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시장에 낀 살얼음이 심상치 않다. 통상 비수기로 꼽히는 연말 주택시장이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다르다. 올해 전국 집값의 월별 상승률 최고치를 기록한 10월과 비교하면 상당히 위축된 분위기다. 주택시장에 낀 과도한 거품을 잡겠다며 주택·금융 규제를 연거푸 꺼내 든 정부 정책이 효과를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11·3 부동산대책’ 이후 연말 분양시장은 투자 수요가 대거 빠지고 실수요자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되면서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그러나 투자 수요를 잡겠다며 내놓은 대책 때문에 실수요자의 선택 폭마저 줄었다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동산시장을 옥죄는 ‘대못 3종 세트’(청약 자격 강화·대출금리 상승·집단대출 규제)가 내 집 마련이 간절한 무주택 서민의 발목마저 잡는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서울 송파구 문정동에 마련된 ‘래미안신반포리오센트’(서초구 잠원동 잠원한신18·24차 통합 재건축단지) 본보기집. 올해 서울 강남권 마지막 분양단지로 관심을 모았지만 본보기집 앞을 가득 메우던 입장 대기 줄은 사라졌고, 손님 잡기에 열을 올리던 ‘떴다방’(이동식 부동산중개업소)도 자취를 감췄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11·3 부동산대책으로 청약 요건이 까다로워진 데다, 입주 전까지 전매 제한 규제를 받다 보니 단기 차익을 노린 투자 수요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청약 재당첨, 중복 당첨 규제에 혼란
정작 청약시장에서 혼란이 커진 것은 실수요자다. 서울 노원구에 사는 직장인 박모(30) 씨는 11월 말 동주민센터에서 생애 첫 전입신고를 마쳤다. 부모와 같이 사는 박씨지만 친척집에 양해를 구하고 주소지를 옮겨 가구주 신분이 됐다. 중학생 때부터 15년 넘게 청약통장을 유지해온 그는 조만간 청약으로 내 집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11·3 부동산대책으로 서울 등 조정대상지역에서 청약할 경우 가구주가 아닌 가구원은 1순위 청약이 불가능해져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박씨는 “가구주만 1순위로 청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서둘러 주소를 이전했다”며 “가구원으로 청약통장을 가지고 있는 주변 사람도 속속 가구주로 전입신고를 하는 추세”라고 전했다.본보기집에서 청약 1순위인지 여부를 꼼꼼히 확인하는 실수요자도 부쩍 늘었다. 서울의 한 본보기집에서 만난 신대호(34) 씨는 “수도권에서 청약통장을 쓰지 않고 청약금만으로 2순위 청약을 했다 당첨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청약이 안 된다고 하더라”며 “한 달 만에 갑자기 바뀐 부동산대책 때문에 내 집 마련이 5년이나 미뤄졌다”고 토로했다. 한 분양대행사 관계자는 “부부 가운데 한 명이라도 5년 내 당첨된 경험이 있으면 재당첨이 금지된다는 사실을 많이들 모르고 있다”며 “상담 과정에서 1순위 자격이 안 되는 것을 알고 실망하는 방문객이 적잖다”고 말했다.
11·3 부동산대책으로 대폭 강화된 중복 당첨 규제도 실수요자의 고민을 깊게 만들고 있다. 당첨자 발표일이 같은 아파트단지에 중복 청약했다 동시에 당첨될 경우 당첨이 취소되고 향후 1년간 청약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단지가 있어도 당첨일이 겹치면 한 곳만 선택해야 해 소신껏 청약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는 청약 경쟁률의 양극화 현상으로 나타났다. 12월 3일 분양 당첨자를 발표한 서울 마포구 ‘신촌그랑자이’(평균 28.4 대 1)와 송파구 ‘잠실올림픽아이파크’(평균 28.9 대 1)는 수십 대 1 경쟁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같은 날 분양한 ‘e편한세상서울대입구’(평균 5.04 대 1)와 ‘래미안아트리치’(평균 4.6 대 1)는 청약 경쟁률이 한 자릿수에 그치며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반면 이들 단지보다 하루 늦게 당첨자를 발표한 종로구 ‘경희궁롯데캐슬’은 1순위 청약에서 평균 43 대 1, 최고 200 대 1 경쟁률을 보이며 전 주택형이 조기 마감됐다. 인기 분양단지를 피해 당첨자를 발표한 게 청약자를 끌어모으는 데 한몫했다는 분석이다.
설상가상으로 11월 24일 금융위원회가 분양아파트의 집단대출 성격이 큰 잔금대출에 대해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내년부터 적용할 뜻을 밝히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2월부터 시행 중인 기존 주택담보대출과 마찬가지로 내년 1월 분양 공고하는 아파트 잔금대출은 거치기간 없이 원리금을 분할상환해야 한다. 금융위원회는 아울러 모든 채무를 한꺼번에 들여다보는 총체적 상환능력평가심사(DSR)를 가계 대출에 도입하겠다고 덧붙였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투자 자 처지에서는 분할상환이 부담되기 때문에 이번 대책은 투기 수요를 효과적으로 억제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설상가상, 대출금리 인상
그러나 단기간에 쏟아진 주택·금융 규제가 무주택 서민의 시장 접근마저 막을 것이라는 의견이 적잖다. 대출 규제로 자금 마련에 부담을 느껴 실수요마저 크게 위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남수 신한금융투자 투자자문부 팀장은 “한 달 새 정부의 주택·금융 규제가 집중되면서 저소득층과 실수요자의 주택시장 진입 장벽이 한층 높아졌다”며 “11·3 부동산대책의 여파로 주택시장이 조정 국면에 들어선 상황에서 대출 규제까지 가해져 시장이 더 위축될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벌써부터 계약 및 입주 포기자가 속출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권일 부동산인포 리서치팀장은 “8·25 가계부채대책 이후부터 대출 심사가 강화돼 수요가 위축됐는데, 이번 후속 대책으로 잔금대출이 까다로워지면 내년 1월부터 분양하는 아파트에 청약 당첨이 되더라도 자금력이 떨어져 계약 및 입주를 포기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의 대출 규제 속에서 연 4.5%를 돌파한 시중은행의 대출금리도 또 다른 악재로 꼽힌다. 대출금리가 연 2%대에서 4% 수준으로 오르면 3억 원을 대출받은 사람은 매달 100만 원씩을 이자로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무주택자를 위한 정책금융의 금리 인상 가능성마저 고개를 들고 있다. 이달 보금자리론의 금리를 동결한 한국주택금융공사는 내년엔 시장금리의 변동 상황 등을 고려해 금리를 조정할 뜻을 내비쳤다.
내 집 마련을 희망하는 무주택 서민의 부담이 가중되리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잔금 조달이 여의치 않아 입주를 포기하는 사례가 늘면서 자칫 입주 대란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함영진 부동산114 리서치센터장은 “이번 대책으로 분양권을 통한 거래가 급감할 수 있다”며 “11·3 부동산대책은 서울 강남권과 수도권 일부 지역을 대상으로 하지만 실상은 전국 분양시장을 규제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시장 침체가 가속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