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마음을 보는 거울이 있다는 걸 아는가. 꿈은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비춰주는 상이다.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꿈에서는 사람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물속에서 숨을 쉬고, 개가 사람 말을 하고, 예전에 사라진 공룡이 숲 속을 거닌다. ‘걸리버 여행기’처럼 사람이 엄지공주만해지는가 하면 거인들도 살아서 움직인다. 이성적인 현대인은 꿈처럼 실현 불가능하고 황당한 세상은 없다고 믿는 듯하다. 오죽하면 ‘개꿈’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그런데 실은 꿈이 황당한 게 아니라, 그 언어의 방식을 망각해 꿈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어떨까.
‘신의 연애편지’&‘마술거울’
꿈에 대한 선조들의 태도는 우리와 사뭇 달랐다. 인류사에서 가장 오래된 책들도 꿈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종교 경전들은 예외 없이 꿈을 소중하게 얘기한다. 우리 문화에서도 해몽은 주요한 전통이었다. 오랜 호기심의 대상이던 꿈을 과학적 언어로 보고 학문적 탐색을 시작한 역사는 200년 남짓 됐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로부터 시작돼 칼 융을 거치며 이제 꿈도 학문의 한 분야가 됐다.
프로이트는 꿈을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라 했다. 우리 정신에서 미지로 남아 있는 무한한 탐색의 세계인 무의식. 프로이트는 꿈이 무의식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첩경이며 의식을 무의식으로 확장하는 제일 좋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과연 다른 문화에서는 꿈을 무엇이라고 정의하고 묘사할까. 또한 꿈에 대한 생각이 과거와 현재는 어떻게 다를까.
‘탈무드’에서는 꿈을 ‘신의 연애편지’라고 했다. 신은 매일 밤 꿈이라는 건강과 성장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보내는데 우리는 봉투도 뜯지 않고 버린다는 것이다. 꿈을 기억해 그 안에 들어 있는 메시지를 알아차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신의 편지를 거부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꿈에 대해 공부할수록 이 시적인 표현보다 더 적절하게 꿈을 묘사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꿈은 ‘마술거울’이기도 하다. ‘백설공주’ 이야기에 나오는 왕비의 거울처럼, 꿈이라는 거울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오직 진실만을 이야기하니 꿈을 들여다보며 대화를 시작하면 자신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일생 동안 고통 받는 원인은 무엇인지, 타인과 관계를 맺는 패턴은 어떠한지 등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꿈은 마음 안에서 오고가는 일들을 바라보며 자신을 더 깊이 알아가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누군가 꿈이란 무엇이냐고 물어오면 필자는 “삶의 나침반”이라 답한다. 나침반이 방향을 가리켜주듯 꿈이라는 나침반은 삶의 방향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나침반은 언제나 북쪽을 가리켜 길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데, 꿈이라는 나침반은 자기실현 혹은 ‘참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기준점을 알려준다. 꿈은 인생길에서 멀리 표류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인생 나침반 기능을 하기도 한다.
꿈을 꿔도 그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꿈을 꾸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누구나 하룻밤 동안 다섯 번에서 일곱 번 정도 꿈을 꾼다. 꿈을 꾸지 않는다는 말은 습관적으로 꿈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하는 핑계일 따름이다. 인간이 긴 시간 꿈을 꾸도록 진화했다면 분명 꿈은 황당하고 허무맹랑한 ‘개꿈’으로만 채워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가 꿈 세계를 탐색하며 밝혀낸 꿈 지식들이 있다.
꿈은 보편적인 언어로 이야기하며 언제나 꿈꾼 사람의 건강과 성장을 도와주는 구실을 한다. 건강과 성장을 도와준다면서 왜 악몽을 꾸고 가위에 눌리는 등 잠자는 데 스트레스를 받게 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실 악몽은 나쁜 꿈이 아니다. 본성에 어긋나게 살고 있으니 “당장 깨어나야 해!”라며 무의식이 보내는 ‘전기충격’이다. 그냥 두면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에 우리 뇌가 꿈 안에 시급한 메시지를 담아 관심을 촉구하며 보내는 충격타인 셈이다. 그러니 악몽은 나쁜 꿈이 아니라 ‘119 꿈’이라 할 수 있다.
나를 밝혀줄 정보의 보물창고
흔히 좋은 꿈, 나쁜 꿈이라는 말을 한다. 좋고 나쁘다는 말은 ‘작은 나’인 아상(我相)이 기준일 따름이다. 꿈은 그보다 훨씬 큰 그림을 그린다. 존재 자체의 건강과 안녕에 관심을 집중하니 어떤 기분으로 꿈을 꾸든 알고 보면 그저 감사할 것이 꿈이다.
‘내가 깨어나기를 바란다면 좀 알아듣기 좋게 친절하게 이야기해주면 안 될까.’ 꿈에 바라는 모두의 염원이다. 그렇지만 꿈은 제 나름 최선을 다한다. 자신의 한정된 의식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앞서 꿈이 황당한 게 아니라 꿈의 언어 방식을 모르기에 우리가 황당하게 느낀다고 했는데, 우리가 꿈을 꾸고도 개꿈처럼 여기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꿈은 문자 그대로 사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언제나 은유와 상징으로 말한다. 그게 바로 꿈의 언어이자 말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무거운 소금자루를 어깨에 메고 끙끙대며 가는 꿈을 꿨다면, 체내에 염분이 지나치게 많다는 표현일 수 있다. 대소변을 못 봐서 화장실을 찾아 헤매거나 화장실이 너무 더러워 볼일을 못 보는 꿈을 꾼다면 내 안에 구린 부분을 끼고 있다는 말이 된다. 제대로 배출하지 못하니 변비가 걸린 상태인 셈인데, 주로 불편한 생각이나 감정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있을 때 이런 꿈을 꾼다.
나체로 나오는 꿈을 꿨다면 평소보다 지나치게 자신을 많이 노출했다고 염려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머리에 이가 득실거리는 꿈을 꿨다면 어떤 생각이 머리에 붙어 도무지 떨쳐낼 수 없는지 떠올려보라.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거나 쓸데없는 집착이 자기 영혼을 갉아먹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일 수 있다. 꿈 언어는 상징시와 유사하다. 이렇게도 읽을 수 있고 저렇게도 읽을 수 있도록 여지가 많은 게 ‘꿈 말’이다.
우리가 꿈을 황당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꿈이 수많은 것을 동시에 말하기 때문이다. ‘이 꿈은 이런 뜻이다’라는 방식의 대입법은 통용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꿈은 건강과 성장에 가장 필요한 메시지를 보내는 소통 방식이다. 꿈을 꾸는 이에게 필요한 정보가 많다 보니 매번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한 가지 꿈에 꼬깃꼬깃 구겨 넣어 메시지를 보낸다. 이때 정보는 꿈꾸기 하루 이틀 전후 또는 그날 낮 동안 일어난 상황을 반드시 반영한다. 또한 어린 시절 성장 과정이나 부모와의 관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를 통해 자신이 한평생 사람들과 맺어가는 관계 패턴을 알아볼 수도 있다.
꿈은 프로이트가 강조하는 성 에너지에 대해서도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융이 강조하는 삶의 의미나 자기실현의 욕구도 반영한다. 이 밖에도 꿈에는 우등하거나 열등하거나 지배하거나 통제당하는 힘의 역학 관계, 육체적 건강에 대한 이슈, 선조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자신을 알고 싶다면 꿈은 정보의 보물창고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첫 문을 두드릴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도구가 꿈이다. 잠만 자면 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깊은 나를 탐색하려 할 때 일생 동안 가까이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또한 꿈이다. 밤마다 꿈은 우리 의식의 문을 두드려 왔다. 오랫동안 무시하고 방치해온 꿈의 말 걸기에 화답해보면 어떨까. 분명 꿈같은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무한히 아름다운 자신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신의 연애편지’&‘마술거울’
꿈에 대한 선조들의 태도는 우리와 사뭇 달랐다. 인류사에서 가장 오래된 책들도 꿈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종교 경전들은 예외 없이 꿈을 소중하게 얘기한다. 우리 문화에서도 해몽은 주요한 전통이었다. 오랜 호기심의 대상이던 꿈을 과학적 언어로 보고 학문적 탐색을 시작한 역사는 200년 남짓 됐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로부터 시작돼 칼 융을 거치며 이제 꿈도 학문의 한 분야가 됐다.
프로이트는 꿈을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라 했다. 우리 정신에서 미지로 남아 있는 무한한 탐색의 세계인 무의식. 프로이트는 꿈이 무의식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첩경이며 의식을 무의식으로 확장하는 제일 좋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과연 다른 문화에서는 꿈을 무엇이라고 정의하고 묘사할까. 또한 꿈에 대한 생각이 과거와 현재는 어떻게 다를까.
‘탈무드’에서는 꿈을 ‘신의 연애편지’라고 했다. 신은 매일 밤 꿈이라는 건강과 성장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보내는데 우리는 봉투도 뜯지 않고 버린다는 것이다. 꿈을 기억해 그 안에 들어 있는 메시지를 알아차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신의 편지를 거부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꿈에 대해 공부할수록 이 시적인 표현보다 더 적절하게 꿈을 묘사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꿈은 ‘마술거울’이기도 하다. ‘백설공주’ 이야기에 나오는 왕비의 거울처럼, 꿈이라는 거울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오직 진실만을 이야기하니 꿈을 들여다보며 대화를 시작하면 자신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일생 동안 고통 받는 원인은 무엇인지, 타인과 관계를 맺는 패턴은 어떠한지 등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꿈은 마음 안에서 오고가는 일들을 바라보며 자신을 더 깊이 알아가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누군가 꿈이란 무엇이냐고 물어오면 필자는 “삶의 나침반”이라 답한다. 나침반이 방향을 가리켜주듯 꿈이라는 나침반은 삶의 방향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나침반은 언제나 북쪽을 가리켜 길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데, 꿈이라는 나침반은 자기실현 혹은 ‘참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기준점을 알려준다. 꿈은 인생길에서 멀리 표류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인생 나침반 기능을 하기도 한다.
꿈을 꿔도 그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꿈을 꾸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누구나 하룻밤 동안 다섯 번에서 일곱 번 정도 꿈을 꾼다. 꿈을 꾸지 않는다는 말은 습관적으로 꿈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하는 핑계일 따름이다. 인간이 긴 시간 꿈을 꾸도록 진화했다면 분명 꿈은 황당하고 허무맹랑한 ‘개꿈’으로만 채워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가 꿈 세계를 탐색하며 밝혀낸 꿈 지식들이 있다.
꿈은 보편적인 언어로 이야기하며 언제나 꿈꾼 사람의 건강과 성장을 도와주는 구실을 한다. 건강과 성장을 도와준다면서 왜 악몽을 꾸고 가위에 눌리는 등 잠자는 데 스트레스를 받게 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실 악몽은 나쁜 꿈이 아니다. 본성에 어긋나게 살고 있으니 “당장 깨어나야 해!”라며 무의식이 보내는 ‘전기충격’이다. 그냥 두면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에 우리 뇌가 꿈 안에 시급한 메시지를 담아 관심을 촉구하며 보내는 충격타인 셈이다. 그러니 악몽은 나쁜 꿈이 아니라 ‘119 꿈’이라 할 수 있다.
나를 밝혀줄 정보의 보물창고
흔히 좋은 꿈, 나쁜 꿈이라는 말을 한다. 좋고 나쁘다는 말은 ‘작은 나’인 아상(我相)이 기준일 따름이다. 꿈은 그보다 훨씬 큰 그림을 그린다. 존재 자체의 건강과 안녕에 관심을 집중하니 어떤 기분으로 꿈을 꾸든 알고 보면 그저 감사할 것이 꿈이다.
‘내가 깨어나기를 바란다면 좀 알아듣기 좋게 친절하게 이야기해주면 안 될까.’ 꿈에 바라는 모두의 염원이다. 그렇지만 꿈은 제 나름 최선을 다한다. 자신의 한정된 의식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앞서 꿈이 황당한 게 아니라 꿈의 언어 방식을 모르기에 우리가 황당하게 느낀다고 했는데, 우리가 꿈을 꾸고도 개꿈처럼 여기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꿈은 문자 그대로 사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언제나 은유와 상징으로 말한다. 그게 바로 꿈의 언어이자 말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무거운 소금자루를 어깨에 메고 끙끙대며 가는 꿈을 꿨다면, 체내에 염분이 지나치게 많다는 표현일 수 있다. 대소변을 못 봐서 화장실을 찾아 헤매거나 화장실이 너무 더러워 볼일을 못 보는 꿈을 꾼다면 내 안에 구린 부분을 끼고 있다는 말이 된다. 제대로 배출하지 못하니 변비가 걸린 상태인 셈인데, 주로 불편한 생각이나 감정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있을 때 이런 꿈을 꾼다.
나체로 나오는 꿈을 꿨다면 평소보다 지나치게 자신을 많이 노출했다고 염려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머리에 이가 득실거리는 꿈을 꿨다면 어떤 생각이 머리에 붙어 도무지 떨쳐낼 수 없는지 떠올려보라.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거나 쓸데없는 집착이 자기 영혼을 갉아먹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일 수 있다. 꿈 언어는 상징시와 유사하다. 이렇게도 읽을 수 있고 저렇게도 읽을 수 있도록 여지가 많은 게 ‘꿈 말’이다.
우리가 꿈을 황당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꿈이 수많은 것을 동시에 말하기 때문이다. ‘이 꿈은 이런 뜻이다’라는 방식의 대입법은 통용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꿈은 건강과 성장에 가장 필요한 메시지를 보내는 소통 방식이다. 꿈을 꾸는 이에게 필요한 정보가 많다 보니 매번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한 가지 꿈에 꼬깃꼬깃 구겨 넣어 메시지를 보낸다. 이때 정보는 꿈꾸기 하루 이틀 전후 또는 그날 낮 동안 일어난 상황을 반드시 반영한다. 또한 어린 시절 성장 과정이나 부모와의 관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를 통해 자신이 한평생 사람들과 맺어가는 관계 패턴을 알아볼 수도 있다.
꿈은 프로이트가 강조하는 성 에너지에 대해서도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융이 강조하는 삶의 의미나 자기실현의 욕구도 반영한다. 이 밖에도 꿈에는 우등하거나 열등하거나 지배하거나 통제당하는 힘의 역학 관계, 육체적 건강에 대한 이슈, 선조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자신을 알고 싶다면 꿈은 정보의 보물창고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첫 문을 두드릴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도구가 꿈이다. 잠만 자면 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깊은 나를 탐색하려 할 때 일생 동안 가까이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또한 꿈이다. 밤마다 꿈은 우리 의식의 문을 두드려 왔다. 오랫동안 무시하고 방치해온 꿈의 말 걸기에 화답해보면 어떨까. 분명 꿈같은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무한히 아름다운 자신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