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비슷한 시기, 한 전직 안보부처 고위관계자 역시 국정원 국내파트 관계자로부터 면담 요청을 받았다. 해당 부서 현직 장관이 국회 관련 상임위원회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밝힌 ‘소신’을 어떻게 보느냐는 게 주요 질문 내용이었다. 부처 간 업무분장과 역할분담에 대해 정부 안에서 설왕설래가 이어지던 시기. “단순한 동향 파악이 아니라 장관의 견해를 평가해달라는 건 매우 이례적”이라는 게 이 전직 고위관계자의 설명이다. 국정원이 평가작업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개의치 않는 듯한 태도도 이전과 사뭇 달랐다는 것이다.
10월 중순부터 11월 초 사이, 정부 중앙부처 당국자들이 은밀히 촉각을 곤두세운 이슈 가운데 하나는 ‘사정당국이 진행하고 있다는 장차관급 고위공직자 직무평가’였다. 10월 20일 ‘동아일보’가 이 소식을 단독 보도하자 가장 먼저 도마에 오른 질문은 문제의 사정당국이 과연 어디냐는 것. 검찰과 경찰 등 주요 사정기관 관계자들은 ‘자신은 아니다’라며 손사래를 쳐가며 수행기관이 어디인지를 확인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언론 비판에도 평가 일정 진행
10월 28일 서울 서초구 국가정보원에서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
관계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국정원 국내파트의 고위공직자 직무평가는 크게 두 차례로 나눠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차 작업은 정부 중앙부처 장관 전체와 차관 2~3명 선으로 대상이 한정돼 있던 만큼 비교적 신속하게 진행됐고, 11월 초 보고서 작성까지 마무리돼 국정원 내부 결재를 완료한 것으로 전해졌다. 2차 작업은 각종 위원회와 외청에 이르기까지 전체 장차관급 고위공직자를 대상으로 진행 중이며, 12월 중순이 목표 시한인 것으로 알려졌다. 1차 평가는 ‘장차관’이 대상이었던 반면 2차 평가는 ‘장차관급 전체’가 대상인 셈이다.
일각에서는 11월 18일 발표된 국가안전처 장관 등 일부 개각 인사에 국정원 직무평가 내용이 반영된 것 같다는 분석을 내놓지만, 1차 평가 대상자를 고려하면 사실이 아닐 공산이 커 보인다. 이날 개각은 새로 설립된 부처와 인사 수요가 생긴 방위사업청장 등 ‘빈자리를 채워 넣는’ 방식으로 이뤄졌고, 1차 평가에 포함됐던 장차관 자리는 거의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 1차 대상자에 해당하는 인물이 이번 인사를 통해 자리를 옮긴 경우 역시 눈에 띄지 않는다. 해당사항이 없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정부 안팎에서는 연말연시를 기점으로 주요 부처 장차관을 포함한 광범위한 개각이 준비되고 있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다. 이를테면 ‘진짜 개각’인 셈. 정홍원 국무총리와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까지 포함한 ‘새로운 그림’을 통해 집권 후반기를 열겠다는 것이 청와대의 의지이고, 국정원의 직무평가는 이를 위한 사전준비 작업에 가까워 보인다는 분석이다.
다만 그 구체적인 시점에 대해서는 정부 관계자 사이에서도 시각이 엇갈린다. 당장 공무원연금 개혁 문제로 ‘전장(戰場)’이 치열해진 상황에서 전면 개각을 단행하기란 쉽지 않다는 반론이 대표적이다. 청와대는 연금개혁을 올 연말까지 추진하겠다는 로드맵을 수립해뒀지만, 이해당사자들의 반발과 야권의 기류를 감안하면 현실성이 높지 않다는 것. 공무원연금 개혁 논의가 길어지는 만큼 내년 2월 대통령 취임 2주년 즈음 ‘3년 차 출범’이라는 상징성을 부여해 개각을 단행하는 그림이 회자되는 이유다. 정 총리 등이 책임지고 공무원연금 개혁 작업을 마무리 지은 뒤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기는 형식이다.
4월 15일 당시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에서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 조작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있다.
한 가지 주목할 대목은 박근혜 정부 들어 국정원의 고위공직자 직무평가가 사실상 처음이라는 사실이다. 비위 등 특이 동향에 대해 상시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러한 형식의 ‘일제조사’는 없었다는 게 정부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설명이다. 국무조정실이 140개 국정과제 이행 상태를 중심으로 연말까지 진행하는 정부업무평가는 지난해와 올해 모두 꾸준히 이어져온 반면, 국정원의 직무평가 작업은 전임 정부에서도 흔치 않은 사례라는 뜻이다.
실제로 안보기관으로서의 구실을 강조했던 남재준 전 국정원장 재임 시절의 경우, 국정원은 국내현안과 일정 부분 거리를 둔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 일각에서 정부기관과 국내 현안 관련 역할을 주문했지만 2012년 ‘국정원 댓글 사건’의 여파에 시달리던 국정원 수뇌부가 이를 사실상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 그간에는 조심스럽기 짝이 없던 분위기가 국정원 댓글 사건 1심 재판 마무리와 이병기 원장 취임 이후 사뭇 달라졌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국정원의 고위공직자 직무평가를 바라보는 시각은 전문가나 전직 정보기관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극과 극으로 나뉜다. 공직사회의 긴장과 기강을 유지하기 위한 작업은 국정원의 고유 업무 범위에 해당하는 만큼, 이를 정치권 사찰이나 국내정치 개입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가 첫 번째다. 국정원 직원들이 각 부처 실무에 개입하는 등의 부작용만 관리하면 나쁠 게 없다는 견해다. 이병기 원장 본인도 10월 28일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 같은 취지로 해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비판 역시 만만치 않다. 고위공직자 직무평가와 국내정치 개입은 동전의 양면인 데다, 국무조정실의 공식 업무평가와 별개로 비공개 작업을 진행하는 것은 투명성 차원에서도 적절치 않다는 것.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국정원이 장차관의 인사 및 신상 정보를 걸고 다른 부처의 ‘갑’이 되겠다는 속내 아니냐”는 불쾌감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분명한 점은 이번 직무평가가 국정원 자체 판단에 따라 진행됐으리라고 보는 정부 당국자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청와대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이야기다. 집권 2년 마무리를 앞둔 청와대가 다가오는 개각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업무분장상으로는 인사수석실이 맡아야 할 직무평가 결과 보고가 청와대 안의 ‘다른 라인’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는 뒷말 역시 마찬가지. 권력과 정보기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불안감도 함께 커지는 딜레마의 그림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