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대학병원에서 일어난 ‘전공의 폭행 사건’이 언론에 보도됐다. 전공의는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고자 수련받는 인턴 및 레지던트를 가리킨다. 지도교수의 폭행으로 피멍이 든 전공의의 다리 사진을 보니 폭행 강도가 심각한 듯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른 대학병원에서는 전공의 성추행 사건까지 벌어졌고 이것이 언론에 보도돼 의사들의 명예가 크게 실추됐다. 피해를 입은 전공의는 분명 의사 신분이다. 그러나 대학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전문의 과정을 이수하는 피교육생 신분이기도 하다.
의사라는 직업의 본질은 사람 생명을 다루는 것이다. 그렇기에 엄격한 교육 및 훈련 과정은 필수다. 과거부터 의학계에는 이른바 ‘도제식 교육’이 도입돼 전공의는 주로 병원에서 숙식하며 일과 학습을 병행했다. 그러나 시대 변화에 따라 전공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이제는 일정 시간 이상 근무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전문의들은 전공의를 더는 ‘혹독하게 교육시켜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후배이자 제자이면서 존중해야 할 동료 의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 대학병원 교수는 전공의를 자신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고, 때로는 개인적인 심부름까지 해야 하는 ‘가운 입은 노예’로 여기고 있다. 물론 다른 분야나 직종에서도 지위를 이용한 ‘갑(甲)질’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의사도 좀 그러면 안 되나’는 식의 변명은 궁색하기만 하다. 왜냐하면 의사는 다른 어떤 직업보다 높은 도덕성과 상대에 대한 배려가 요구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가운 입은 노예’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의사는 최고 인기 직업 가운데 하나다. 의과대에는 가장 우수한 인재가 몰려든다. 의사는 안정적인 데다 어느 수준 이상 수입이 보장되는 것은 물론, ‘병을 고쳐 남을 돕는 선행’을 하는 직업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은 까닭이다.이런 특성상 의사는 누구보다 인간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춰야 한다. 후배나 제자라는 이유로 같은 의사를 깔보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환자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사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기에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다. 따라서 항상 긴장하고 정신이 번쩍 들게끔 욕하거나 때려서라도 제대로 가르쳐야 의료사고가 나지 않는다. 마음이 따뜻하지는 않아도 완벽한 의료 지식과 실력을 갖춘 의사가 오히려 환자를 낫게 한다. 실력은 별로 없으면서 인간적으로 따뜻하기만 한 의사는 오히려 환자에게 해가 될 수 있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이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환자의 정신적 요소가 치료 결과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모르고 하는 말이다. 가장 이상적인 의사는 ‘마음이 따뜻하고 실력 있는’ 사람이다. 의사들은 이에 대해 심리적 부담을 느끼거나 억울함을 토로할 수도 있다. “왜 의사만 높은 사회적 요구를 짊어져야 하나”라고 항변하는 의사도 꽤 많다. 하지만 이 같은 사회적 요구야말로 의사가 가장 훌륭하고 존경받는 직업이라는 방증이다. 생로병사를 지근거리에서 직접 다루는 사람이 의사고, 살면서 의사에게 한 번도 신세(?) 지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의사는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이고, 따라서 높은 사회적 요구를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의사 간 폭력과 폭언, 간호사 등 의료인에 대한 폭행과 성추행, 심지어 환자를 대상으로 한 각종 비윤리적 언사가 언론을 통해 불거져 나올 때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생뚱맞게 들릴 수 있지만, 필자는 우리 사회가 도덕성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로 키우는 데 치중하는 작금의 현실은 우리 사회를 경쟁적이고 메마른 분위기로 만들고 있다. 최근 급증하는 각종 성범죄나 ‘묻지마 폭력’도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도덕지능’ ‘공감능력’이 중요한 이유
수치화해 말하기는 어렵지만, 좋은 인성 및 배려심을 갖춘 인재를 키우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와 자기 욕심을 채우고자 타인의 피해는 아랑곳하지 않는 비도덕적 인간형의 증가는 분명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학습지능’이 아닌 ‘도덕지능’을 강조해야 한다.도덕지능은 로버트 콜스 미국 하버드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주창한 용어다. 그는 도덕, 즉 지켜야 할 도리 또는 바람직한 행동 기준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하려면 지능지수(IQ)나 감성지수(EQ) 외에 도덕지능(MQ)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미국 교육심리학자 미셸 보바는 도덕지능을 갖추는 데 필요한 7가지 핵심 덕목을 제시했는데 △다른 사람 처지에서 생각해보는 공감능력 △옳고 그름을 아는 분별력 △충동을 조절해 올바른 생각과 행동을 하는 자제력 △다른 사람과 동물을 소중히 대하는 존중 △타인의 행복에 관심을 갖는 친절함 △의견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관용 △정정당당하게 행동하는 공정함이 그것이다.
공부만 잘하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아이는 커서도 다른 사람과 융화하지 못할뿐더러, 조직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우수한 실력에도 사회적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긴다. 뛰어난 전문지식과 기술을 갖춰 직업적으로 성공하기는 하지만, 타인을 짓밟고 무시해 상처를 주는 나쁜(또는 못된) 사람이 되곤 한다. 따라서 어릴 적부터 도덕지능을 키워준다면 이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됐을 때는 그야말로 ‘도덕적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더 강조하고 싶은 덕목은 ‘공감능력’이다. 공감이란 무엇일까.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함께 느끼고 이해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필수 덕목이라 할 수 있다. 평소 부모가 다른 사람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모습을 아이 앞에서 자주 보여준다면, 아이는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부모의 공감능력을 따라 배운다. 공감능력을 가진 아이는 자연스레 보편적 도덕성을 깨닫게 될 뿐 아니라, 도덕적 언행도 실천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사회 지도층이나 회사 관리자 자리에 있는 사람은 스스로 공감능력과 도덕성을 키우고 갖추는 노력을 통해 사회적으로 존경받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어른이 어른다운 사회, 지도자가 지도자다운 사회, 스승이 스승다운 사회가 돼야 나라가 안정되고 국민도 행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