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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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나와라” … 50여명 끌고가 ‘탕탕’

전남 담양군 갈전마을 양민학살 사건…인공기 흔들며 들어온 국군, 인근 마을서도 주민 사살

  • 입력2005-08-08 11: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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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나와라” … 50여명 끌고가 ‘탕탕’
    1950년 11월10일. 늦가을 황혼이 들녘을 붉게 물들이던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 갈전리. 마을 서편 수양산 자락을 넘어 인민군가가 간간이 들려오고 있었다. 인공기를 흔들며 산자락을 내려오고 있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국군. 철모와 복장으로 봐서는 국군이 분명했지만 이들은 인공기를 들고 인민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이웃 용대마을 이봉섭씨(당시 30세)가 인공기를 흔들며 수양산 자락으로 달려간 것은 바로 이때였다. 전날까지 이곳에 진주했던 인민군 제7사단이 다시 돌아온 줄 알고 나간 것. 이씨는 그 자리에서 국군에 의해 체포됐다. 조금 후 마을에는 국군과 경찰 300여명이 들이닥쳐 70여호의 부락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안 나오면 불에 타 죽는다.” 국군은 50여명의 주민들을 끌어낸 뒤 마을 앞 논에 모이게 했다. “인민공화국 만세!” 국군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나온 주민들에게 만세 삼창을 부르게 한 뒤, 갈전마을과 인접한 화순군 북면 맹리 2구 월곡마을 뒷산 중턱의 구릉으로 이들을 몰아넣었다.

    이내 구릉을 둘러싼 화기소대의 M-1 소총이 불을 뿜었다. 5세 어린아이부터 70세 노인까지, 끌려온 주민들은 하나둘씩 피를 쏟으며 죽어갔다.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다.

    “아앙 엄마아….” 피로 범벅된 시체 틈에서 어린아이의 찢어지는 듯한 울음이 들려왔다. “확인 사살!” 중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또 한바탕 사격이 시작됐다. 어머니의 등에 엎혀 총탄 세례를 피했던 최영주군(당시 5세)은 이때 결국 숨졌다. 조부 최정휴씨, 부모 최병길씨 부부, 누나(7세)와 함께 일가족이 몰살당한 것. 정용기, 용만씨 형제도 죽었고, 김봉골씨와 김성주씨는 부자지간에 운명을 달리했다.



    마을 유지라는 명목으로 처형에서 제외됐던 최만수씨는 “왜 죄없는 사람을 붙잡아 죽이느냐”고 항의하다 그 자리에서 사살됐다.

    “공비 50명 사살.” 중대장의 무전 전과보고가 있은 후 수복군 중대는 마을에 불을 지르고 화순군 쪽으로 이동했다. 다음날 아침 구사일생으로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던 몇몇 주민들은 가족의 시체를 수습한 뒤 가재도구 하나 없이 모두 갈전마을을 떠났다.

    이후 갈전리 마을의 진실은 묻혀진 채 마을 주민들의 가슴 속에서만 50년 세월을 보냈다. 음력 10월1일만 되면 통곡소리로 뒤덮였던 마을도 피해 주민들의 가족이 떠나면서 그때의 상처가 잊힌 듯했다. 그러나 진실은 5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현실로 되살아나고 있다. 5·16 군사쿠데타와 이어진 군사정권의 서슬 아래서는 ‘말할 수 없던 일’이었지만 지난해 노근리 사건과 거창 사건의 재조명 과정을 통해 이들도 이제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당시 아버지와 형을 잃은 김성수씨(62세)의 증언은 생사를 오갔던 그때의 급박한 상황을 전해준다. “수복군이 마을 주민을 잡아갈 때 죽을 힘을 다해 도망간 사람은 다 살았지. 장독 안에 숨은 사람, 냅다 내뺀 사람… 난 누나들 따라 곡성 방면으로 도망가 살았어. 밤에 돌아와 보니 형수 치마에 피가 흥건하더라고… 늦은 밤에 혼자 시체를 치웠지….”

    “동생 시체를 찾으러 언덕빼기를 오르는데 거기다 드르륵 또 기관총을 난사했어. 그때도 몇 명 죽었지… 인근 부락에서 놀러 온 사람, 피난 온 사람들이 뒤섞여서 몇 명이나 죽었는지 몰라.” 동생(임원식씨, 당시 29세)을 잃은 임용식씨(82)는 피해 주민이 갈전마을 주민으로 한정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최근 갈전리 이장 최계현씨(39)가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갈전리 출신 사망자는 25명, 부상자는 9명으로 밝혀져 15, 16명의 외지인 희생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는 인공기를 흔들며 달려갔던 용대마을 이봉섭씨도 포함됐다. 아직도 갈전마을에는 유족들의 일부가 살고 있지만 갈전리 양민학살의 진상을 가장 또렷이, 그리고 정확하게 기억하는 두 사람이 있다. 정태연씨(76)와 유동호씨(67). 갈전리 양민학살의 현장에 있었으면서도 살아남은 유일한 증언자들이다. 정씨는 갈전리 학살 현장으로 중대 병력을 안내한 이웃 산정마을 사람이고, 유씨는 학살 현장에서 팔과 허리에 총탄을 맞고도 생존한 사람이다.

    8·15해방 이후 조선대 법대를 나와 경찰관을 지낸 경력 때문에 살아남은 정씨는 공비토벌대의 소속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제11사단 20연대 3대대 10중대’. 정씨는 갈전마을 사건 이후 10중대와 함께 20연대 본부가 있는 영암군까지 간 뒤, 그곳에서 국군 군속으로 20연대 9중대에 배치됐다.

    “갈전마을에 도착하기 전 산정마을에서 마을 부녀회장을 비롯한 18명을 아무 이유 없이 죽였지. 난 무서워서 말도 못하고 시키는 대로 했어.” 정씨는 갈전마을 양민학살이 있기 전, 또 한 차례 학살이 있었음을 증언했다.

    갈전마을의 집단 학살이 있기 전 10중대는 오후 2시쯤 운산리 산정마을에 들어갔다. 10중대장은 마을에 들어서자 점심을 먹고 있던 주민들을 마을 당산나무 밑 논으로 모이게 한 뒤, 대뜸 인민위원장(이장)과 여성동맹위원장(부녀회장)을 찾았다. 이장 고광하씨(당시 27세)가 그곳에 없자 중대장은 부녀회장 김희임씨(당시 24세)와 이장의 어머니 박씨(57), 부인 박씨(27)를 그 자리에서 권총으로 사살했다. 그런 다음 20대에서 30대 초반의 청년 10명을 논 가장자리에 꿇어앉게 했다. 처형이 시작됐다. “일어나라. 명이 붙은 사람은 살려주겠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리숙하게 일어났다가 총탄을 맞고 다시 쓰러졌다.

    이 마을 유지 정연용씨(당시 45세)와 이장의 형인 고광을씨(당시 37세) 등 여섯 명은 무고한 주민을 죽이는 데 항의하다 그 자리에서 소총 세례를 받고 숨졌다. 10중대는 이날 산정마을 20가구 주민 중 18명을 사살한 후 갈전리로 옮겨갔다.

    “형이 국군 준위로, 동생이 하사로 있다고 했는데도 막무가내였어. 빨갱이(빨치산) 짓이나 하고 죽었으면 여한이나 없지. 빨갱이로 몰려 죽었다는 것이 피맺히게 억울해.” 당시 17세 나이로 아버지 조정수씨(당시 42세)의 죽음을 지척에서 지켜봐야 했던 조석근씨(운산리 이장)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왜 아버지가 죽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고 말했다.

    산정마을 유족들은 지난 88년 학살 현장이던 논 인근에 위령비를 세우고 91년 12월에는 청와대와 국방부, 국회 등에 명예회복을 위한 현장 조사를 실시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1950년 당시 해당 지역에서는 전투가 없었다. 전투 시기가 일치하지 않으므로 국군의 민간인 처형은 인정할 수 없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현재 갈전마을 주민들은 양민학살 진상 조사를 위한 청원운동에 나서려고 하지만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마을을 떠나 흩어져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방부 정책기획과 전재택 중령은 “갈전마을의 민간인 희생은 전혀 아는 바가 없으며 노근리 사건의 해결 이후 유사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중령은 “유사 사건 진상 조사 요구가 전국 각 지역에서 60여건에 이르고 있어 인력이 부족한 현실”이라고 말했다.

    “도망갔다 오니까 애어미가 세 살 된 아들놈 죽을까봐 들판에 내던지고 처형장에 끌려갔더라구. 지 어미 죽이는 총소리에 놀랐는지 그때부터 미쳐서 쉰 살이 넘은 지금까지 사람 노릇을 못하니… 차라리 그때 지 어미와 같이 죽었더라면….”

    갈전마을 학살 당시 아내를 잃은 김태호씨(83)에겐 50년이 흘렀는데도 6·25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남아 있다. 쉰세 살의 아들에겐 아직도 그날의 총성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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