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김모(31·여) 씨는 최근 인터넷 중고장터 카페에서 ‘옥시토신을 판다’는 게시글을 봤다. ‘스프레이 형태로 의복, 침구 등에 뿌리면 가족·연인 간 애정지수를 높이며 일상생활이 즐거워진다’는 내용이었다. 김씨가 호기심에 상품 정보를 검색해보니 귀가 솔깃할 만한 설명이 쏟아져 나왔다. 옥시토신을 흡입하면 매력지수가 높아지고, 대중 앞에서 발표하거나 취업 면접을 볼 때도 자신감이 향상된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심리 형성을 통해 대인관계가 개선되고 애완동물과 정서적 유대감이 높아진다는 설명도 있었다.
옥시토신(oxytocin)은 뇌하수체 후엽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특히 여성의 출산과 모유 수유 시 급격하게 증가한다. 여성이 아기를 낳을 때 자궁을 수축해 분만을 돕기 때문에 ‘자궁수축호르몬’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엄마가 아기에게 정서적 유대감을 느끼거나 남녀가 서로에게 애정을 느낄 때도 왕성히 분비돼 ‘사랑호르몬’이라는 별칭도 있다. 그런데 이 옥시토신을 인위적으로 늘리는 법이 최근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알약이나 액상, 스프레이 형태로 복용하거나 흡입하는 방법이다.
아이의 과격한 행동·자위, 약물 때문?
먼저 ‘옥시토신 스프레이’는 미국 V사에서 아마존 등을 통해 판매하는 제품이다. 국내에서는 10월 한 업체가 정식 수입을 시작했다. 이 상품은 ‘신뢰감 강화’ ‘이성 간 매력지수 상승’ 같은 광고 문구를 내걸고 활발하게 팔리고 있다. 제품을 구성하는 성분은 옥시토신, 정제수, 코퓰린(여성용) 또는 페로몬(남성용), 알코올 등이다. 옥시토신을 함유하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의사의 처방 없이 인터넷에서 자유롭게 구매할 수 있다. 옥시토신은 경구용 알약, 액상, 붙이는 패치 형태로도 소비된다. 국내 일부 발달장애아 부모는 아이 치료 목적으로 옥시토신을 불법적으로 구입해왔다. 해외에서 ‘옥시토신이 자폐증을 개선하고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자 일부 의사가 발달장애아 부모에게 권했기 때문이다. 해당 알약은 2012년 미국에서 출시됐지만 아직 국내에는 정식 수입되고 있지 않다.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 관계자는 “식약처가 승인한 옥시토신 함유 의약품은 분만을 유도하는 자궁수축 주사제뿐이다. 경구용 또는 스프레이 형태의 옥시토신 가운데 식약처가 허가한 제품은 없다”고 설명했다.국내에 정식 수입되지 않는 약을 어떤 경로로 구하는 것일까. 한 발달장애아의 부모인 김모(42) 씨는 “5~6년 전부터 일부 의사 또는 미국에 사는 지인을 통해 옥시토신 알약을 구한 부모들이 있다고 들었다. 아이 치료가 절박하니 그만큼 어렵게라도 약을 구하는 것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옥시토신이 대인관계를 개선하고 사회성을 향상한다는 연구 결과는 수차례 보고된 바 있다. 2010년 4월에는 애덤 과스텔라(Adam Guastella) 호주 시드니대 박사가 “옥시토신을 투여받은 자폐아가 그렇지 않은 자폐아보다 상대방의 감정을 잘 인식했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2013년 12월 일래닛 고든(Ilanit Gordon) 미국 예일대 의과대 박사는 “옥시토신 스프레이를 흡입한 자폐아의 감정 이입 등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뇌 부위가 활성화됐다”고 밝혔다. 이 같은 연구 결과가 공개되면서 옥시토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고, 의사 처방 없이 구매할 수 있는 스프레이형 제품도 활발하게 판매됐다.
그렇다면 ‘옥시토신 약’은 정서에 긍정적인 영향만 미치는 것일까. 일부 소비자 사이에서는 “옥시토신을 먹인 후 아이가 이상해졌다”는 부작용 사례도 들려오고 있다.
주부 정모(43) 씨는 3년 전 옥시토신 알약을 구해 자폐아 아들에게 먹였다. 국내에서 살 수 없는 알약이어서 미국에 사는 친구가 입국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량으로 사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정씨의 친구는 미국에서 불법으로 대리 처방을 받아 약을 구입했다.
약 복용 후 2주가 지나자 아들의 증상이 눈에 띄게 좋아지는 듯했다. 또래와 눈을 맞추는 횟수가 늘어나고 엄마와 대화에도 더 집중하게 된 것. 평소 친하지 않던 여자아이들에게 다가가면서 웃는 행동도 보였다. 정씨는 “옥시토신 효과를 봤다”고 기뻐하며 액상 제제와 스프레이까지 구매했다. 그런데 몇 주가 더 지나자 아이가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별것 아닌 일에 놀라거나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가 하면, 이불 안에서 자위를 하는 듯 성기를 만졌다. 정씨는 “겨우 다섯 살인 아이가 자위 비슷한 행동을 하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사례가 많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고 말했다. 주위 엄마들과 이야기를 해보니, 정씨의 아들처럼 옥시토신 제제를 복용한 자폐아 가운데 성기를 만지거나 갑자기 뛰어다니는 등 과격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발달장애 생의학 연구소인 그레이트플레인스연구소의 한국지사장 황순재 씨는 “옥시토신 복용이 과하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긍정·부정 효과 단정하기 일러
“체내에 옥시토신이 증가하면 성적 또는 사회적 욕구가 커질 수 있다. 그런데 발달장애인은 뇌에서 감각기능을 관장하는 부분이 덜 활성화돼 있다. 이때 옥시토신을 무리하게 주입하면 감각을 추구하는 행동이 평소보다 강해진다. 감각 중 가장 예민한 것이 촉각인데, 성기를 만지는 행동은 이 촉각을 최대한 세게 느끼는 것이다. 일부 발달장애아처럼 자신의 행동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 옥시토신 제제를 잘못 복용하면 속칭 ‘바바리맨’, 즉 사회적 변태가 될 수도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연구팀도 2011년 옥시토신의 부작용에 대한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옥시토신 스프레이를 코에 뿌린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을 비교한 결과 스프레이를 뿌린 실험 참가자들은 같은 국적의 사람을 신뢰한 반면, 다른 국적의 사람을 배척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것. 옥시토신이 상대방에 대한 호감과 신뢰성만 증가시킨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분석이다.
식약처가 허가하지 않은 의약품을 불법경로로 구매, 복용하다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이주영 녹색건강연대 본부장(약사)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같은 약이라도 인종에 따라 약효가 다르기에 식약처가 허가하고 국내 임상시험을 거친 의약품을 쓰는 편이 안전하다. 그것이 사후 보상도 합법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길이다. 또한 옥시토신처럼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인 호르몬은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약과 부작용의 인과관계가 명확지 않으면 환자를 임상시험 대상자로 삼는 꼴이다.”
의학계에서는 “옥시토신의 영향을 한 가지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김준원 대구가톨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옥시토신 제제의 효과는 아직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 위약 대조 연구에서는 큰 효과가 없다는 결과도 보고됐으며, 특히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자폐장애 관련 실험에서는 뚜렷한 개선 효과를 보여주지 못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옥시토신 효과에 대해서는 향후 활발한 논의와 연구가 이뤄져야 한다. 옥시토신 투여 후 성적 호기심이나 활동성 증가 사례가 있긴 하지만 약물 때문이라고 단정하기엔 이르다. 보고된 부작용으로는 감정 불안, 두통, 소화기계 관련 증상 등이 있지만 이는 단기 사용 시 나타나는 사례다. 장기간, 특히 어린아이에게 사용했을 경우를 조사한 결과는 아직 많이 부족한 실정이다. 따라서 일부 사례나 광고를 보고 옥시토신 효과를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