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정재승 KAIST(한국과학기술원) 교수를 오랜만에 만났다. 원래 대중에게 사랑받는 과학자였지만 한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국민 과학자’가 된 까닭에 어렵게 시간을 잡았다. 그가 지난 대선 즈음 했던 중요한 연구 결과를 직접 듣고 싶어서였다. ‘알아두면 쓸 데 있는’ 정말 중요한 내용인데도 정작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 답답했기 때문이다.
전할 내용이 많으니 거두절미하고 정 교수의 연구를 살펴보자. 알다시피 그는 사람이 특정 선택을 할 때 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연구하는 과학자다. 이런 ‘선택의 과학’에 관심 있는 과학자가 선거에 주목하지 않을 리 없다. 5년에 한 번씩 전 국민이 참여하는 선거야말로 가장 중요한 선택의 장이니까.
정 교수는 지난 두 차례 대선(2007, 2012) 때 독특한 실험을 진행했고, 이번 대선 즈음에는 과거와 다른 실험을 고안했다. 바로 부동층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로 한 것. 적게는 20%에서 많게는 40%에 이르는 부동층이 선거 결과를 좌우한다는 게 세간의 속설이다. 그러니 그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부동층의 속마음을 읽어라!
실험 과정을 내 식으로 재구성해 설명하면 이렇다. 먼저 자신이 부동층이라고 믿는 참여자 여럿을 모집한다(106명).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아주 단순한 게임을 시킨다. 예를 들어 모니터 왼쪽에는 ‘문재인’, 오른쪽에는 ‘안철수’라고 적힌 버튼을 띄운다. 그리고 문재인 얼굴 사진이 나오면 왼쪽 버튼을, 안철수 얼굴 사진이 나오면 오른쪽 버튼을 누르게 한다.대다수 참여자는 이런 게임을 몇 차례 반복하면 문재인, 안철수 사진에 따라 거의 자동적으로 왼쪽, 오른쪽 버튼을 누르게 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실험 환경이 살짝 바뀐다. 문재인 사진이 나오면 눌러야 할 왼쪽 버튼에 ‘좋다’ ‘싫다’ 혹은 좀 더 극적으로 ‘쓰레기’ 같은 단어가 나오게 하는 것이다. 안철수 사진이 나오면 눌러야 할 오른쪽 버튼도 마찬가지다.
여기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문재인 후보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참여자가 있다. 애초 문재인 사진이 나올 때 왼쪽 버튼을 누르는 데 거침이 없던 그 앞에 ‘쓰레기’라는 단어가 나오면 어떨까.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 이런 경고가 켜질 테다. ‘감히 달님에게 쓰레기라니!’ 실제로 실험 결과 주춤하는 머뭇거림이 나타났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내심 안철수 후보에게 반감이 있던 참여자는 안철수 사진이 나오면 눌러야 할 오른쪽 버튼에 ‘좋다’가 표시되면 주춤하게 된다. 문재인 후보가 나왔을 때 ‘좋다’가 표시된 왼쪽 버튼을 누를 때는 거침이 없던 손가락이 자신도 모르게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안철수 후보에 대한 거부감이 심할수록 당연히 그 주저함의 시간도 길어진다.
정 교수의 실험 결과가 가진 의미는 이렇다. 자신을 부동층이라고 믿거나 그렇게 답하는 사람 가운데 반수 이상, 즉 60%가량이 실은 마음속으로 염두에 둔, 혹은 호감을 가진 후보가 있었다(문재인 48.9%, 안철수 14.9%). 앞의 게임 참여자에게 투표 후 실제 결과를 물었더니 일치도가 78.6%였다.
더욱 기막힌 사실도 있다. 정 교수는 4월 좀 더 욕심을 내 홍준표 후보까지 추가해 비슷한 실험을 했다. 실제 선거 결과 예측도 시도했다. 예측 값은 문재인 42.7%, 홍준표 22.8%, 안철수 19.1%. 5월 대선 결과는 문재인 41.1%, 홍준표 24%, 안철수 21.4%였다. 지상파 3사가 엄청난 금액을 들여 진행한 출구 조사 결과와 비교해보라.
어쩌면 ‘스윙 보터’는 없다
정 교수의 연구 결과는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먼저 흔히 ‘스윙 보터(swing voter)’로 불리며 선거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존재로 간주되던 부동층의 정체를 다시 탐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어쩌면 그동안 선거 때마다 부동층으로 불리던 이들 중 상당수는 알게 모르게 지지 후보가 있는 ‘숨은’ 지지자였을 공산이 크다.정당이나 후보가 엄청난 비용을 들이는 선거 캠페인의 효과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선거 캠페인은 대부분 열성 지지자가 아닌, 부동층을 겨냥한다. 그런데 애초 그 존재가 과장됐다면 선거 캠페인의 효과 역시 제한적이다. 실제로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선거 경험이 많은 여의도 정치인 몇몇에게 물었더니 한 정치인이 이렇게 고백했다. “캠페인 기간에 새로운 표를 만드는 건 환상이다. 물론 아차 하는 사이 표가 떨어져 나갈 수는 있다. 지지자가 투표장에 안 나올 테니까.” 그러니까 이런 말이다. 선거 캠페인으로 새로운 표를 확보하는 건 굉장히 어렵다. 다만 악재가 생기거나 패배 가능성이 짙어지면 기존의 호감 표가 기권 등으로 떨어져 나간다.
이제 머리가 복잡해진다. 선거 캠페인조차 영향이 제한적이라면, 그럴듯하게 포장해 내놓은 정책이 투표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미미할 것 아닌가.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에서 승리하려면 도대체 정치인, 또 정당은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질문에 정 교수는 “한 정치인의 삶 자체가 중요하다”는 답을 내놓았다. 공감한다. 앞에서 소개한 연구 결과는 역설적으로 ‘이미지 정치’가 아닌 ‘삶의 정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어떤 정치인이 선거 때만 일시적으로 그럴듯한 감언이설을 내놓으며 지지를 호소해도 효과는 거의 없다.
반면 그 정치인이 평소 일상생활 곳곳에 파고들어 한 사람의 삶 전체를 흔든다면 어떨까. 그 사람의 이해, 가치관, 심지어 비전까지 공유하는 정치인이 삶 한복판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면 당연히 마음속에는 그 정치인이나 정당에 대한 강한 호감이 형성될 것이다. 그런 호감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한국 정치에서 선거 때마다 반짝 ‘스타’가 등장해 판을 정리해주기를 바라는 것, 지지율에 따라 후보 간 합종연횡이 나타나는 것은 이런 삶의 정치가 부재한 탓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년부터 줄줄이 이어지는 각종 선거를 준비하는 정치인이 여럿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부동층의 속마음을 연구한 정 교수의 연구 결과를 숙고하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