 들린다. 자연히 한국 제작자들 사이의 경쟁도 만만찮다. ‘미스 사이공’의 판권 소유자인 영국의 카메론 매킨토시 측 관계자는 “지난 몇 년간 일주일에도 몇 건씩 ‘미스 사이공’을 수입하게 해달라는 한국 제작사들의 전화를 받아왔다”고 귀띔했다.

이 같은 라이선스 뮤지컬의 열기에 비해 창작 뮤지컬 시장은 절대적 열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창작 뮤지컬인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연출자 이원종 씨는 창작 뮤지컬로 유입되는 자본이 거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상업예술인 뮤지컬에 국가 지원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모순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수입 뮤지컬이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는 일본처럼 될지도 모릅니다. 창작 뮤지컬에 투자되는 자본도 인력도 너무나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뮤지컬 경력 17년째인 중견배우 김성기 씨 역시 “수입 뮤지컬에 비해 창작에서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고 말한다. “창작 뮤지컬의 작품성은 외국 뮤지컬을 따라가기에 부족해요. 관객들이 굳이 한국산 뮤지컬을 찾을 이유가 없는 거지요. 창작 뮤지컬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작품의 밀도와 수준이 더 높아져야 해요.”

그러나 이런 지적들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다. 과연 라이선스 뮤지컬이 ‘100% 수입품’인가? 뮤지컬은 작품을 사들여온다고 해도 한국말로 번안하며 배우 역시 한국인 배우를 기용한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 원작을 영국에서 각색해서 공연했고, 이 작품을 다시 프랑스가 자국어로 번안해 수입했다. 영화와 달리 뮤지컬 산업에서는 국산과 수입의 경계가 그만큼 모호한 것이다.

‘지킬 앤 하이드’ 일본 시장에서 호평

뮤지컬 평론가인 순천향대 원종원 교수(신문방송학)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창작 뮤지컬의 육성이나 제작자들 사이의 과당경쟁 등이 아니라 전용극장을 짓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 등은 뮤지컬을 하기에는 너무 큰 극장들입니다. 이상적인 뮤지컬 극장은 관객과 무대 사이가 가깝고 백 스테이지는 깊으며 객석 수는 1000석 이하여야 합니다. 근래 한국 제작자들 사이의 과당경쟁으로 라이선스 뮤지컬의 로열티가 높아지고, 그 결과로 티켓 가격이 올라간다는 해석들을 많이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몇 년씩 장기공연을 할 수가 없으니 짧은 시간에 제작비를 회수해야 하고, 그래서 티켓 가격이 올라가는 거지요.”

뮤지컬은 산업인 동시에 예술이라는 양면적 면모를 가지고 있다. 영화처럼 재생이 가능한 것도 아니며 오페라 같은 순수예술과도 거리가 멀다. 문제는 이 같은 뮤지컬의 특성에 전방위적으로 접근하는 시각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느 공연과도 다른 뮤지컬만의 특성을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어야 뮤지컬 산업의 육성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희소식 하나. 오디뮤지컬컴퍼니는 3월13일부터 24일까지 도쿄와 오사카에서 ‘지킬 앤 하이드’의 일본 공연을 마쳤다. 전체 객석점유율 80%, 총매출 14억원으로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낸 오디뮤지컬컴퍼니 측은 앞으로도 일본과 중국 진출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양적으로 한국 시장의 20배라는 일본 진출까지 가능해질 정도로 한국 뮤지컬의 수준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게 흥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나라 한국. 이런 우리 국민성에 춤과 노래가 연속되는 ‘쇼’인 뮤지컬은 가장 부합하는 장르일 수도 있다. 한류 열풍에 한국 뮤지컬이 편승할 날이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