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다. 하지만 희대의 국정농단 사건이 온 나라를 혼돈 속에 빠뜨린 이 난세에 정치권의 영웅은 없는 듯했다. ‘폐족’의 일원이 된 여당 정치인은 물론이고, 야당 리더 가운데도 특별히 국민적 성원을 받는 인물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상황을 이끌고 간 것은 정치인이 아니라 240여만 개의 촛불이었다. 그런데 촛불정국 한복판에서 유독 급부상한 인물이 있으니, 인구 100만 도시의 기초단체장에 불과한 이재명 성남시장이다. 이 시기에 촛불을 들고 나온 시민 말고 다른 영웅이 있겠느냐만, 그래도 그가 대통령선거(대선)로 가는 정치권의 ‘혜성’이 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이 시장의 상승세는 말 그대로 파죽지세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의 11월 다섯째 주 주간 집계에 따르면 그의 지지율은 14.7%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20.8%)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18.9%) 바로 뒤로 올라섰다. 국민의당 안철수 전 상임공동대표(9.8%)를 4.9%p 차로 앞서면서 ‘빅3’ 반열에 오르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여론조사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인터넷 홈페이지(www.nesdc.go.kr) 참조).
물론 이 지지율에 ‘현상’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그의 가파른 상승세가 심상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 시장의 지지율이 야당의 기반인 수도권과 호남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앞의 리얼미터 조사를 보면 그는 서울에서 지지율 18.4%로 문 전 대표(19.3%)와 박빙의 상황이고, 호남에서도 15.4% 지지율을 얻고 있다. 수도권과 호남에서 유력 대선주자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은 앞으로도 이 시장의 상승세가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의 근거이기도 하다.
이 시장이 처음 대선에 도전한다는 얘기를 했을 때 그리 진지한 말로 귀담아들은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기껏해야 참가에 의의를 두는, 아니면 경선 흥행에 기여하고 결국 문 전 대표의 손을 들어주는 데 그칠 것으로 내다본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언론이 줄지어 이 시장을 인터뷰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이 시장의 급상승은 촛불정국 속에서 이뤄졌다. 리얼미터의 10월 셋째 주 주간 조사 때 5.3%에 불과하던 이 시장의 지지율은 그 뒤 촛불집회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6주 만에 9.4%p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이 국면에서 이 시장은 대선주자 가운데서는 가장 먼저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과 탄핵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제는 모두가 퇴진과 탄핵을 요구하고 있지만, 당초 야당들은 그 말을 입에 담는 데 대단히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자칫 역풍이 불 수도 있음을 감안해 일단 ‘질서 있는 퇴진론’을 내세웠다. 그 상황에서 이 시장은 곧바로 퇴진과 탄핵을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어쩌면 후발주자로서 부담이 덜한 위치에 있기에 정치공학적 계산 없이 거침없는 주장을 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분노한 국민의 마음을 제대로 읽은 것이 됐다. 물론 그 뒤 안 전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등도 퇴진과 탄핵을 요구하고 나섰지만 촛불민심을 껴안은 대선주자라는 위치를 선점한 것은 이 시장이었다.
누구보다 빨리 촛불민심을 읽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 과정에서 이 시장이 꺼냈던 초강경 발언 혹은 독설이 지지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통령직을 박탈한 후 구속해서 형사처벌해야 한다.” “(세월호 7시간 의혹은) 미필적고의에 의한 살인 혐의가 상당하다.” “(박근혜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끌어 잡아 박정희의 유해 옆으로 보내주자.” 정치인은 대부분 머릿속 생각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지 숙고한다. 자신의 발언이 국민 눈높이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한 정치적 고려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장이 쏟아내는 이런 거침없는 말들에는 그런 주저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자기 생각을 직설적으로 쏟아내곤 한다.사실 그동안 정치적 경험들을 놓고 보면 대단히 위험한 방식이기도 하다. 자칫하면 험한 말이라는 논란에 휩싸여 역풍을 맞기도 한다. 그래서 대선주자급 정치인이 되면 너나없이 품격 있고 점잖은 언어를 사용하는 데 익숙하다. 무엇보다 그것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장은 이런 불문율을 깨뜨린다. 트럼프식 정치인이라는 역풍을 맞는 대신 ‘사이다’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무엇이 달라서일까.
지금은 함께 분노하는 정치인을 원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엄청난 모욕과 배신감을 안겨준 ‘박근혜 게이트’ 앞에서 국민은 정제된 언어보다 오히려 자신의 분노를 주저 없이 표현해주는 언어를 원하는 것이다. 동료와 밥 먹는 자리에서 함께 하던 대통령 욕을 대선주자가 해주니 후련한 게 지금 국민의 정서인 셈이다. 촛불정국은 이렇게 대선주자에 대한 전통적 평가 기준마저 바꿔놓았다.
박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 의결 여부가 판가름 난 이후에도 이 시장의 상승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다면 탄핵정국은 헌법재판소의 최종 결정이 있기 전까지 대략 수개월간 이어진다.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매듭지어질 때까지는 촛불로 분출된 국민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촛불은 다시 헌법재판소의 주변을 밝히며 꺼지지 않을 테다. 이는 탄핵 의결 이후 정국에서도 이 시장의 목소리가 계속 살아 있을 수 있는 환경을 의미한다.
이 시장의 지속적인 상승을 예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야권 선두주자인 문 전 대표의 본선 경쟁력에 대한 회의적 시선 때문이다. 이 시장이 대선후보 경선을 치러야 하는 민주당에서 현재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는 당연히 문 전 대표다. 하지만 문 전 대표는 탄핵정국 내내 지지율이 박스권에 갇히는 정체 현상을 보였다.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이 폭락했으면 야권 선두주자의 지지율은 껑충 뛰는 것이 정상임에도 문 전 대표는 그렇지 못했다. 촛불정국에서 문 전 대표가 보여준 좌고우면, 갈팡질팡 행보는 야권 지지층 내에서도 그의 리더십에 대한 우려를 낳았다. 게다가 박 대통령을 비난하는 보수층에서는 여전히 ‘문재인이 대통령 되면 안 된다’는 시각이 자리 잡고 있다. 확장성이란 벽을 넘으려는 문 전 대표의 노력에도 비토층은 바뀔 조짐이 없다. 이에 따라 그의 본선 경쟁력에 대한 회의적 시선이 계속 따라다닌다. 이 시장이 ‘문재인 회의론’을 파고든다면 역전극을 펼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진보의 이회창’이 될지도 모르는 문 전 대표를 다시 한 번 미느니, 떠오르는 새로운 인물에게 힘을 실어주자는 생각이 야권 내에서 확산될 가능성이 분명 있다.
그러나 확장성의 문제는 이 시장이 파고들 수 있는 문 전 대표의 취약한 고리이지만, 반대로 이 시장에게도 돌아오는 질문이라는 역설이 성립한다. 이 시장은 문 전 대표가 넘어서지 못한 확장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오히려 문 대표가 갖고 있는 최소한의 안정성보다 더 불안한 것은 아닌가. 그 같은 질문이 이 시장을 따라다닌다.
넘어야 할 확장성의 벽
실제로 이 시장의 급상승에도 그것을 일시적 현상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적잖다. 그의 상승은 촛불정국이라는 특수 환경에 힘입은 것이고, 이 시기가 지나면 꺼지기 쉬운 거품의 성격이 강하다는 얘기다. 특히 그가 가진 ‘과격한 진보’ 이미지로는 중도층의 지지를 얻는 확장성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야당이 본선에 내세울 후보는 아니라는 회의적인 의견이 많다.
이 같은 시선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이 시장은 확장성을 의식한 ‘중도 코스프레’를 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중도로 이동하면 정체성을 잃고, 애매모호하게 왔다 갔다 하면 오히려 의심받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동안 대선에 나선 여야 주자는 너나없이 중도층의 지지를 얻고자 중도화에 노력을 기울였다. 중도층의 지지가 없으면 결코 본선에서 이길 수 없다고 공통적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시장은 지금까지 보였던 기조를 바꾸지 않은 채 그 같은 통념을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어쩌면 실험과도 같은 그의 선택이 계속 유권자의 호응을 받을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이 시장은 최근 ‘서울신문’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전 대표는 경륜과 역량, 자질을 갖춘 분으로 세종과 같은 태평성대를 만들 수 있지만, 지금은 손에 피도 묻히고 진흙탕에 뒹굴기도 해야 한다. 태종과 같은 리더십이 필요하다.” 지금은 문재인 리더십이 아니라 이재명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라는 얘기다. 다만 정몽주를 비롯해 반대파를 처형한, 즉 이 시장의 표현대로 손에 피를 묻히고 정권을 잡은 태종 이방원의 리더십이 얼마만큼이나 국민의 동의를 받을지는 확인되지 않은 문제다.
탄핵 이후 민심이 변화와 안정 가운데 어느 쪽에 방점을 찍을 것인지에 따라 이 시장의 부침도 크게 영향받을 것이다. 민심이란 종종 대단히 변덕스러운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기에 상황과 분위기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평가를 받는 것이 대선주자 이재명 앞에 놓인 숙제다. 이 시장에 대한 지지는 촛불정국 분위기에 따른 일시적 선택인가, 아니면 시대의 분노를 대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적극적 동조인가. 이제 빠르게 돌아갈 대선시계가 머지않은 시간 내 그 답을 알려줄 것이다.