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저녁 서울에서만 180만 명(경찰 추산 32만 명)이 촛불을 든 광화문광장 앞 세종대로. 서울역광장에서 광화문까지 늘어선 100만 명 인파로 발 디딜 틈조차 없던 3·5차 촛불집회와 달리, 6차 촛불집회가 열린 이날 세종대로는 오히려 걸을 만했다. 촛불을 든 시민들이 최대한 청와대와 가까운 곳에 몰려 있었기 때문. 이날 집회에서 가장 붐비는 곳은 경복궁 성곽 앞과 내자동로터리, 청운동 등 청와대로 가는 길목이었다. 오후 6시가 넘어가자 집회의 최전선인 청운효자동주민센터로 가는 도로(효자로, 자하문로, 팔문대로)는 ‘대통령 즉각 퇴진’ 구호를 외치는 시민으로 가득 찼다.
‘대통령 퇴진’만 외치던 지난 집회와는 달리 이번 집회의 불길은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여당세력에게도 옮겨 붙었다. 11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이 3차 대국민담화를 통해 대통령직 진퇴와 관련한 책임을 국회로 넘기자 탄핵에 찬성하던 새누리당 비박(비박근혜)계의 기류가 탄핵 반대로 급변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새누리당 당론이 ‘대통령 4월 퇴진’으로 정해지자 국민의 분노가 부화뇌동하는 여당으로 향하게 된 것.
‘4월 퇴진’이라는 여당 당론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12월 3일 촛불집회 사전 행사에서 그 크기를 알 수 있었다. 촛불집회를 주최하는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과 ‘박근혜 하야 전국청소년비상위원회’ 등 시민 2000명은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 모였다. 이날 여의도에 모인 인파는 본 집회에 앞서 새누리당 해체와 박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새누리당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공범”이라고 외치며 준비해온 대형 새누리당 깃발을 찢기도 했다.
대통령 눈치 보는 여당이 더 미워
새누리당사 건물에는 ‘국민 여러분 한없이 죄송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국정을 수습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여의도 사전 집회에 참가한 이모(34) 씨는 “교묘한 말장난으로 퇴진을 끝까지 거부하는 대통령에게도 화가 나지만, 말로는 국민을 위한다면서 대통령 눈치 보기 바쁜 여당도 밉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씨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더 있어서였는지 참가자 가운데 일부는 현수막에 달걀을 던지기도 했다.
한 시간이 지나 오후 3시가 되자 시위대는 새누리당사 앞을 깨끗이 비웠다. 그러나 여의도 국회 앞에서는 여전히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같은 시간 집회를 시작한 박근혜 대통령 추종 단체의 맞불집회였다. 주최 측 추산 5000명의 집회 참가자는 “대통령 압박하는 썩은 국회 해산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오후 5시까지 집회를 이어갔다. 이날 집회에 참가한 서울 마포구의 이인석(76) 씨는 “못 배운 젊은 사람들이 좌경사상에 물들어 대통령께 물러나라는 버릇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 다들 철이 좀 들어야 한다”며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서라도 대통령께서는 절대 자리를 지켜주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수단체의 맞불집회에는 간혹 젊은 청년도 보였다. 서울 근교 대학에 다닌다는 이모(27) 씨는 “대통령을 탄핵하면 새로 임시직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데, 그렇다면 박 대통령 임기가 끝나고 또 제대로 된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이는 국력과 세금의 비효율적인 낭비일 뿐”이라며 “만약 대통령이 잘못한 일이 있다면 이는 임기가 끝난 뒤 검찰 조사를 통해 밝히고 처벌하면 될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바와 달리 탄핵으로 대통령이 물러나면 재선거로 임시직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 국무총리 등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돼 임시로 업무를 맡게 된다. 그 기간에 대통령선거를 실시해 5년 임기의 대통령을 다시 뽑는 것이다.
주눅 든 새누리당 비박계
촛불집회 참가자들은 맞불집회 참가자들과 달랐다. 이들은 맞불집회 참가자처럼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 적의를 표출하지 않았으며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날 집회에 참가한 서울 광진구의 김민수(21) 씨는 퇴진 반대운동을 하는 일부 보수단체 회원에 대해 “그분들에게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자유가 있으니 집회를 여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매주 100만 명 이상이 대통령 퇴진을 외치며 집회에 참가하는 만큼 이들의 의견에 대해서도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한 번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내자동 인근에 자리를 잡고 촛불을 든 서울 동작구의 조선희(38·여) 씨는 “세 번이나 대국민담화를 하고도 국민 뜻과는 다르게 하야 의사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 대통령도 답답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태도를 바꾸는 국회의원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대의제 민주주의라면 대표자들이 국민의 뜻을 대변해야 하는데 지금 일부 국회의원은 정략적 판단 때문에 눈치만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높아진 분노 수위와 달리 이날 집회는 과거 어떤 집회보다 평화롭게 진행됐다. 사상 최초로 청와대 100m 앞까지 행진을 허용한 법원의 이례적 판결에 시민들은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보답했다. 청운효자동주민센터에 모인 시위대는 차벽과 5m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집회를 진행했다. 오후 7시 소등 퍼포먼스와 8시 횃불 행진 등 다양한 행사와 일부 유명인사의 자유발언에도 이 안전거리는 끝까지 지켜졌다. 집회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안전거리가 해제된 것은 집회 본 행사가 완전히 끝난 밤 11시 이후였다. 이들은 아이들이 장난으로 경찰 차벽에 붙인 ‘대통령 퇴진, 여당도 공범’이라는 내용의 스티커나 바람에 날려 차벽 앞까지 날아간 쓰레기를 주우며 거리를 청소했다.
차벽에 붙은 스티커를 떼던 경기 일산의 이유정(22·여) 씨는 “이렇게 집회가 끝나고 경찰 버스가 경찰서로 돌아가면 의무경찰(의경)들이 이 스티커를 떼야 한다. 의경들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추운 겨울에 집회 참가자들과 대치하는 것도 서러울 텐데 이런 부분이라도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다. 집회 현장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던 서울 중랑구의 장모(39) 씨는 “집회 때마다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대통령과 여당에게 국민의 정제된 분노를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질서 있는 집회 모습은 대통령에게 실망한 사람들의 집회 참가를 독려함과 동시에 대통령과 여당에게는 이 집회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압박이 될 수 있으리라 본다”고 밝혔다.
장씨의 말처럼 정제된 분노의 효과인지 오리무중이던 새누리당 비박계가 통일된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집회 다음 날인 12월 4일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으로 구성된 비상시국위원회는 “논의를 거듭한 끝에 특별한 여야 합의가 없으면 9일 탄핵소추안 표결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